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행장. 시장.

용재 이종준선생 행장(慵齋 李宗準先生 行狀).

야촌(1) 2010. 7. 4. 00:01

◇경주이씨 월성군파(月城君派)

◇임여재 류규「臨汝齋 柳 (氵+奎) 撰, /1806년(순조 6)」

   서애 유성룡의 6대손임(1730-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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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世 용재 이종준선생 행장(慵齋 李宗準先生 行狀).

 

용재(慵齋) 이선생을 경광서원(鏡光書院)에 봉안하고 나서 몇년 뒤에 선생의 묘앞에 묘갈(墓碣)을 세웠고, 작년 을축년(1805년순조 5)에 선생의 8대손 학경(學慶)이 유적(柚遺)을 가지고 내집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선조의 절개있는 행실은 특별히 문충공(文忠公) 류성용(柳成龍) 선생이 지은 무오당적(戊午黨籍)에 찬술되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행장(行狀)의 원고는 저의 종선조(從先祖) 눌재공(訥齋公=李弘準)의 초고 입니다.

 

당시의 금기(禁忌)에 구애(拘礙)되어 대대로의 덕행(德行)을 상세히 갖추지 못하였고, 또 세대가 멀어저 자획(字畫)이 잠식되니 완전한 글을 이루지 못합니다. 감히 청컨데 추가로 보충하고 필요 없는 것을 지워서 윤색(潤色)하여 선조의 글을 이어 주십시오.

 

선생이 지어 기록한 뜻은 참으로 늙고 병든 내가 감당할 수 없으나, 대대로의 교분이 진실로 그러하여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없어 삼가 본래의 행장(行狀)에 근거하여 대략 아래와 같이 수정 하였다.

 

선생의 성(性)은 이씨(李氏)요. 이름은 종준(宗準)이며, 자(字)는 중균(仲匀)이다. 자호(自號)는 장육당(莊六堂)이고 또는 용재(慵齋)라고 부르니, 신라좌명대신(新羅佐命大臣) 알평(謁平)의 후예이다. 

 

고려말에 이르러 지수(之秀)라는 분이 있으니 삼중대광금자광록대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이가 규(揆)를 낳으니 벼슬은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을 지냈고,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이가 원림(元林)을 낳으니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다.

 

이가 만실(蔓實)을 낳으니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선생의 증조부(曾祖父)가 된다. 조부(祖父) 승직(繩直)은 진사(進士)로 생진시(生進試)에 합격 하였고, 세종조(世宗朝)에 처음으로 벼슬하여 행 양주목사(行楊州牧使)와 경상감사(慶尙監司)를 지냈으며, 대사헌(大司憲)으로 벼슬을 마쳤다. 또한  청백리(淸白吏)로 조정에서 존중(尊重) 받았다.

 

아버지 시민(時敏)은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하여 문장과 절개있는 행실로 한 시대에 중망(衆望)을 지녔다. 상국(相國) 김종서(金宗瑞)의 화(禍/계유정란)에 이끌려 들어가 금고(禁錮)를 당하자 금계촌(金溪村)으로 돌어가 여생을 보내며, 생도를 가르치니 성취한자가 많았다.

 

호(號)를 금호(琴湖)라고 하였다. 향인(鄕人)들이 한창 제향의 예(禮)를 의논하고 있었다. 어머니 영가권씨(永嘉權氏)는 현감(縣監) 권계경(權啓經)의 따님이다.

 

선생은 영가(永嘉=安東)의 금계촌(金溪村)에서 태어났다.1)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여 5세(歲)에 문장을 지었고 7세에 독서하여 대의(大義)를 통하니 생원공이 시(詩)로 다음과 같이 경계 하였다.

<다음 계속>

 

[原文]

 

