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행장. 시장.

제정공 이달충 행장(霽亭公 李達衷 行狀)

야촌(1) 2010. 7. 22. 23:49

찬인 : 권상일(權相一) 소개

          外十三代孫嘉善大夫前行司諫院大司諫安東權相一。謹狀。

◇(1679년(숙종 5)~1759뇬(영조 35) 상주 근암리 출생.

◇울산최초 울산읍지≪학성지≫편찬.

◇어머니가 경주이씨 부사(府使) 달의(達義)의 딸이다.

◇저서로 《초학지남(初學指南). 《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소 대비고(昭代備考)》.

   《가범(家範)》.  《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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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 이달충 행장(霽亭李達衷行狀)

 

권상일(權相一) 찬(撰)

 

나의 외선조 고려문정공(文靖公) 제정(霽亭) 선생 휘(諱) 달충(達衷)은 초명이 달중(達中)이었는데 현릉(玄陵)의 명에 따라 ‘중(中)’을 ‘충(衷)’으로 고쳤다. 자(字)는 중권(仲權)이고 성은 이씨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공의 선조로 휘 알평(謁平)은 양산촌(楊山村)의 촌장으로서 신라시조를 보좌하여 개국종신(開國宗臣)이 되었으며 관직은 아찬(阿飡)에 이르렀다. 그 후에 이찬(伊飡) 거명(居明)과 병부령(兵部令) 금현(金現)이 있었다.

 

고려초에 이르러 금서(金書)는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호부낭중이 되었는데, 배(配)는 태조(太祖 왕건)의 장녀의 남편인 경순왕(敬順王)의 딸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이었다. 그의 아들 윤홍(潤弘)은 대제학을 지냈으며 대대로 벼슬아치가 있었다.

 

고조 휘 득견(得堅)은 문림랑(文林郞)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을 지냈다.

증조 휘 핵(翮)은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냈으며 아들 셋이 있었는데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조부 휘 세기(世基)는 충렬왕 때 성균시(成均試)에 갑과로 급제하여 왕으로부터 ‘나의 문생[吾門生]’이라는 칭찬을 받았고, 관직은 밀직부사(密直副使)ㆍ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고(考) 휘 천(蒨)은 호가 국당(菊堂)으로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참리(僉議參理)에 올랐고,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비(妣)는 연창군부인(延昌郡夫人) 박씨(朴氏)였다.

 

공은 충선왕(忠宣王) 1년 기유년(1309)에 태어나 충숙왕(忠肅王 13년) 병인년(1326)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당시 18세였다. 사한(史翰)을 거쳐 정언(正言)에 올랐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성균좨주(成均祭酒)에 이르렀다.

 

충목왕(忠穆王) 4년(1348) 이학도감판사(吏學都監判事)로 자리를 옮겨 장항(張沆)ㆍ전윤장(全允臧) 등 여럿과 국정에 동참하였으니 모두 당시에 가장 훌륭한 선발이었다.

 

공민왕(恭愍王) 1년 임진년(1352)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임명되었고, 2년(1353)에는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가 호부 상서(戶部尙書)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팔관회(八關會) 유사(有司)가 복야청(僕射廳) 남쪽에 손을 씻는 장막을 설치하고 울타리를 세워 안팎을 갈라놓았다.

 

공은 형부상서(刑部尙書) 이정(李挺)과 함께 복야청 위에 앉아 있다가 울타리를 철거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왕이 의봉루(儀鳳樓)에 행차하여 이를 보고는 노하여 공을 잡아 옥에 가두라는 명을 내렸다.

좌우 측근들이 정성을 다해 만류하여 마침내 처벌이 중지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유(名儒)로서 발탁되어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임명되었다.

7년(1358) 여름 호부상서로서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나갔다가 돌아오려 할 때, 우리환조(桓祖)께서 삭방도만호(朔方道萬戶)로서 함주(咸州: 함흥)의 학선정(鶴仙亭)에서 전별연을 베풀었다.

 

태조대왕이 그 왼편에 모시고 서 있었는데 당시 17세였다. 공은 한 번 보고는 태조의 신이한 모습을 알아보았다. 마침 일곱 마리의 노루가 언덕 위를 지나고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한 마리를 잡을 수 있겠소?” 하자, 태조가 활을 당겨 한 발을 쏘아 노루 다섯 마리를 잡았다.

