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지 이유태에게 보낸 편지[與李承旨惟泰書] - 윤휴(尹鑴)
오늘날 예제(禮制)를 의논하는 일이 마치 강물이 터져 한계가 없는 것과 같은 상황에 이르렀기에 우매한 나도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공(公)과 같은 분이 어찌 이에 대해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대상(大喪)이 난 초에 대궐에 모여 곡하던 날에 외람되게 우암(尤菴)과 동춘(同春) 두 분 대감의 물음을 받고서 ‘운운(云云)’의 대답을 하였고, 이 논의가 다시 일어났을 때 또 유무중(兪武仲)의 물음에 답하였는데, 지식과 언론이 비천하여 감동시키지 못했고 졸렬한 저는 늘 지위에 벗어나는 말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건대, 조정(朝廷)의 예제(例祭)에 있어 실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감히 아는 체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일이 중대한 것으로서 시비(是非)와 우락(憂樂)에 관계되는 것인 경우에는 붕우 친지 사이에 강마(講劘)하고 경계하는 의리에 있어 입다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제공(諸公) 및 집사(執事)에게 우매한 소견을 다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漢) 나라 사람의 말에 “제후는 종통을 빼앗고 천자(天子)가 된 서자(庶子)는 적통(嫡統)을 빼앗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천자와 제후(諸侯)는 나라를 세우고 종통을 바꾸기도 하여 사대부(士大夫)의 예와 같지 않은 것을 말한 것입니다.
정자(程子)는 이에 대해 말하기를, “종통의 법은 천리(天理)인 것으로서 나무의 줄기와 같은 것이지만 또한 곁가지가 뻗어 줄기가 되는 것도 있기 때문에 천자는 나라를 세우고 제후는 종통을 빼앗는다고 한다.”고 하였는데, 해석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제후는 일국(一國)의 주인이 되므로 종자(宗子)가 아니더라도 종통을 자기에게 옮길 수 있다.”고 하였고, 주자(朱子)는 또 이 말을 거듭 해석해 말하기를, “제후는 두 개의 종통이 없고 대부(大夫)는 두 개의 사당이 없는 것이니, 그렇다면 종묘(宗廟)의 예절, 제사의 의리, 상복의 제도가 모두 이에 준하여 예절이 여기에서 나오고 의리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이것은 그야말로 고금(古今)을 통하여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의 일정한 법칙이고 윤리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의논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효종 대왕(孝宗大王)은 바로 둘째 적자(嫡子)이므로 서자(庶子)에 비례하여 대왕대비(大王大妃)의 복제(服制)를 기년복(朞年服)으로 낮추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과연 이 뜻에 맞는지의 여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번에 허목(許穆)이《의례》주소(註疏)의 “적통을 장자로 세우는데, 둘째 장자도 또한 장자라 한다.”는 말을 거론한 것도 그 뜻이 분명치 않은 것이 아니고, “적처(嫡妻)의 소생으로서 종통을 계승한 사람을 정(正)이 아니라고 하여 서얼(庶孼)과 같이 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그 말이 실로 윤척(倫脊)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허목(許穆)의 이 말도 또한 사서인(士庶人) 집의 예를 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자와 제후가 이미 종묘 사직의 중대한 것을 받고 부(父)와 조(祖)의 대를 계승하여 지존(至尊)의 지위에 올라 천하와 국가를 소유한 사람은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고 서민의 예(禮)와 아주 다른 것으로서 적통이 그에게 있고 종통이 바뀌어져 그에게 옮겨져 적(嫡)과 서(庶)를 따질 것도 없는 것인데 더구나 장자와 차자를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태왕(太王)의 종통이 왕계(王季)에게 옮겨져 태백(泰伯)에게 돌아갈 수 없고, 한(漢) 나라의 종통이 무릉(茂陵)에게 옮겨져 임강왕(臨江王)에게 돌아갈 수 없는 것으로서 종통이 있는 데에는 지존의 복을 입어야 하고 지존(至尊)의 복을 입는 데에 종통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자(長子)와 서자(庶子)의 설(說)을 고집하여 대통(大統)의 중대함을 모르고, 서민(庶民)의 예(禮)를 가지고 왕조(王朝)의 전례(典禮)를 논하는 데에 있어 나는 그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천자(天子)는 천하의 종주(宗主)이고 제후(諸侯)는 일국의 종주(宗主)로서 매우 높고도 존귀하여 친족들이 그를 친척으로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서자라 하여 복제를 낮추어야 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종통을 둘로 하고 존귀함을 낮추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천자는 적통을 빼앗고 제후는 종통을 옮기는 뜻이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전대(前代)에 이미 행한 고증할 수 있는 일로서 지존의 복을 입고 계체(繼體)의 복을 입는 경우가 있으니, 이 의리는 분명하여 의심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애당초 예제를 정할 때에는 다급한 상황에서 잘못한 것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대중의 논의가 비등하여 사람들이 개정할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제공(諸公)들이 놀라 뉘우치고 돌이켜 깨닫고서 선한 말을 듣기를 좋아하여 장점을 따르고 미련없이 지난날의 주장을 버려 사람들과 선을 같이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공척하게 하여 사방의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보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개인의 견해를 주장하여 대례(大禮)를 그르치고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따위는 나는 제공들이 그러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암(尤庵 : 宋時烈)과 동춘(同春 : 宋浚吉)두 공(公)은 외지(外地)에 있어 스스로 논열(論列)할 수 없으나, 다행하게도 영공(令公 : 영감)이 도성(都城)에 계시니, 의당 제때에 일을 아뢰어 극론하고 여러 사람의 말을 참작 채택하여 국가의 대례가 올바르게 되게 하고 인심이 복종하게 해야 합니다.