慵齋李先生。旣奉安于鏡光書院後幾年。豎碣于先生之墓前。昨年乙丑。先生八代孫學慶。柚遺跡踵門而言曰。先祖節行。特蒙文忠公先生撰出戊午黨籍。以行於世。狀本則學慶從先祖訥齋公所草。而拘於時諱。不能詳具世德。且世代綿邈。蠹食字畫。不成完編。敢請追補而刪潤之。以續先先生撰錄之遺意。不佞誠老病不敢當。而但世契則固然。敢不勉焉。謹依本狀。略加檃括如左。先生姓李氏。諱宗準。字仲匀。自號莊六堂。又稱慵齋。新羅佐命大臣謁平之後。至麗季。有曰之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是生揆。官四宰。諡貞烈。是生元林。入我朝。判司僕寺事。是生蔓實。吏曹判書。於先生爲曾祖也。祖諱繩直。以進士擢生員。筮仕于世宗朝。行楊州牧,慶尙道觀察使。以大司憲終。淸白見重於朝。考諱時敏。俱中生進。以文章節行。負一世重望。延及金相國宗瑞之禍。被禁錮。歸老金溪。敎授生徒。多至成就。號琴湖。鄕人方議尸祀之禮。妣永嘉權氏。縣監啓經之女也。先生生于永嘉之金溪村。幼而岐嶷。五歲。屬文。七歲。讀書通大義。生員公以詩戒之曰。一飯都忘歲月輕。豈知斯世樹風聲。空身雖向窓前坐。逸意應馳野外行。先生雖在妙齡。常莊誦此詩。益勉課業。十年。言于生員公曰。經書皆是聖賢傳授文字。而或出於門人之記。至於易經。則文王,周公,孔子三聖之手書。此眞聖人書。學者最當尊重者也。生員公聞而大奇之。手植一株銀杏於大廳之前。生員公曰。此夫子講學之樹也。他日當與盛德君子。講習於此樹下。對曰。東方亦有聖人乎。生員公曰。行聖人之道。皆可爲聖人徒。況我東箕子遺風。至今流傳。豈可無賢人君子也。十三歲。文章已成。筆法蒼古。欲赴鄕解。生員公以學業未成不許。當游學于京中。生員公慮其才勝。每以書戒之。其第二書略曰。汝之遊學。非豪俠輩可比。謹言行。戒酒色。無慢游。無友放浪人。吾之先世。爲朝家名臣。及余之身。不幸坎軻。余則已矣。積善之久。豈無餘慶。汝兄不學無才。汝弟不好學。吾之所望者汝。汝亦學而不誠。不誠則無實。吾所謂實者。德行之謂也。非才華也。苟無其行。雖有七步之才。何足取焉。佩服此訓。雖微言細行。不敢不謹。癸巳。丁生員公喪。哀毀過禮。服闋後。以慈夫人命。入山讀書。同里裴栶。隨而課讀。志倦神疲則裴掩卷而息。先生終宵不輟。如是數月。精力如初。裴曰。君以血氣之身。勤苦過人。乃能若是耶。先生曰。至樂在此。有何疲倦也。每月朔。歸覲夫人。課誦一月所讀於夫人之前。無一字訛漏。然後夫人供別饌而給之。丁酉。中司馬試。寓居于京城。一日。與南秋江孝溫。乘月而游於杏花坊。權景裕君饒。見其儀容淸秀。邀而虛坐曰。子非塵埃中人。眞所謂仙鶴在人間也。君饒先唱四韻。先生應口而對。故爲出塵埃之態。君饒大驚曰。人言赤壁賦無煙火之氣。子之詩韻。過於蘇賦。仍勸一杯酒。先生欲起去。君饒挽手止之。閉戶張燭。終宵吟詠。朝日視之則乃東門外寓居進士李某也。大笑而罷。自後爲莫逆之交。每與秋江。語及莊陵往事。未嘗不歔唏流涕。丙午。登第。丁未。以正字遷吏郞。是年秋。日本使來聘。上以關坊甚重。且彼國使有文才。命極擇護送使。銓曹以先生應旨。先生奉命至東萊。倭使得先生書畫。拜受曰。始得天下重寶。冬。又受平安評事之命。至祥原郡。題三笑圖。詩在集中。後南秋江過此。大驚曰。此必吾友手段也。戊申。除弘文校理。以徐四佳選。遷湖堂。賜暇讀書。上幸環翠亭。先生應製居首。聲名籍甚。無爭鋒者。時論謂第一淸望。比之登瀛。尋拜正言。是時。愼守勤始登淸顯。先生以外戚得權之漸。力諫其不可。直聲振朝廷。壬子。拜副修撰。陳疏歸覲。癸丑。以檢詳。陞舍人。又以書狀官赴燕。見館驛畫屛不佳。以筆塗抹殆盡。驛官招通事怪詰之。通事曰。書狀能書畫。必以不滿其意而然也。驛官首肯之。