 

술잔을 올리는 때가 되어 환조가 잔에 술을 부어 돌리자 공은 선 채로 마셨는데, 태조가 잔에 술을 부어 돌리자 공은 꿇어앉아 마셨다. 환조가 이상하게 여겨 묻기를, “친구의 자식 놈에게 어찌 이렇게 대한단 말이오?”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참으로 신이한 사람이외다. 공이 미칠 바가 아니오. 공의 집안은 이 아들로 인해 반드시 위대하게 될 것이오.” 하며, 자손들을 그에게 부탁하였다.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여 왕위에 올라 공의 자손들의 이름에 모두 ‘입(立)’ 자를 쓰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공이 당시 선 채 술을 마셨던 일을 기린 것이다. 14년(1365) 왕이 승려 편조(遍照)를 사부로 삼았는데 이가 곧 신돈(辛旽)이다.

 

신돈은 겉으로는 청빈하고 담박한 행동을 하여 임금과 세상을 속였지만, 실제로는 주색(酒色)을 탐하였다.

기세가 등등하여 기분에 따라 사람들의 화복을 좌지우지하니 온 조정이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였다.

 

그런데 한번은 공이 여러 사람이 모인자리에서 신돈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하는 말이 상공께서는 주색을 좋아하신다더군요.” 하자, 신돈이 좋아하지 않았다. 이듬해 겨울 공은 유숙(柳淑)ㆍ이귀수(李龜壽) 등 여러 사람과 함께 파직되었는데, 신돈이 중상(中傷) 하였기 때문이었다.

 

신돈이 형벌을 받아 죽게 되자, 또 시(詩)를 지어 신돈을 늙은 여우에 비유하였다.

사관은 공을 ‘강직하여 흔들림이 없는 사람[강직불뇨(剛直不撓)]’이라 칭하였는데, 이 일 하나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나중에 계림부윤에 임명되었는데, 공은 경주가 관향이라 여러 차례 사직상소를 올렸다.

왕이 허락하지 않아 마침내 부임하였다. 부임한 후 사직을 청하는 전문(箋文)을 다시 올렸는데 이르기를,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신(臣) 같은 자는 전하께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채 산중에 들어가 산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보잘 것 없는 마음은 한시도 왕실을 잊은 적이 없으니, 밝은 창가 책상에 조용히 앉아 삼가 한 가락 향을 피우고 보록(寶籙)과 요도(瑤圖)가 만년토록 이어지기를 늘 축수를 하였습니다.” 하였다.

 

충국애민(忠國愛民)하는 공의 마음은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남에 따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당숙부인 익재(益齋 : 李齊賢)선생은 국사(國史)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음을 병폐로 여기고, 공 및 백문보(白文寶) 공과 함께 본기(本紀)ㆍ연표(年表)ㆍ열전(列傳)을 작성하였다.

 

익재 공은 태조(太祖)부터 시작하여 숙종(肅宗)까지, 공과 백문보 공은 예종(睿宗) 이하를 찬술하여 마침내 전서를 이루게 되었다. 우왕(禑王) 11년 갑자년(1385) 8월 18일에 졸하니 향년 76세였다.

 

단성보리익찬(端誠輔理翊贊) 삼중대광(三重大匡)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후에 문정공(文靖公)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아, 공은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도량을 갖추고 조정에 나아가 공무를 본 것이 거의 60년이나 된다.

훌륭한 말씀과 선한 행실, 위대한 공적은 후대에 길이 전해 질만한 것이 많다.

그런데 《여사(麗史)》 명신열전(名臣列傳)에는 대강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또 공은 문장이 청신(淸新)하고 심오하여 익재 어른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여러 차례 병화를 겪으면서 문집의 간판(刊板)과 인본(印本)이 모두 유실되었으며, 자손들 집에는 단지 등본(謄本) 약간 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초배(初配)는 정화택주(靖和宅主) 횡성 조씨(橫城趙氏)로 정당문학(政堂文學) 조문근(趙文瑾)의 따님이고, 재취(再娶)는 충주 안씨(忠州安氏)로 충렬공(忠烈公) 안우(安祐)의 따님이며, 삼취(三娶)는 평양 조씨(平壤趙氏)로 상서(尙書) 조천우(趙千祐)의 따님이다.

