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윤(李潤)

야촌(1) 2010. 8. 22. 21:18

■ 이윤(李潤)

 

   [생몰년] 미상∼1592년(선조 25).

   [세계] 경주이씨 25世 - 국당공 후 문정공파

----------------------------------------------------

조선 중기의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존중(存中), 호(號)는 퇴사암(退思菴). 감사 감(堪)의 손자이다. 중봉(重峰) 조헌(趙憲)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음직으로 관계에 들어가 참봉을 역임하였다.

 

그후 1582년(선조 15) 죽산현감으로 재임하던 중 포탈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청주에서 조헌과 함께 창의하여 왜적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다시 금산에서 싸우다가 세력이 약하여 조헌과 함께 순절하였다.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뒤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그의 비문을 지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湖南三綱錄

--------------------------------------------------------------------------------------------------------------------------------------

증 이조 참판 이공 윤 묘표(贈吏曹參判李公 潤 墓表)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충절을 바쳤던 사람들이 수없이 서로 이어졌는데 금산(錦山)의 전투를 으뜸으로 일컫는 것은 아마도 중봉(重峰) 조 선생(趙先生 조헌(趙憲))의 충렬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때에 목숨을 바친 7백 의사(義士)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능히 그 이름을 거론함이 없으니 이는 한스러워할 만한 일이다. 지난 임진년(1892, 고종 29)에 성상(聖上)께서 나라를 중흥한 옛 공훈을 감동스럽게 생각하여 국난에 순국하였던 신하들을 찾아내어 제사를 지내고 정표(旌表)를 내려주되 사전(祀典)에 기재되지 않은 것까지 모두 차례로 제사 지내게 하였다.

 

이에 초야에 매몰되었던 자취가 약간씩 드러나니 퇴사암(退思庵) 이공(李公) 휘 윤(潤)이 그 중 한 분이다. 공의 자는 존중(存中)이고 경주(慶州)가 본관인데, 비조(鼻祖) 알평(謁平)은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이고, 고려 말의 문희공(文僖公) 세기(世基), 문효공(文孝公) 천(蒨), 국초(國初)의 정순공(靖順公) 성중(誠中) 등 세 세대가 정승(政丞)에 올랐다.

 

두 세대를 전하여 판서(判書) 휘 정석(廷碩)이 있는데 공에게 5세조가 된다. 증조부 휘 길안(吉安)은 사정(司正)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감(堪)은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냈고, 부친 휘 주신(周臣)은 임실현감(任實縣監)을 지냈다.

 

모친 안동김씨(安東金氏)는 현감(縣監) 맹함(孟諴)의 따님으로 여덟 명의 장부를 낳았는데 공은 그 중에서 넷째이다. 이른 나이에 문학으로 이름을 드러내고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을 종유(從遊)하였는데, 음사(蔭仕)로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었다.

 

벼슬을 버리고 남원(南原) 북쪽 말천(秣川)의 사인동(舍人洞)에 물러나 살았는데 곧 감사공(監司公)이 호남을 다스릴 때에 터를 잡은 곳으로, 감사공의 벼슬이 사인(舍人)이었으므로 이로써 이름을 붙인 것이다.

 

공은 선조의 사업을 계승하여 산수 간에 은거하여 여유롭게 지내면서 영예와 복록에 대한 생각을 끊었다.

 

왜적의 난리가 일어나자 북향하여 통곡하고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 “내 몸은 비록 조정에서 물러나 있지만 이러한 난리를 당하여 차마 나라의 위급함에 달려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서, 마침내 집안의 장정들을 거느리고서 조 선생과 의병을 규합하여 함께 금산(錦山)으로 달려가서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집안사람들이 의대(衣帶)를 가지고 사인동 뒤편 산기슭의 자방(子方 북쪽)을 등진 언덕에 장례 지냈는데, 부인의 묘소에 합봉(合封)하였다. 부인 순천(順天) 김씨(金氏)는 재건(在建)의 따님으로,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이름은 천행(天行)이며 첨정(僉正)을 지내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손자 희(煕)는 첨정(僉正)을 지냈는데 일찍 죽고 후사가 없으며, 둘째 손자 점(點)은 학행(學行)으로 교관(敎官)에 추증되었다. 증손자는 다섯 명으로 지고(志臯), 지설(志卨), 효성으로 교관에 추증된 지익(志益), 지열(志說), 지석(志奭) 등인데 모두 학술로써 명성이 있었다.

 

지석은 우옹(尤翁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후손들은 대부분 문학과 덕행으로 향리에서 명성을 알아주었다.

 

아! 공이 전사한지 거의 삼백 년이 되었으니, 세대가 멀고 사태가 급박하였으므로 문헌으로는 증명할 수 없고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단지 보첩(譜牒)뿐이다. 

 

금관(金管)으로 쓴 붉은 문설주의 정려문은 희미하게 퇴색하여 드러나지 않는데, 이에 이르러 선비들이 일제히 임금에게 아뢰어서 비로소 소재(小宰 이조 참판)의 추증과 현충(顯忠)의 전례(典禮)를 받으니 구천에서 굳센 혼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후손 종봉(鍾鳳)이 비석을 세우고 묘표를 새기려고 나에게 그 글을 청하며, “선조가 충용(忠勇)을 떨친 일이 묻혀 있다가 다시 드러났으니 아름다운 공업을 기록하고 은혜로운 영광을 드날려 무궁하게 후손들에게 알리는 일을 늦출 수 없습니다.

 

감춰졌던 것을 드러내주고 빠진 것을 보완해주는 것이 태사(太史)의 직책이니, 그대가 그것을 도모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 요청이 오래될수록 더욱 간절하므로 내가 굳이 사양할 수가 없어서 이에 행장을 살펴서 중요한 일을 선택하여 차례를 따져서 기술하였다.

 

[주01] 사전(祀典)에 …… 지내게 : 마땅히 제사할 것을 차례로 제사하고, 비록 사전(祀典)에 기재되지 않은 것이라도 의리상 마땅히 제사 지낸다는 말이다. 《書經 洛誥》

 

[주02] 금관(金管) : 충효(忠孝)를 기록하는 붓을 말한다. 양(梁) 원제(元帝)가 상동왕(湘東王)이었을 때 세 종류의 붓이 있어서 충효가 온전한 사람은 금관(金管)의 붓으로 기록하고 덕행이 맑고 순수한 사람은 은관(銀管)의 붓으로 기록하고 문장이 뛰어난 사람은 반죽관(斑竹管)의 붓으로 기록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太平廣記 卷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