영공(令公)의 훌륭한 공덕을 우암(尤庵)과 동춘(同春)두 분이 실제로 받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어찌 매우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데도 바로잡지 않는다면 참으로 대경(大經) 및 고례(古禮)에 반대되고 천하의 대의(大義)에 위배되며 성상께서 하문하신 뜻을 저버리게 될 뿐이니, 바로잡을 책임이 영공에게 있는 것입니다.
한이 없는 걱정은 다만 오늘날 명분과 의리가 바르지 못하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니, 성인(聖人)이 예(禮)를 제정하고 오복(五服)의 의수(儀數)를 마련하는 데 있어 재최(齊衰)ㆍ참최(斬衰)ㆍ대공(大功 : 9개월 입는 복제)ㆍ소공(小功 : 5개월 입는 복제)ㆍ시마(緦麻 : 3개월 입는 복제)의 연월(年月)에 신중을 기한 것은 천질(天秩)을 바로하고 천서(天敍)를 밝히려는 것이었는데 명분을 혼란시키고 예제를 잘못되게 하여 윤리의 순서가 없게 한다면 어떻게 후세에 할 말이 있겠습니까.
나는 평소에 여러 공들의 알아줌을 받은 것이 매우 많은데다, 또한 친구(親舊) 사이인데 오늘날에 소회를 지니고 있으면서 말하지 아니하여 평소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위에 벗어나고 분수를 범하는 것이 부끄럽고 두려워 주저하였고 말을 하지 않으려다가 하게 되었는데 어쩌면 나의 걱정하고 사랑하는 진심을 영공께서 이해하리라 여겨집니다.
함부로 논하기를 이처럼 하였기에 매우 죄송스럽습니다.- 이 편지에 회답을 보내주시고 사람들에게 보이지 마소서. 그러나 우암과 동춘 두 분과 유무중에게 보내시어 서신 왕래가 있게 하는 것은 또한 바라는 것입니다.
○ 이상에 인용한 주자의 말은 본의(本義)가 아닌 것으로서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다. -
요즈음에 기고봉(奇高峯)이 공의대비(恭懿大妃)의 복제를 논할 때 “천자와 제후는 정체(正體)가 아니더라도 이미 지존의 지위에 올라 대통(大統)을 계승했을 경우 부모가 그를 위해 또한 참최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
라고 한 것을 기억해 냈는데, 이 말이 매우 명백할 뿐만 아니라 퇴계(退溪)가 어떤 사람에게 보낸 답서에 “명언(明彦)의 이 말을 받고서 부끄러워 땀이 3일 동안 등에 젖었다.”고 하였으니, 옛 사람의 학문이 분명하고 마음이 공정한 것이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애당초 이 말을 가지고 우암과 동춘 두 분의 물음에 답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논란이 분분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주자가 이른바 “학문을 강론하지 아니하여 그 폐해가 이러한 데에 이르렀다.”고 한 것이 바로 이 경우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말하고 우암과 동춘 두 분이 있을 때 주선하지 못했으니 또한 일이 지난 뒤에 말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 경자년 3월 -
답서(答書)에 이르기를 “보낸 편지를 받아 보았다.
유태(惟泰)는 시장(諡狀)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받아야 할 숙손통(叔孫通)인데 오늘날까지 목숨을 보전한 것은 모두가 성상의 은총이다.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는 단지 돌아갈 길을 찾아야 할 뿐인데 어떻게 다시 여러 군자(君子)들과 함께 옳다 그르다 논의할 수 있겠는가. 이만 줄인다.”라고 하였다.
출전 : 백호전서 제26권 >잡저(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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