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귤산 이유원 묘(橘山 李裕元 墓)

야촌(1) 2010. 8. 15. 02:28

↑35世 귤산 이유원 묘(橘山 李裕元 墓)/원거리 모습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송천리 산96-4번지

  정경부인(貞敬夫人)동래 정씨와 합장묘이다. 

 

 

 

↑위의 산소가 귤산 공의 조부(祖父)인 32世 효정공(孝貞公) 이석규(李錫奎 : 이조판서) 묘이고

  아래의 묘가 영의정 귤산 유원 선생 묘이다.

 

이유원(李裕元)은 조선 말기 때인 1814(순조 14)∼1888(고종 25)의 문신으로 자는 경춘(京春), 호(號)는 귤산(橘山) 또는 묵농(默農)이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9세손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 계조(啓朝)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규장각대교를 거쳐 1845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의주부윤·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고종 초에 좌의정에까지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반목하여 1865년(고종 2)에 수원유수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해 말 다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어 『대전회통』 편찬의 총재관이 되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곧 영의정이 되었고, 영중추부사로 서임되었다. 흥선대원군과 반목, 대립하였고, 세자책봉문제의 이면에서 일본과 결탁, 청나라 정부에 작용하였으며, 1875년 주청사(奏請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李鴻章)을 방문, 회견하고 세자책봉을 공작하였다.

 

1879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으로부터 영국·프랑스·독일·미국과 통상수호하여 일본을 견제, 러시아를 방지하라는 요지의 서한을 받았다. 1880년 치사하여 봉조하가 되었으나 1881년 그의 개화를 반대하는 유생 신섭(申㰔)의 강력한 상소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저서로는 《임하필기(林下筆記)》 ∘ 《가오고략(嘉梧藁略)》 ∘ 《귤산문고》 ∘ 《경주이씨 금석록(慶州李氏金石錄)》등이 있으며,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묘역은 수동면 송천리 산90-2번지에 정경부인(貞敬夫人)동래 정씨와 합장묘로 되어 있다. 

 

원형봉분 앞에는 작은 대리석으로 만든 묘표(68×20×48)가 있는데, 일반적인 묘표와는 크게 차이가 있다. 그 앞에는 상석(113×78×39), 장대석이 놓여져 있으며 직사각 향로석(35)이 있다. 향로석 앞 좌우에는 민무늬 팔각형으로 된 망주석(176)이 있으며, 그 앞 가운데 장명등(156)이 있다. 

 

장명등은 하대에 난초문양, 중대에 안상문, 상대에는 화문을 조각한 화려한 모습이다. 수장비(壽藏碑)는 봉분 우측에 있으며, 성격상 묘갈의 형태이다. 비는 민무늬 장방형 대석(76×63×50)과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40×26.5×110), 평옥개석(77×64×28)으로 되어 있다. 

 

비는 4면에 글씨가 세겨져 있고,, 전면에는 “朝鮮翰林春秋館文院待制南床典經起居注鳳閣舍人藝文館直學士奎章閣直閣士同國子事都御史籌司槐院提擧 賜級八座李橘山裕元壽藏之表 配東萊鄭夫人”이라 하였다.

 

이 비는 직접 지은 것으로 세워진 연대는 숭정기원후 262년(1889년) 가을이다. 이석규(李錫奎) 묘비 바로 옆에 신도비의 성격을 가진 수장비(壽藏碑)가 또 하나 있다. 비는 민무늬 대석(110×79×58),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65×35×156),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으로 되어 있다.

 

비의 전면 상단에는 “朝鮮李橘山尙書壽藏碑記”라 하였고, 윤정현(尹定鉉)이 지었고, 후기는 김흥근(金興根), 김병학(金炳學), 남병철(南秉哲), 조두순(趙斗淳), 김좌근(金左根) 등 8명이 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