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87호] 20081108 입력]
■ 정권의 패륜을 본 인재들, 목숨은 줘도 마음은 안 줘.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
③ 사육신· 생육신
가치관은 그 어떤 물질보다 중요하다. 세조는 세종이 집현전을 통해 확립한 유교적 가치관을 뒤집었다.
유학자들은 세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정권은 잡았지만 온갖 부작용에 시달려야 했다.
세조를 축출하려는 시도가 잇따랐고, 유학자들이 출사를 거부하는 등 숱한 사회적 자산이 낭비되었다.
세조 2년(1456) 6월 1일 아침. 호조참판이자 외삼촌인 권자신(權自愼:현덕왕후의 동생)의 절을 받는 상왕 단종의 가슴은 뛰었다. 『세조실록』은 이때 단종이 권자신에게 ‘긴 칼을 내려주었다’고 전한다. 상왕과 세조가 창덕궁 광연전(廣延殿)에서 명나라 사신 윤봉(尹鳳)에게 연회를 베푸는 날이었다.
수양을 임금으로 책봉한다는 명 대종(代宗)의 고명(誥命)을 가지고 온 데 대한 답례였다.
성삼문 등은 권자신의 모친, 즉 단종의 외조모 최씨를 통해 거사 계획을 알렸다.
단종은 긴장 속에서 거병을 기다렸으나 연회가 파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세조실록』이 “낮인데도 어두웠다(晝晦)”고 쓰고 있는 다음날. 성균관 사예(司藝) 김질(金질)과 장인인 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이 대궐로 달려가 ‘비밀리에 아뢸 것이 있다’면서 충격적 사실을 털어놓았다.
성삼문(成三問)이 김질을 찾아와 “이러한 때를 맞이해 상왕의 복립(復立)을 창의(唱義)한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라며 세조를 죽이려 했다는 고변이었다. 세조는 즉시 호위 군사를 모으고 승지들을 급히 불러 좌부승지 성삼문을 꿇어 앉혔다.
세조가 “김질과 무슨 일을 의논했느냐?”고 묻자 성삼문은 한참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김질과 면질(面質)하고 나서 말하겠다”고 답했다. 김질이 다시 입을 열자 성삼문은 “다 말할 것 없다”고 말을 막았다. 세칭 사육신(死六臣) 사건, 곧 상왕 복위 기도 사건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 같은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들과 유응부(兪應孚)·성승(成勝)·박쟁(朴쟁) 같은 고위급 무신들이 결합한 사건이었다. 명 사신 접대 연회에서 성승·유응부·박쟁이 임금 뒤에 칼을 차고 시위하는 별운검(別雲劍)으로 뽑힌 것이 기회였다. 그러나 광연전이 좁고 덥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폐지하면서 계획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육신은 칼에 잘린 핏빛의 대나무와 같았다. 무수히 많은 대나무와 죽순(생육신과 절개 있는 충신들을 상징)은 꾀꼬리(단종)를 향해 서있다. 대나무가 끝없이 죽순을 내는 것처럼 조선 유학자 사회에서 충신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두 동강 난 칼은 세조의 패륜에 대한 역사의 심판을 뜻한다.
『세조실록』은 “성삼문이 승정원에 건의하여 없앨 수 없다고 다시 계청하자 신숙주에게 내부를 살펴보게 하고는 드디어 들이지 말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자 문신들이 거사 연기를 주장했다.
『육신전(六臣傳)』은 무신 유응부가 “이런 일은 신속히 하는 것이 좋고,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된다”며 결행을 주장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는 문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세조가 농사의 작황을 살피는 관가(觀稼) 때 거사하기로 연기했다.
그러자 유응부의 우려대로 동지였던 김질이 고변자로 돌아선 것이었다. 관련자들이 잡혀왔으나 아무도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육신록(六臣錄)』은 잡혀온 박팽년이 “내 임금(단종) 신하지 어이 나으리(세조) 신하리요”라고 말했고, 이개는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리까”라고 항의했다고 전한다.유응부는 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사람들이 ‘서생(書生)들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라고 탄식하며 죽어갔다.
세조 일당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박팽년이 자백한 관련자만 박팽년과 부친 박중림(朴仲林), 성승·성삼문 부자, 하위지·유성원·이개·유응부·김문기·박쟁·권자신·송석동·윤영손·이휘 등 14명이었다.
세조 일당은 관련자의 부친과 형제, 아들들을 모두 죽여 대를 끊었다.
그러나 『선조실록』 36년(1603) 4월조는 박팽년의 유복(遺腹) 손자 박비(朴斐)는 딸을 낳았다고 속이고 죄인들을 점검할 때마다 여종을 대신 바쳐 죽음을 면했다고 전한다.