 

4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준(竴)은 밀직(密直),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냈고, 둘째 전(竱)은 동지밀직(同知密直)을 지냈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으며, 셋째 수(䇕)는 공조판서를 지냈고, 막내는 횡(竑)이다.

 

장녀는 내시윤(內侍尹) 윤발(尹發)에게, 둘째는 판사(判事) 방순(方恂)에게, 셋째는 김명리(金明理)에게, 넷째는 윤승렬(尹承烈)에게 출가하였다. 준(竴)의 아들 윤상(允商)은 부사를 지냈으며, 윤상의 장남 겸선(兼善)은 지평을 지냈고, 차남 계선(繼善)은 홍문저작(弘文著作)을 지냈다.

 

겸선의 장남 성(筬)은 함안 군수(咸安郡守)를 지냈고 차남 간(竿)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계선의 장남 절(節)은 직장(直長)을 지냈다. 성의 장남 승숙(承叔)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군위(軍威)ㆍ강서(江西)의 현감을 지냈다. 승숙의 아들 중성(仲成)은 참봉을 지냈다. 중성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장남 보(葆)는 봉사(奉事)를 지냈다.

 

전(竱)의 아들 승상(升商)은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고 승상의 아들 재(栽)는 판서를 지냈다.

수(䇕)에게는 아들 넷이 있었는데 구상(具商), 영상(寧商), 안상(安商), 흥상(興商)으로 모두 높은 벼슬에 이르렀다. 그중에 흥상은 정난 공신(靖難功臣)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으며 양희공(襄僖公)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흥상은 아들 넷이 있었는데 우(竬), 의(?), 증(竲), 휴(로 모두 음사(蔭仕)로 관직에 나아갔으며, 의는 관직이 장사랑(將仕郞)에 이르렀다. 의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 아들 숙정(肅靖)은 중훈대부(中訓大夫) 남부령(南部令)을 지냈다. 숙정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장남 욱(昱)은 대호군(大護軍)을 지냈고, 차남 기(奇)는 현감을 지냈다.

 

대호군 욱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양동(良童), 선동(善童), 영동(英童)으로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선동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해(?), 저(竚), 준(竣)이며, 해는 관직이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해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중립(中立)은 진사시에 장원하였으며, 성립(成立)ㆍ개립(介立)은 진사시에 급제하고 학행이 있었다. 개립은 효성스러움과 청렴함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산음 현감(山陰縣監)에 이르렀으며, 호가 성오당(省吾堂)이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중립의 아들은 덕음(德音)이고 덕음의 아들은 동언(東彦)ㆍ진언(震彦)이다. 동언의 아들은 천의(天意)ㆍ인의(仁意)ㆍ시의(時意)이며, 진언의 아들은 재의(在意)ㆍ춘의(春意)ㆍ형의(亨意)이다. 성립의 아들 호음(好音)은 생원이 되었고 호음의 아들은 정언(廷彦)ㆍ홍언(弘彦)이며, 정언의 아들은 대의(大意)이다.

 

개립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장남 휘음(徽音)은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學諭)를 지냈으나 일찍 졸했고, 차남 희음(希音)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문장과 덕행이 있었다. 휘음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장남 숭언(崇彦)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고 차남 상언(尙彦)은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

 

희음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장남은 승언(承彦)이고 둘째는 종언(從彦)이며 셋째는 계언(繼彦)이다.

숭언에게는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장남 달의(達意)는 문과에 급제하고 양사(兩司)를 거쳐 세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고 관직은 첨추(僉樞)에 이르렀다.

 

둘째 원의(遠意)는 부호군(副護軍)을 지냈고 수의(遂意)와 술의(述意)는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다섯째 적의(適意)는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을 지냈다. 상언에게는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행의(行意)ㆍ창의(昌意)ㆍ각의(覺意)ㆍ발의(發意)ㆍ낙의(樂意)이며, 승언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태의(泰意)ㆍ도의(道意)ㆍ호의(好意)로 생원이었다.

