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수일(李守一)

야촌(1) 2010. 7. 22. 19:11

■ 24世 이수일(李守一) 

 

   [세계] 국당공파

   [생졸년] 1554년(명종 9)∼1632년(인조 10).

   [무과] 선조(宣祖) 16년(1583) 계미(癸未) 별시(別試) 병과(丙科) 338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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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충주 출신. 아버지는 증영의정난(鸞)이며, 어머니는 참봉 우담령(禹聃齡)의 딸이다. 아들은 우의정(右議政)완(浣)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 훈련원의 벼슬을 거쳐, 1586년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이 되었다가 남병사 신각(申恪)의 막하로 들어갔다. 1590년 선전관이 되고, 다음해 장기현감으로 발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분전하였으나 예천·용궁에서 패전하였으며, 다음해 밀양부사로 승진, 이어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 水軍節度使에 발탁되고 왜적을 격퇴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그 뒤 회령부사에 이어, 1597년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지역의 중요성을 감안한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요청으로 성주목사(星州牧使)가 되었으나 명령을 어겨 장형(杖刑)을 받고 종군되었다.

1599년 북도방어(北道防禦使)사가 되었다가 곧 북도병마절도사(北道兵馬節度使)로 자리를 옮겼다.
1602년 남도병마절도사(南道北道)가 되어 변방을 침범하는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하였으며, 다음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창원에 있는 병영을 진주로 옮기도록 하였다.

1606년 길주목사(吉州牧使)로 방어사를 겸하고, 다음해 수원부사(水原府使)에 이어, 다시 북도병마절도사가 되고, 1611년(광해군 3) 지중추부사로 지훈련포도대장·원유제조(園囿提調)를 겸하였다. 1612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1614년 임기를 마치고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1616년 숭정대부에 올랐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를 겸하여 길마재〔鞍峴〕에서 반란군을 무찔러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2등에 책록되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1628년 형조판서가 되고, 1631년 남한수어사(南漢守禦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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