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인걸(李仁傑) - 익재공후 청호공파

야촌(1) 2010. 8. 23. 17:43

■ 27世 이인걸(李仁傑)

    [생몰년] 1551년(명종 6) 9월 6일~1593년2월 12일[행주대첩(幸州大捷) / 당4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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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익재(益齋)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2월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권율(權慄)은 수원성에 주둔하고 있다가 1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집결하였다. 권율(權慄)은 조방장(助防將)조경(趙儆)으로 하여금 행주산성을 수축하도록 명하고 목책을 설치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군은 1593년(선조 26) 1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평양성 전투에서 패전하여 퇴각하였다.

명군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나,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일본군의 매복작전에 걸려들어 크게 패하고 퇴각하였다.

 

벽제관 전투의 승리로 사기를 회복한 일본군은 2월 12일 3만명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 전투가 이른바 행주대첩으로, 이때 그는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호남절의록》과 《행주대첩비》에 기록되어 있고,충청남도 금산(錦山) 금곡사(金谷祠)와 전라남도 영암(靈巖) 영호사(靈湖祠)에 배향되었다. 또한 《충효록(忠孝錄)》에도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영암군지 ◇임진왜란과 한중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