 

종언에게는 성의(誠意)라는 아들 하나가 있었다. 준(竣)의 아들은 경립(景立)이고 경립의 아들은 정음(正音)이고, 정음의 사자(嗣子)는 계언(繼彦)이며, 계언의 아들은 석의(碩意)인데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이 좌랑에 이르렀다.

 

그 외 내외 자손들은 세대가 멀고 수가 많아서 대과ㆍ소과에 등과한 자만을 기록할 뿐이다.

달의의 아들 태익(台翊)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창의의 아들 화익(華翊)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현릉 참봉(顯陵參奉)을 지냈다.

 

명익(命翊)의 사자(嗣子)는 항배(恒培)인데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홍익(弘翊)의 아들 중배(重培)는 문과에 급제하고 정랑을 지냈으며, 수익(壽翊)의 아들 원배(元培)는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희음의 외손 권이급(權以汲)은 생원이었다. 숭언의 외손 이두정(李斗精)은 생원이었고, 장오상(張五相)과 장세상(張世相)은 생원이었으며, 남도익(南圖翼)은 전적(典籍)을 지냈고 남도훤(南圖翧)은 진사였다.

 

상언의 외손으로 권희열(權希說)은 좌랑을 지냈고 권희설(權希卨)은 찰방을 지냈으며 김시엽(金始燁)은 진사였고 김시빈(金始鑌)은 장령을 지냈다. 종언의 외손 황수억(黃壽嶷)은 좌랑을 지냈다.

 

계언의 외손 김휘벽(金輝璧)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지냈다.

달의의 외손 권상일(權相一)은 행 대간(行大諫)을 지냈다.

 

후손들이 경향각지에 흩어져 사는데, 그 일파 중 경성에 사는 판관(判官) 건(建)의 6세손 광신(光新)이 가문대대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덕을 이어받아 지키고 선조를 위하는 일에 독실하였다.

 

또 다른 일파는 연산(連山)에 있었는데 지금은 후손이 없다.

또 다른 일파는 영천(榮川 경북 영주)에 사는데 매우 번성하고 현달하였다. 다른 일파는 안동(安東)에 산다.

 

공의 묘는 광주(廣州) 제릉(齊陵)의 북쪽 탄동(炭洞)에 있다.

당시의 이름난 명사들이 필시 공의 묘비명을 지어 행적을 기록해 두었을 것인데 모두 남아 있지 않다.

12대손 광익(光翊)이 공의사적이 끝내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정성을 다해 사가(史家)의 여러 책에서 수집하여 가장(家狀) 한통을 완성하고는 상탁(相托)에게 가져와 맡겼다.

 

나 상일(相一)은 외손으로 끼어 있으니 감히 늙고 병든 데다 글재주도 보잘것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위와 같이 기술하여 후인들이 조사하여 진실을 밝히는 것에 대비할 따름이다.

 

숭정(崇禎) 갑신(甲申) 후 두 번째 계유년(1753, 영조29) 섣달 갑진일에 외(外) 13대손 가선대부(嘉善大夫) 전(前) 행 사간원 대사간(行司諫院大司諫) 안동(安東) 권상일(權相一)이 삼가 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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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주-01] 현릉(玄陵) : 고려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능호이다.


[주-02] 알평(謁平) : 이알평(李謁平)으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신라 초기 사로 육촌(斯盧六村) 중의 하나인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이다. 기원전 69년 사로 육촌 촌장들과 함께 나정(蘿井) 가에서 혁거세(赫居世)를 얻었으며, 기원전 57년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였다.

 

[주-03] 아찬(阿飡) : 신라 17관계(官階) 중 여섯째 등위로 육두품(六頭品) 신분층이 오를 수 있는 한계 관계이다.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한다.

 

[주-04] 이찬(伊飡) 거명(居明) : 이찬은 신라 17관계 중 둘째 등위로, 이척찬(伊尺飡)이라고도 한다.

거명은 이거명(李居明)으로, 신라 때의 진골 출신이다. 시조 이알평의 36세손이며 경주 이씨의 실질적인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중시조이다. 시호는 소판(蘇判)이다.

 

[주-05] 병부 영(兵部令) : 신라의 중앙 행정 관청 13부 가운데 하나인 병부의 장관을 말한다. 병부는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부서이다.