回程至其處。張新粧素屛二坐。先生一書一畫。俱盡其妙。觀者歎賞。又以詩律。鳴於皇城。後華使至而傳誦。甲寅。除義城縣令。慈夫人時尙康寧。以居官愛民之意。作五言詩四十韻與之。先生拜受誦之。權睡軒以詩餞之。聲名少小聳南斗。儒雅風流是謫仙。昵幄望隆通籍早。分符命下許城專。鄕閭三物成周化。煙火千家續漢循。俗吏紛紛徒爾耳。應歌來暮頌斯人。下車之初。見校宮之頹廢。擇地而移建。出俸祿以助工役。宏敞規模。招集境內之有儒望者。敎授鄕子弟。誦詩習禮。一如古法。絃誦常聞。時人以聞韶比武城。作竹樓於客館之南。爲公退休息之所。作記揭之。一時文士傳誦。至於訴帖揮灑筆跡。邑人皆珍而藏之。戊午。棄官歸鄕里。是時。柳子光,李克墩輩搆誣淸流。禍在朝夕。先生怡然自樂。不以爲憂。與李忘軒胄。圍棋於杏亭。外人傳言紅衣官人一隊直入洞壑。左右請輟棋。先生徐曰。未聞拏命則猶是閑散。對局如初。俄而金吾郞果至。先生曰。老母在。願與之訣。金吾郞惻然而許之。拜辭慈夫人。夫人引范滂事諭之曰。汝得其死。我何悲爲。汝往。善死善死。無以我爲念。與忘軒同席被拏。及就鞫之日。不變神色。以手畫地。作一字如長杠。無一言。有一奴能解文字。同被鞫。亦畫地無言。及定罪之日。決杖八十流北界。路經高山驛。書孤忠自許衆不與一律于壁上而去。監司以聞。喬桐主以爲有怨意。逮鞫殺之。時朝廷危懼。無敢言者。獨洪虛白貴達上書救解不得。被刑之日。顏色與平日無異。但勵聲曰。首陽邈矣。埋我無地。聞者爲之墮淚。返葬于金溪沙芒洞艮坐原。先生容貌端雅。如淸水芙蓉。志操瀅潔。如氷壺秋月。爲文發越。信筆滔滔。直與漢唐之文。同一體格。詩亦優游不迫。出於性情。有古詩人之風韻。至於書畫,醫藥,卜筮,音律。無不精巧。嘗師事佔畢齋金先生。先生器之曰。自見李某。胸襟灑落。與鄭一蠹,金寒暄兩先生。爲道義交。又與金濯纓,南秋江諸賢友善。秋江最敬重焉。茂豐副正一見而奇之曰。公我東之詩仙也。自幼少時無疾言遽色。雖在倉卒。未嘗失措。其經幄講論。一遵河南夫子。霜臺直言。無愧漢朝長孺。倜儻淸儀。便是海東魯連。惜乎其嘉言美行。雄詞健筆。不傳於世。以史禍故也。中廟朝。昭雪復官。肅廟因儒疏。贈弘文館副提學。夫人永嘉權氏。進士綽之女。不育。以弟公準第三子德淵爲嗣。參奉。德淵生三男二女。長允恭。次允儉。皆參奉。次允讓。進士。權景銓,直長權銘。其壻也。允恭生二男。曰煥。曰燁。允儉生一男。民覺。號三隱。煥生復昌。燁生再昌。民覺生三男。長尙堉。次尙墩,尙堧。尙堧生三男。震英,章英,最英。震英有五子。時華,元華,益華,復華,春華。最英有三子。天華,箕華,盛華。復華系子東楫。謁余修狀者學慶。卽其子也。餘不盡錄。嗚呼。天生英偉特出之才。不能平步亨衢。大展蘊抱。而卒罹讒慝之口。以不免一時屠戮之禍。何哉。幸而天轉地旋。雷雨發解。雪冤贈爵。澤漏天壤。而至於先生父子。則秉彝公議。百世不泯。先生享於鏡院。訥齋享於柰城之柏社。近又道論齊發。擬奉琴湖公於河丹溪彰烈之祠。於是乎天道昭然。人心爲之一快。彼克墩,子光等枯胔腐肉。甘爲地獄千萬年戕害忠賢之窓鬼。人爭欲斲棺臠分。以餧家之畜狗。而且不食之矣。禍變慘於一時。而公議嚴於百年。斯可以少慰百世慈孫之心也夫。學慶行雅飭。篤於先。相對可知爲名家後裔。旣去復來。誠懇動人。烏敢辭。撥開昏耄。收拾精神。略具系德。尾補子孫錄如此。以塞其求。兼以自效於高山景行之思云爾。

 

上之六年丙寅十月 日(1806년(순조 6)。

通政大夫前行敦寧府都正豐山柳(氵+奎)]。謹狀。

 

자료 : 용재유고(慵齋遺稿) > 慵齋先生遺稿 > 附錄

 

↑용재 이종준 선생 유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