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시발(李時發)

야촌(1) 2010. 7. 25. 22:15

■ 28世 이시발(李時發)

 

   [세계] 익재공후 생원공파
   [시대] 1569년(선조 2)∼1626년(인조 4).

   [문과] 선조(宣祖) 22년(1589)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8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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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양구(養久), 호는 벽오(碧梧) 또는 후영어은(後潁漁隱)이다. 아버지는 진사 대건(大建)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부사(府使) 김직수(金直燾)의 딸이다. 이덕윤(李德胤)의 문인이다.

6세 때인 갑술(甲戌) 1574년 3월 20일 아버지를 여의다.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89년(선조 22)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93년(선조 26) 낙상지(駱尙志)가 인솔하는 명나라 군대가 경주에 주둔하여 있을 때 접반관(接伴官)으로 임명되었고, 도체찰사(都體察使)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다. 그뒤 전적(典籍)· 정언(正言)· 사서(司書)를 역임하였다.

1594년(선조 27)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재직중 명나라유격장(遊擊將)진운홍(陳雲鴻)을 따라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영을 방문하여 정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듬해인 1595년(선조 28)에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승진하여 순무어사(巡撫御史)를 겸임하였다.

1596년(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 지금의 부여)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토벌하는 데 전공을 세워 난이 평정된 뒤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겨울 찬획사(贊劃使)로 임명되어 충주의 덕주산성(德周山城)을 쌓고, 또 조령에 방책(防栅)을 설치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분조(分朝)의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어 명나라 원병의 군량미보급을 관장하였다. 1601년(선조 34)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임명되어 4년간 선정을 베풀었으며, 1604년(선조 37)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내고, 이듬해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어 포루(砲樓)와 성곽을 수축하고 그해 가을에 예조와 병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였다가 양사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으며, 1619년(광해군 11) 광해군의 특명으로 오도참획사로 임명되어 다음해 평안도에 가서 민폐를 크게 고치고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을 충족하게 하였다.

이때 연산군의 인척인 옥강만호(玉江萬戶)변일(邊溢)이 청병(淸兵)의 침입을 막지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함으로써 사형에 처한 사건이 있었는데,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그 책임을 그에게 묻자 신병을 칭탁하고 사직하였다.

1623년 4월 인조반정 이후 소환되어 변방의 일을 의논하고, 7월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등용되었고, 이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체찰부사(體察副使)로 난의 수습에 공을 세웠다.

그뒤 삼남도검찰사(三南道檢察使)가 되어 남한산성의 역사(役事)를 감독하였다.

저서로 《주변록(籌邊錄)》·《벽오유고((碧梧遺稿)》.《기유일록(己酉日錄)》이 있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海東名臣錄. ◇朝鮮金石總覽

 

 

↑이시발 선생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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