 

[주-06] 경순왕(敬順王) : 신라 제56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927~935년까지 재위하였다.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이다. 아버지는 이찬(伊飡) 김효종(金孝宗)이며, 어머니는 헌강왕(憲康王)의 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927년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명운이 고려로 기울자 군신(群臣)

회의를 소집하여 고려에 귀의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

를 아내로 맞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주-07]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 : 아버지는 경주 김씨로 신라 경순왕이며, 어머니는 고려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이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했다.

 

[주-08] 천(蒨) : 이천(李蒨, 1274~1349)으로,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자는 군실(君實), 호는 국당(菊堂)이다. 문희공(文僖公) 이세기(李世基)의 아들로 1299년(충렬왕25) 국자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충숙왕 때 우사보(右思補)를 지냈다.

 

1344년(충혜왕 복위5) 지공거를 지냈으며 이해 첨의평리상의(僉議評理商議)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45년(충목왕

1) 첨의참리(僉議參理)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 검교정승이 되었으며 월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주-09] 이학도감 판사(吏學都監判事) : 대본에는 ‘吏部都監判事’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 권37 〈충목왕세가(忠穆王世家)〉 4년 3월 정유일(丁酉日) 기사에 의거하여 ‘部’를 ‘學’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10] 장항(張沆) : ?~1353.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눌재(訥齋)이다. 과거에 급제한 뒤 사헌 규정(司憲糾正),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1327년(충숙왕14) 충숙왕이 참소를 입어 원나라에 5년 동안 억류되어 있을 때 시종한 공로로 이등 공신에 올랐으며, 이어 나주 목사를 거쳐 군부 판서(軍簿判書)가 되었다.

 

충혜왕 때에 밀직 제학, 첨의참리, 평양 윤(平壤尹)을 지냈고,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참리(參理)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시호는 문현(文顯)이다.

 

[주-11] 전윤장(全允臧) : 대본에는 ‘金允誠’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 권37 〈충목왕세가〉 4년 3월 정유일 기사에 의거하여 ‘金’을 ‘全’으로, ‘誠’을 ‘臧’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12] 팔관회(八關會) : 고려 시대에 국가 차원에서 거행된 불교 행사로 매년 행해졌다. 팔관회 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은 사방에 향등을 달고 2개의 채붕(綵棚)을 세워 장엄하게 장식하는 등 불교와 민속적 요소가 합치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유학자들, 특히 고려 말 성리학을 수용한 사대부들은 조정에서 팔관회를 거행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주-13] 복야청(僕射廳) : 고려 때의 관직인 좌복야(左僕射)ㆍ우복야(右僕射)가 정사와 관련하여 회동하던 관청을 말한다. 복야는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소속된 벼슬로 문종 때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이들의 품계는 정2품으로, 장관인 상서령의 다음 직위였다.

 

[주-14] 이정(李挺) : 1297~1361.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춘길(春吉)이다. 1325년(충숙왕12) 문음(門蔭)으로 팔관보 판관(八關寶判官)에 보임되었으며, 감찰, 장령, 전법 총랑(典法摠郞) 등을 역임하였다. 10년간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1353년(공민왕2) 중정대부(中正大夫)에 개자(改資)되어 성균 좨주에 발탁되고, 이어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보문 대제학(寶文大提學) 등을 지냈다.

 

공민왕의 각별한 총애를 입어 내불당(內佛堂)을 감역하였다. 1358년 광록대부(光祿大夫)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주-15] 의봉루(儀鳳樓) : 고려 시대 개성의 궁궐 안에 있던 건물인데, 공민왕은 팔관회 때에 이곳에서 행사를 관람하였다.

 

[주-16] 얼마 …… 임명되었다 : 《고려사》 권112 〈이달충열전〉에 의거할 때, 이달충이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발탁된 것은 1366년(공민왕15)의 일이므로, 이 부분은 오류이다.

 

[주-17] 환조(桓祖) : 1315~1361.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로, 본관은 전주(全州), 휘 및 자는 자춘(子春), 시호는 연무성환 대왕(淵武聖桓大王)이고, 묘호는 환조이다. 도조(度祖) 이춘(李椿)의 아들로, 아버지를 이어 함경도 쌍성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며 원나라의 천호(千戶)로 있다가 고려 조정에 내알(來謁)하여 소부윤(少府尹)이라는 벼슬을 받고, 총관부를 함락하여 함주 이북의 땅을 회복하였다.

