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원(李黿)

야촌(1) 2010. 8. 20. 19:58

■ 24世 이원(李黿)

 

   [생졸년] 미상(1471년 추정) ∼ 1504년(연산군 10). 향년 33세

   [문  과] 성종(成宗) 20년(14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위/합격나이>18歲

   [생원진사시] 성종(成宗) 14년(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1등(一等) 2위/합격나이>9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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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낭옹(浪翁), 호는 재사당(再思堂). 익재 제현(齊賢)의 7세손으로, 현령(縣令-從五品) 공린(公麟)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 이조판서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의 딸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0년(성종 11)에 진사가 되고, 14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正九品)이 되었으며 1495년(연산군 1)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뒤 호조좌랑(戶曹佐郞-正六品)을 거쳐 봉상시(奉常寺-正三品衙門)에 재직하면서 김종직(金宗直)에게 문충(文忠)의 시호(諡號)를 줄 것을 제안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이로인하여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때 곽산(郭山)으로 유배(流配)되었다.

 

그 후 2년 뒤인 1500년(연산 6)에 나주(羅州-오늘날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복암마을)에 양이(量移 : 먼 지방으로 유배했던 사람을 죄를 경감해서 가까운 지방으로 옮기는 것)되었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서울로 불러 10월 24일 참형을 당했다.


그는 문장(文章)에 능하고 특히 행의(行義)로 추앙받았다.

나주의 영강사(榮江祠), 곽산의 월포사(月浦祠)에 제향 되었으며,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어 도승지(都承旨-正三品)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유금강록(遊金剛錄)》·《재사당집》 등이 있다.

 

 


               ↑이원(李黿)선생 유필

                 ↑이원(李黿)선생 유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