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홍업(李弘業) - 익재공후 재사당공파

야촌(1) 2010. 9. 4. 04:54

■ 27世 이홍업(李弘業)

 

   [생졸년] 1540년(중종 35)~1597년(선조 30) 향년 58歲

   [문과] 1579년(선조 12)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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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시립(時立), 호(號)는 포세(逋世). 의영고령(義盈庫令), 한성판관((漢城判官)을 역임한 개윤(愷胤)의 아들이다.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박사·병조좌랑(兵曹佐郞 : 正六品) · 고창현감(高敞縣監 : 正六品) 등을 거쳐 지평(持平 : 正五品) 으로 있을 때 미움을 받아 함경도 경성도호판관((鏡城都護判官 : 從五品)으로 좌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적장 가토(加藤淸正)의 군대가 함경도 회령에 이르렀을 때 회령부사 국경인(鞠景仁)이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비롯하여 수십인을 포박하여 왜군에 투항하였는데, 이때 그도 체포되었다.

 

적장이 강화문서를 작성하여 포로가 된 왕자와 대신에게 강제로 서명(署名)하게 한 뒤 그 문서를 그에게 전달하면서 행재소(行在所)인 의주로 가게 하였다. 행재소에 도달하였으나 적의 문서를 가지고 온 것은 나라를 욕되게 한 짓으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는 탄핵을 받아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세번이나 소를 올렸는데, 왕자의 급박한 상황을 말하고 잡혀 있는 대신들의 전언을 상세히 아뢰었다. 적의 문서를 전달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 왕자를 구출하는 것임을 말하고, 그 방법을 모색하여 줄 것을 간언하였다.

 

그의 충성심이 받아들여져 사형은 면하고 길주로 유배되었다가 4년 뒤에 풀려났다.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 되었다.

 

※의영고령(義盈庫令)

   조선시대 호조(戶曹)에 소속된 관청으로 기름, 꿀, 밀(황랍), 체소, 후추 등의 물품에 관한 출납 사무를 맡았던 관

   청의 수장(首長)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