 

1361년 장작감 판사(將作監判事)로서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방을 다스

리다가 죽었다. 이성계가 조선 개국 후 4대의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할 때 환왕(桓王)에 추증되었으며, 능은 함흥

(咸興)의 정릉(定陵)이다.

 

[주-18] 7년 …… 17세였다 : 조선 태조 이성계의 나이와 《제정집》 권4 이종재(李宗梓)의 발문에 의거할 때 1351년(충정왕3)의 일인 듯하다.

 

[주-19] 유숙(柳淑) : 1316~1368.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순부(純夫)이다. 1340년(충혜왕 복위1)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후에 공민왕이 된 강릉대군(江陵大君)을 시종하여 4년간 원나라에 있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고려에 돌아와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고, 이후 판도 판서(版圖判書), 전리 판서(典理判書) 등을 거쳐 1363년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라 서령군(瑞寧君)에 봉해졌다. 1365년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영광(靈光)에 낙향해 있다가, 신돈이 보낸 자에게 교살되었다.

 

[주-20] 이귀수(李龜壽) : 대본에는 ‘李龜’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 권41 〈공민왕세가(恭愍王世家)〉 14년 7월 기사에 의거하여 ‘壽’ 1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21] 시를 …… 비유하였다 : 《제정집》 권1에 〈신돈(辛旽)〉 시가 실려 있다.

 

[주-22] 사관은 …… 칭하였는데 : 《고려사》 권112 〈이달충열전〉에 “성품이 강직하여 흔들림이 없었으며 사람을 알아 보는 감식안이 있었다.〔性剛直不撓有鑑識〕”라는 기록이 전한다.

 

[주-23] 부임한 …… 올렸는데 : 《제정집》 권2의 〈계림 부윤으로 부임한 후에 다시 사직을 청한 표문〔鷄林赴任後再辭表〕〉을 말한다.

 

[주-24] 전쟁 : 1359년(공민왕8)과 1361년에 있었던 홍건적의 침입을 가리키는 듯하다. 특히 1361년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공민왕은 경상북도 안동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주-25] 보록(寶籙)과 요도(瑤圖) : 국가와 왕실을 가리킨다. 보록은 중국 전설에 봉황이 황제(黃帝)와 제요(帝堯)에게 전해 주었다는 예언서이며, 요도는 왕실의 족보를 말한다.

 

[주-26] 우왕(禑王) …… 졸하니 : 우왕 11년은 을축년으로, 갑자년이라 한 것은 오류이다. 《고려사》 권112 〈이달충열전〉에도 우왕 11년에 졸했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졸년이 우왕 11년 을축년인 것은 확실하다. 《경주이씨구보(慶州李氏舊譜)》에도 갑자년으로 되어 있는데, 권상일은 이 자료를 근거로 행장을 작성하였기 때문에 같은 오

류를 범한 듯하다.

 

[주-27] 여사(麗史) 명신열전(名臣列傳) : 《여사》는 홍여하(洪汝河, 1620~1674)가 지은 《휘찬여사(彙纂麗史)》를 가리킨다. 모두 47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6은 세가(世家), 권7~19는 지(志), 권20~46은 열전(列傳), 권47은 외이부록(外夷附錄)이다. 이 중 권22~37이 명신열전이며, 〈이달충열전(李達衷列傳)〉은 권31에 수록되어 있다.

 

홍여하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 철저한 유교 사관에 입각해 이 책을 쓰는 한편 우리나라 역사의 주체성을 의식하

고 이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휘찬여사》는 사료로서는 새로운 가치를 찾을 수 없으나, 과거 우리나라 학자들이 각

시대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살피는 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주-28] 조문근(趙文瑾) : 생몰년은 미상이다.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 등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때 우부승지(右副承旨),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등을 역임한 조변(趙忭)의 아들이다. 기타 자세한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주-29] 안우(安祐) : ?~1362.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탐진(耽津)이다. 1352년(공민왕1) 군부 판서(軍簿判書)로서 최영(崔瑩) 등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였고, 이후 전리 판서(典理判書),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등을 역임하였다.


