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인풍(李寅豊) - 국당공후 정순공파

야촌(1) 2010. 8. 24. 20:57

■ 34世 이인풍(李寅豊)

    [생졸년]  1813년(순조 13)∼1882년(고종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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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로, 자(字)는 후천(厚天)이고, 호(號)는 추재(秋齋)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정순공(靖順公) 성중(誠中)의 16세손이다. 

 

전라북도 익산시(益山市) 봉동읍(鳳東邑) 성덕리(成德里)에서 태어나,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으로 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과 지속적으로 교유하였다. 효행이 높아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경전(經傳) 읽기를 좋아하고,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근검절약으로 어렵게 여기지 않았다. 부모님의 나이가 들어 병석에 들자 여러 해 동안 병환을 돌보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그 피로 부모님을 회생시켰으나 오래지 않아 돌아가셨다.

 

부모의 상에 3년간 시묘살이는 물로 부모를 잃은 슬픔에 날마다 울며 날을 세웠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그대로 실천하였다. 전주향교의 55군의 유림들과 전주향교 임별철(林秉徹)외 41명의 추천으로 1930년 대성교회(大成敎會) 숭포부(崇褒部) 교장(敎長) 김재순(金在珣)외 11인이 뜻을 모아 포상하였고, 성덕리에 정려를 세워 그의 효행을 기렸다.

 

후에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며, 그의 묘는 현재 전주시(全州市) 삼천동(三川洞)에 있고, 신도비의 글은 송재성(宋在晟)이 짓고 증손인 이종명(李鐘明)과 이종택(李鐘擇)이 썼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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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인물지 소개 글

 

전라북도 익산시(益山市) 봉동읍(鳳東邑) 성덕리(成德里)에서 태어나,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으로 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과 지속적으로 교유하였다. 효행이 높아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경전(經傳) 읽기를 좋아하고,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근검절약으로 어렵게 여기지 않았다. 부모님의 나이가 들어 병석에 들자 여러 해 동안 병환을 돌보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그 피로 부모님을 회생시켰으나 오래지 않아 돌아가셨다.

 

부모의 상에 3년간 시묘살이는 물로 부모를 잃은 슬픔에 날마다 울며 날을 세웠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그대로 실천하였다. 전주향교의 55군의 유림들과 전주향교 임별철(林秉徹)외 41명의 추천으로 1930년 대성교회(大成敎會) 숭포부(崇褒部) 교장(敎長) 김재순(金在珣)외 11인이 뜻을 모아 포상하였고, 성덕리에 정려를 세워 그의 효행을 기렸다.

 

후에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며, 그의 묘는 현재 전주시(全州市) 삼천동(三川洞)에 있고,  신도비의 글은 송재성(宋在晟)이 짓고 증손인 이종명(李鐘明)과 이종택(李鐘擇)이 썼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