이 사건은 세조의 즉위 명분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영조 40년(1769) 『장릉지(莊陵誌)』의 서문을 쓴 남학명(南鶴鳴)은 “조정에서 금지령을 내렸으나 집집마다 『육신전』을 간수해 두고 외우다시피 했다”고 전하고 있다.
세조는 공자의 말대로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天 無所禱也)”는 상황이 된 것이다. 사건 직후 세조는 8도 관찰사에게 “아직도 소민(小民)들이 두려워할까 염려하니, 소민들을 경동하지 않게 하라”는 전지를 보내 백성의 소요를 두려워하는 심경을 드러냈다.
용안(龍眼)이란 무녀(巫女)가 ‘금년에 상왕께서 복위하시는 기쁜 일이 있다’는 점을 친 사실이 드러나 능지처참을 당하는 등 사회 불안이 계속되었다. 세조는 공신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지 않으면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그래서 수백 명에 달하는 부녀자를 종친들과 공신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일례로 박팽년의 아내 옥금(玉今)는 정인지가, 조완규(趙完圭:김종서의 측근)의 아내 소사(召史)와 딸은 신숙주가, 유성원(柳誠源)의 아내 미치(未致)와 딸은 한명회가 차지했다.
조선 중기 윤근수(尹根壽)가 지은 『월정만필(月汀漫筆)』이 ‘신숙주가 노산군의 왕비 송씨를 받으려 했다’고까지 전하는 것처럼 몇 달 전만 해도 동료의 부인이거나 딸이었던 여성들을 성적 노리개나 여종으로 삼은 이들의 행위는 패륜으로 인식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유 토지까지 나누어 가졌다. 장물을 나눔으로써 결속을 강화하는 식이었다.
세조는 그해 6월 21일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하고 영월로 귀양 보냈는데, 『육신록』은 ‘풀로 엮은 집이요, 사면에 가시울타리를 둘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세조 일당은 단종의 생존 자체에 공포를 느꼈다.
단종이 살아 있는 한 뒤집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연 이듬해(1457)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 간 세조의 친동생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기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신숙주는 “이유(李瑜:금성대군)가 또 노산군을 끼고 난역을 일으키려 하였으니, 노산군도 편히 살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단종의 사형을 선창했고, 정인지가 “노산군은 반역을 주도했으니 편안히 살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가세했다.
양녕·효령대군도 “속히 법대로 처치하소서”라고 가담했다. 과거의 임금을 죽이자고 청하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훗날 선조 때 쓰인 『대동운옥(大東韻玉)』이 “수상 정인지가 백관을 거느리고 노산을 제거하자고 청하였는데, 사람들이 지금까지 분하게 여긴다”고 비판하고, 이덕형(李德馨)은 『죽창한화(竹窓閑話)』에서 “그 죄를 논한다면 정인지가 으뜸이 되고, 신숙주가 다음이다”라고 전하는 것처럼 후세까지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세조실록』은 금성대군과 장인 송현수가 사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어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의 문신 이자(李자)가 『음애일기』에서 자살설을 부정하면서 ‘여우나 쥐새끼 같은 무리들의 간사하고 아첨하는 붓 장난이니, 실록을 편수한 자들은 모두 당시에 세조를 따르던 자들이다’고 비난한 것처럼 조작의 혐의가 짙었다.
『병자록(丙子錄)』은 사약을 가지고 간 금부도사가 왕방연(王邦衍)이라고 적고 있고, 훗날 『숙종실록』에도 이 사실을 적고 있는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육신록』과 『단종출손기(端宗黜遜記)』는 금부도사가 나타나자 단종이 하늘을 우러러 “푸른 하늘이 이렇게 앎이 없단 말인가?”라고 탄식하고, “돗개무리(개·돼지)가 어느 면목으로 차마 일월(日月) 아래 다니느냐”고 꾸짖었다고 전한다.
금부도사가 엎드린 채 울자 공생(貢生:관가의 심부름꾼)이 활시위로 단종의 목을 졸랐는데, 공생은 문밖을 채 나가지 못하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죽었다고 『육신록』 등은 전한다.
세조의 찬시(簒弑:왕위를 빼앗고 죽임)는 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가치관이 붕괴되었고, 왕실은 충성의 대상에서 극복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육신전』의 저자 남효온(南孝溫)과 5세 신동 김시습(金時習)은 과거 응시를 거부해 생육신(生六臣)으로 남았다. 엄청난 사회적 자산이 낭비되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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