1358년 서북면 부원수로서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 냈으며, 1359년 지금의 선천(宣川)인 고선주(古宣州)에서 홍건적

의 잔여를 소탕하고 돌아와 중서 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추충절의정란 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이 되었다.
[주-30] 조천우(趙千祐) :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정숙공(貞肅公) 조인규(趙仁規)의 손자이자, 장민공(莊敏公) 조서(趙瑞)의 아들이다. 《高麗史 卷105 趙仁規列傳》 기타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주-31] 정난 공신(靖難功臣) : 조선 단종 때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려 준 훈호(勳號)이다. 1453년(단종1) 10월 단종의 숙부이자 후에 세조가 된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목으로 자신의 반대 세력인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안평대군(安平大君) 등을 살해하고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어 이 거사에 가담한 사람들을 공신으로 책록할 것을 요청하여 정난 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주-32] 권상일(權相一) : 1679~1759. 본관은 안동,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이다. 1710년(숙종36)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전적ㆍ직강 등을 거쳐 예조 좌랑, 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746년(영조22) 사헌부 헌납, 사간원 사성, 사헌부 집의, 동부승지, 형조 참의 등을 지냈다.

 

이후 대사간, 홍문관 부제학, 한성 좌윤, 지중추부사,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청대집》을 비롯하여 《초학지남(初學指南)》ㆍ《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 등이 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

