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익(李瀷) - 국당공후 정순공파

야촌(1) 2010. 8. 23. 16:44

■ 25世 이익(李瀷)

 

   [세   계] 국당공 후 정순공파, 충무공(忠武公) 이수일(李守一)의 조카 

   [생몰년] 1579년(선조 12)∼1624년(인조 2).

   [문  과] 광해(光海) 4년(161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4/34)
   [진  사] 광해(光海) 4년(161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9위(49/100)
   [생  원] 광해군(光海君) 4년(161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1위(3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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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형여(泂如), 호는 간옹(艮翁)· 옥포(玉浦). 아버지는 판관유일(惟一)이며, 어머니는 참봉민덕룡(閔德龍)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해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곧 검열에 등용되고, 1615년 전적에 승직되었다.

그뒤 사서(司書)· 정언(正言) · 헌납(獻納)· 지평(持平) · 장령(掌令) · 예조정랑((禮曹正郞 : 正五品)·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성균관 직강(直講-正五品)을 역임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는 논의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문초를 받았으나 끝내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행히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제주에 유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사예(司藝)와 장령(掌令) 등에 임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미처 왕을 호종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從三品)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國朝榜目 ◇國朝人物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