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현직(李顯稷) - 국당공후 문정공파

야촌(1) 2010. 9. 2. 17:26

■ 34世 이현직(李顯稷)

 

[성 명] 이현직(李顯稷)[

[생몰년] 1797년(정조 21)∼1876(고종 13)

[본 관] 경주(慶州)

[자·호] 백형(伯衡)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무신(武臣)

 

[세계도]

이현직(李顯稷) 선생은 33世 광암공 이벽(曠庵公 李蘗/세례명: 요한세자)의 백부에게로 양자 입적했다.

 

17世 국당공 천(蒨)→18世 문정공 경중(敬中)→21世진사공타(佗)→23世 감정공 거(筥)→26世 지퇴당공

→27世 찰방공 이숙(李潚)→28世 묵암공  경상(慶相)→32世 동추공 부만(溥萬)→33世 격(格)→34世 계자 현직(顯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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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백형(伯衡), 호(號)는 오산(梧山)으로, 양부(養父)는 1769년(영조 45) 무과에 올라 총관(摠管)을 지낸 이격(李格, 1748~1812)이고 양모는 안동김씨(安東金氏, 1748~1820)이다.

 

생부(生父)는 이욱「李稶, 1763(영조 39)~1807(순조 7)」이고 생모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공(公)은 1823년(순조 23)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1829년(순조 29) 12월 25일 고성현령(固城縣令)에 제수되고. 1830년(순조 30) 2월에 부임하여  1831년 08월에 중죄인이 옥에서 달아 난 일로 파직되었다.

 

그리고 1875년 6월 그곳 읍인들이 그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선정비를 세웠다(行 縣令 李顯稷 善政碑)

또한  1846년(헌종 12)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와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를 지냈으며, 1854년(철종 5) 삼도수군통제사( 三道水軍統制使)·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1865년(고종 2) 총융사(摠戎使)가 되었고, 이듬해 어영대장(御營大將)과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있으면서 경복궁 중건을 감독하였다.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난 뒤 전국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보내 주로 변방 방비를 사찰하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통제사들의 죄가 드러나 중신인 그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水軍節度使)에 특별히 임명하였다.


그러나 1869년(고종 6) 호포전(戶布錢)을 걷기 위하여 작성한 호적에 향리들의 부정이 있어 일어난 고성민란으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형조판서(刑曹判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를 거쳤고, 신미양요(辛未洋擾)가 거의 끝나갈 때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에 임명되었다.

 

경복궁 신무문(神武門)의 현판이 선생의 글씨이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哲宗實錄  ◇高宗實錄  ◇金甌錄  ◇武陞資錄

 

 

↑소재지 : 고성 남산공원 비석거리

 

고성총쇄록(固城叢瑣錄 : 오횡묵(吳宖默)이 경상남도 고성군 부사(府使)로 재임하던 기간에 쓴 일기)에서

李顯稷의 사적비는 客舍 길옆에 있었다고 한다.

 

선정(善政)을 베푸심이 한 가지가 아니라, 그 송성(頌聲)들이 사방으로 퍼졌도다.

이 여덟 글자로 사실을 써서, 그 의지를 표양하리라.

 

어른들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현령께서 이곳에 계실 적에, 사람들이 알면서도 그 업적을 펼쳐주지 못하였다하니, 이 비석으로 보여주리라. 1875년 6월 읍민이 세우다.

 

 

 

 

경남 고성 남산공원 입구에는 1972년 개천절에 고성군수 허직(許稙)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이곳에 옮겨 둔 사연을 적었는데, “나라와 이웃을 사랑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형제기리 우애한 옛 얼을 되새기기 위하여 뉘 돌보는 이 없이 빗물에 씻기고 바람에 넘어져 이곳저곳에 버려져 있던 옛님의 얼을 아로새긴 빗돌을 여기 한자리에 옮겨 세웁니다.”라 적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