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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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惟我外先祖高麗文靖公霽亭先生諱達衷。初名達中。玄陵以御筆改中爲衷。字仲權。姓李氏。籍慶州。有諱謁平。以楊山村長。佐新羅始祖。爲開國宗臣。官阿飧。其後有伊飧居明,兵部令金現。至麗初有金書以佐命功。爲戶部郞中。配太祖長女壻敬順王之女神鸞宮夫人。子潤弘。大提學。世有冠冕。高祖諱得堅。文林郞。尙衣院直長。曾祖諱翮。門下評理。有三子。以文章顯。祖諱世基。忠烈朝魁成均。王稱以吾門生。官至密直副使,大提學。諡文僖。考諱蒨。號菊堂。推誠輔理功臣,三重大匡僉議參理。月城府院君。諡文孝。妣延昌郡夫人朴氏。忠宣王元年己酉公生。忠肅王十三年丙寅登第。時年十八。由史翰陞正言。纍官至成均祭酒。忠穆王四年。轉吏部都監判事。與張沆,金允成諸人同視事。皆時之極選也。恭愍王元年壬辰。拜典理判書。二年。以監察御史。遷戶部尙書。八關會有司設盥洗幕于僕射廳南。豎樊以限內外。公與刑部尙書李挺坐廳上。令撤其樊。時上御儀鳳樓見之。怒命繫獄。左右固請之遂止。尋以名儒。擢爲密直提學。七年夏。以戶部尙書。出爲東北面兵馬使。將還。我桓祖以朔方道萬戶。餞于咸州之鶴仙亭。太祖大。王侍立其左而十七歲矣。公一見知其異表。適有七獐過岸上。公曰。可得一乎。太祖彎弓一發。殪五獐。及進酒。桓祖行酒則公立飮。太祖行酒則公跪飮。桓祖怪之曰。故人之子何乃爾。公對曰。誠異人。非公所及。公之家業。此子必大之。因以子孫屬焉。及太祖龍興。命其子孫以立字名之。蓋誌其立飮也。十四年。王以僧遍照爲師傳。是爲辛旽。旽外爲苦淡之行。以惑君欺世。而寶耽酒色。氣勢張大。禍福人。在於喜怒。滿朝不敢忤。而公嘗於稠坐中謂旽曰。人謂相公好酒色。旽不悅。明年冬。公與柳淑李龜諸人貶罷。旽中之也。及旽伏誅。又作詩比旽於老狐。史稱公剛直不撓。觀於此一事。可知也。後拜鷄林尹。公以鄕貫申辭。王不許。遂赴任。又上箋。略曰。兵興以來。如臣者無所贊襄。退處山林有年矣。然區區之心。未嘗不在王室。明窓靜几。敬焚一炷之香。寶籙瑤圖。恒祝萬年之算。公之忠愛。蓋不以進退而有間也。堂叔父益齋先生齊賢病國史不備。與公及白文寶作紀年傳。而益齋起自太祖至肅宗。公及文寶贊睿宗以下。遂爲全書。辛禑十一年甲子八月十八日卒。壽七十六。秩爲端誠輔理翊贊三重大匡政堂文學。鷄林府院君。贈諡文靖公。噫。公以卓異之才。遠大之器。出身立朝。殆近六十年。其嘉言善行。豐功偉績。可以傳於後而垂不朽者多矣。麗史名臣列傳。秖錄梗槩。且文章淸儁。大爲益齋翁所稱賞。而屢經兵火。文集刊板及印本皆遺失。子孫家只有謄本若干篇。初配靖和宅主橫城趙氏。政堂文學文瑾女。再娶忠州安氏。忠烈公祐之女。三娶平壤趙氏。尙書千祐之女。有四男四女。男長竴(준)。密直戶曹典書。次竱(전)。同知密直月城君。次䇕(수)。工曹判書。次竑(횡)。女長適內侍尹尹發。次適判事方恂。次適金明理。次適尹承烈。竴男允商。府使。允商男兼善。持平。次繼善。弘文著作。兼善男筬。咸安郡守。次竿。僉節制。繼善男節。直長。筬男承叔。文科歷軍威江西縣。承叔男仲成。參奉。仲成有二男。長葆。奉事。竱男升商。封鷄林君。男栽。判書。䇕有四男。曰具商,寧商,安商,興商。皆致顯秩。而興商以靖難功封鷄林君。贈諡襄僖公。有四男。曰竬曰曰竲曰。皆蔭仕。而至將仕郞。有一男曰肅。靖中訓六夫南部令。有二男。長昱。大護軍。次奇。縣監。護軍有三男。良童,善童,英童。皆有科名。善童有三男。,竚,竣。而禦侮將軍。有三男。中立。進士壯元。成立,介立。進士有學行。薦孝廉。官至山陰縣監。號省吾堂。贈兵曹參判。中立男德音。德音男東彥,震彥。東彥男天意,仁意,時意。震彥男在意,春意,亨意。成立男好音。生員。好音男廷彥,弘彥。廷彥男大意。介立有二男。長徽音。文科學諭。早卒。次希音。進士。有文行。徽音有二男。長崇彥。文科府使。次尙彥。文科郡守。希音有三男。長承彥。次從彥,繼彥。崇彥有五男。長達意。文科歷兩司典三邑。官至僉樞。次遠意。副護軍。遂意,述意。進士。適意文科持平。尙彥有五男。行意,昌意,覺意,發意,樂意。承彥有三男。泰意,道意,好意生員。從彥有一男誠意。竣男景立。男正音嗣子。繼彥男碩意。文科佐郞。他內外子孫。代遠且數多。只錄其大小登科者。達意男台翊。進士。昌意男華翊。進士。顯陵參奉。命翊嗣男恒培。進士。弘翊男重培。文科正郞。壽翊男元培。生員。希音外孫權以汲。生員。崇彥外孫李斗精。生員。張五相。生員。世相。生員。南圖翼。典籍。圖翧。進士。尙彥外孫權希說。佐郞。希卨。察訪。金始燁。進士。始鑌。掌令。從彥外孫黃壽嶷。佐郞。繼彥外孫金輝璧。進士。參奉。達意外孫權相一。行大諫。姓孫散居京鄕。而一派在京城。判官建之六世孫光新。傳守世德。篤於爲先。一派在連山而今無后。一派在榮川。甚蕃且顯。一派在安東。公之墓在於廣州齊陵北炭洞。當時名公。必銘其墓。狀其行蹟。而皆無有。十二代孫光翊懼其事蹟之終然泯滅。誠心搜聚史家諸書。成家狀一通。委來相托。相一忝在外裔。不敢以老病文拙辭。遂撰次如右。以備後人之考信焉爾。

崇禎甲申後再癸酉臘月甲辰。外十三代孫嘉善大夫前行司諫院大司諫安東權相一。謹狀。

 

[자료문헌]

◇제정집(霽亭集) >卷之四 > 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