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수경(李壽卿)

야촌(1) 2010. 7. 22. 18:12

■ 이수경(李壽卿)

 

   [세계] 경주이씨 국당공파

   [생졸년] 1882년(고종 19)∼1955년./壽74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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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고종 19) 12월 19일∼1955년 3월 12일, 거문고의 명인.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치일(致一), 호는 송사(松史). 서울 출신이다. 헌종 때 피리의 명인인 이인식(李寅植)의 장손이고, 역시 고종 때 피리의 명인인 이원근(李源根)의 맏아들이며, 가곡의 명창 두봉(斗峯/號) 이병성(李炳星)의 아버지이다.

 1892년(고종 29) 장악원(掌樂院)에 입사(入仕)하였으며, 1901년 진연(進宴) 때는 방향(方響), 1902년 진연 때는 편경(編磬)을 담당하였다. 1903년 3월에 가전악(假典樂)이 되었고, 1913년 아악수장(雅樂手長)을 거쳐 아악사(雅樂師)에 승진하였다.

 1939년 이왕직 아악부를 사임할 때까지 김영제(金寧濟)·함화진(咸和鎭)· 최순영(崔淳永)과 더불어 아악의 보존과 육성에 공헌이 컸다. 특히, 영산회상(靈山會相: 일명 거문고회상)과 도드리의 연주가 절묘하였다.

 1892년 11세 때 무동(舞童)이었던 관계로 궁중정재(宮中呈才)에도 뛰어나 현재 국립국악원에 전승되는 춤은 모두 그의 지도에 의한 것이고, 종묘대제 때 추는 일무(佾舞)와 악장(樂章)도 대부분 그의 지도에 의한 것이다.

 

[참고문헌]

◇進宴儀軌 ◇國樂槪要(張師勛, 精硏社, 1961)

 

국악우표 : 1974년 2월 20일 발행 우표 액면가 10원/대한민국 체신부

 

거문고 우표는 단 두 가지 색만을 사용했지만 세세한 묘사가 특히 돋보이는 수작이다.

거문고를 뜯는 인물은 점묘 기법으로 부드럽고 자세하게 묘사했으며, 거문고의 모습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가곡의 명창 두봉(斗峯) 이병성(李炳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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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습 궁중악가

 

● 이인식(李寅植)

 

◇활동분야 : 기악가 / 악사(樂師)

◇생몰년 미상. 조선 헌종· 고종 때의 악사(樂師). 자는 성효(聖孝).

◇1847년(헌종 13) 5월 : 가전악(假典樂),

◇1876년(고종 13) 7월 : 전악(典樂)이 되었고,

◇1877년과 1892년의 : 진찬(進饌) 때에는 집사악사(執事樂師)로 활약하였다. 거문고의 명인 이수경(李壽卿)의

    할아버지이고, 가곡(歌曲)의 명인 이병성(李炳星)의 고조부이다. 전공은 피리인데 이수경 외에 이 집안은 한결

    같이 피리가 전공이었다. 세습적인 궁중악인이다.

◇장악원(掌樂院) : 조선 시대에,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전악서를 고친 이름이다.
◇악사(樂師) : 조선시대에, 장악원에 속한 정6품 벼슬. 또는 그 벼슬아치. 악공이나 악생의 우두머리  구실을
하였

    다.

◇이왕직(李王職) : 일정시대(日政時代) 1910년 황실령(皇室令) 제34호 이왕직관제(李王職官制)에 의해 일본

    궁내대신(日本宮內大臣)의 관장 하에 소위 이왕직(李王職)과 공족(公族)의 가무(家務)를 담당하던 기관을

    한다.

◇아악수장(雅樂手長) : 이왕직 아악부에서 위로는 아악사장(雅樂師長) 1명, 아악사(雅樂師) 2명, 아악 수장(雅

    樂手長) 8명이 있고, 그 아래에 아악수(雅樂手)가 10~20여명이 있었다.

 

◇제사과(祭祀課) : 1915년에는 이왕직(李王職)의 직제(職制)가 고쳐져 6과로 사무가 분장(分掌) 되었는데 제

    를 주관하는 부서이다.

 

◇가전악(假典樂) : 조선 시대에, 전악원에 속한 임시 벼슬로 전악(典樂)과 같은 일을 하였다.(권전악 · 권착전악).

 

◇전악(典樂) : 궁중의 고아(高雅)한 음악. 조선 시대에, 장악원에서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정6품 잡직(雜職).

    임시로 봉급을 주기 위해 두었던 체아직 녹관(祿官)이다. (사성랑(司成郞).아악을 울리는 데서 저, 피리, 해금

    따위의 여러 악기를 다루는 악사.

 

◇진찬(進饌) : 진연(進宴)보다 규모가 작고 의식이 간단한 궁중의 잔치 

 

◇진연(進宴)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궁중에서 베풀던 잔치

◇집사악사(執事樂師) : 나라의 제사나 큰 잔치 때에, 예를 진행시키는 집사 곁에 홀을 들고 서서 절차 에 따라 음악

    의 시작과 끝냄을 지휘하던 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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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근(李源根)

   ◇자 경재(景哉)

   ◇생년 1850년

   ◇연령 69歲

   ◇활동분야 : 기악가 / 피리 명인

   ◇1850년(철종 1)∼1918년. 한말 피리의 명인.

