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회영(李會榮) - 상서공후 백사공파

야촌(1) 2010. 9. 4. 06:23

■ 35世 이회영(李會榮)

   [생졸년] 1867년(고종 4)∼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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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慶州). 호(號)는 우당(友堂). 서울 출신. 판서 유승(裕承)의 아들이다.
 
1906년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소식을 듣고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이갑(李甲) 전덕기(全德基) 양기탁(梁起鐸) 이동녕(李東寧) 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는 한편, 만주에 광복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책임자로 교포교육에 주력하게 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헤이그에서 열릴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하여 여준(呂準)을 만주로 파견하였으며, 1908년 헤이그특사로 갔다 온 이상설을 찾아 만주로 가서 앞으로의 진로를 협의한 끝에 국외활동은 이상설이, 국내활동은 자신이 담당하기로 협의하고 귀국하였다.


먼저 교육진흥운동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동지들을 각 학교에 파견하여 교육에 진력하도록 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金九)· 이동녕·주진수(朱鎭洙)· 안태국(安泰國)· 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하여 강탈당하자 전가족이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하였다. 1911년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지도자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 뒤의 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W.)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되어 국내외에서 독립기운이 활발하여지자 오세창(吳世昌)· 한용운(韓龍雲), 이상재(李商在) 등과 밀의한 뒤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하여 고종에게 상주하여 쾌락을 얻었으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上海)에 수립되었으나 의견의 차이로 상해에 머무르지 않고 북경(北京)에 체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침략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동지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행동강령으로 일본군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외교기관 폭파 등을 결정하고,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받았다.


그해 11월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 조직, 주만일본군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대련(大連)으로 향하던 도중, 대련의 일본수상경찰에 잡혀 악독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韓國獨立運動史(愛國同志援護會, 1956)
◇독립운동사 3∼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1973)
◇독립운동사자료집 1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