   ◇자는 경재(景哉). 서울출신. 피리의 대가인 인식(寅植)의 아들이다.

   ◇1860년 2월 장악원(掌樂院) 악공이 되었고,

   ◇1869년 12월 가전악(假典樂),

   ◇1906년 1월 악사(樂師),

   ◇1908년 7월 전악(典樂),

   ◇1913년 8월 이왕직의 아악수장(雅樂手長)을 지냈으며,

   ◇1915년 4월에는 제사과(祭祀課)에 근무하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피리주자로 활동하였으며, 맏아들 수

       (壽卿)은 거문고의 명인이고,

   ◇넷째 아들 수억(壽憶)은 관악기를 전공하였다.

 

● 이수경(李壽卿. 1882.12.19~1955.3.12)  

     호는 송사(松史). 서울 출생. 11세 때, 장악원(掌樂院) 악공(樂工)이 되고

   ◇1902년에 전악(典樂),

   ◇1914년에 아악수장(雅樂手長),

   ◇1933년에 아악사(雅樂師)를 역임한 뒤

   ◇1940년 사퇴하였다. 현금(玄琴)이 전공이나 악기제작에도 능하여 많은 명기를 제작하였으며, 아악부 악

       사(樂師)로 있을 때에는 거문고 ·정재(呈才) ·악장(樂章) 등을 가르치는 등 아악의 보존과 전승에 힘을

       썼다.

 

      단소(短簫)와 시조창(時調唱)에도 일가를 이루었으며 거문고에서는 《영산회상(靈山會相)》의 탄주(彈奏)에

      뛰어났었다. 할아버지가 이인식(李寅植)이다.

 

● 이병성(李炳星)  


이왕직아악 부 양성소 제2기생(1922~1926)에는 몇 사람 참으로 타고난 자질과 발군의 기량으로 그 이름을 길이 드리우고 악원의 전통을 영예롭게 한 이가 있으니 유일한 생존자 심소 김천흥, 박성재가 그렇고 이번에 말하려는 이병성 선진이 그들이다.

 

이병성은 누대 장악원 세가의 직계인 것부터가 여느 악생의 경우와 크게 달랐다.

증조부 이인식, 조부 이원근, 부친 이수경 선생은 악원의 악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각기 전공인 피리, 거문고에 있어서 당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하나같이 대가이었던 것이 너무 우람스럽기만 하다.

 

이병성은 호를 두봉(斗峯)이라고 했는데 자호 같지는 않고 뒤에 누가 지었던, 그의 좋은 기량을 그렇게 상징하여 잘 어울린다고 밖에 말하지 못한다. 두봉은 동기에서 박성재, 강명복, 김선득과 더불어 피리잽 이에 별러졌다.

 

증조부가 되는 이인식 선생이 그랬다지만 피리의 명수요. 대가의 혈통에서인지 그의 피리는 참으로 그만의 특이한 음색이어서 이날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그것은 득음한 이의 영글고 영롱한 피리소리와도 또 다른, 그야말로 그만의 대쪽을 쪼개는 듯한 맑고 트이고 푸르고 씩씩하니 어디 가히 비류가 없는 피리 소리였다.

 

전날 이인식 명인의 피리소리가 하마 저랬을까 하고 생각도 하지만 알 수가 없다. 사람 따라 저마다 목소리가 다르듯이 일관 피리(혀)를 입에 물어도 그 소리는 각기 다르게 퍼지는가 싶은 궁리를 혼자 해볼 때도 있지만 모르겠다.

 

아무튼 독특한 신비스럽기까지 한 그의 피리소리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두봉은 이수경 선생의 장자로 1909년 12월 1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외롭게 자랐다. 학교는 4년제인 장훈보통학교를 1922년 3월에 마치고, 그 해 4월 아악부원 양성소 제2기생으로 입소하였다.

 

1기생에는 이미 그의 종형이 되는 이병호가 있었고, 이병호의 전공 역시 피리였는데 재주가 비상하여 아악부에서 성실히 근무했으면 큰 기여를 할 재목이었는데 졸업 후 얼마안가 아악부를 떠나 애석하기 그지없다.

 

그보다 두봉 이병성이 전공인 피리보다 가곡으로 전문하게 된 내력이 실로 우연치가 않은 것을 들어야 하겠다. 장악원에는 가곡의 반주인 관현의 기악은 전해 오면서도 정작 노래는 이를 가르치고 배우지를 아니했던 것이다.

1926년 4월 비로소 민간의 가객 하규일 선생을 초빙하여 아악부에 가곡 뿐만 아니라 가사·시조 까지를 전수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가곡은 일청이조라고 이른다. 첫째는 목청이 청해야 하고 다음에 가락을 친다는 뜻이니 천부의 자질 없이는 대성을 이루기 힘들다.

 

이병성씨의 목청도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고 일컬을 만큼 아름다운 소리를 타고났다. 그 자질에다 근세 정통 가악계의 오직 한 분 남았던 기숙 하규일 옹의 채찍이 가해졌으니 두각은 날로 두드러져 갔다.

 

목에서 피가 나는 수업 십 사년 마침내 일가를 이루어 어전에서까지 가곡을 할 영예를 입기에 이른 것이다.' (<인간문화재>, 예용해, 어문각, 1963) 두봉은 이왕직아악 부 아악수보·아악수·아악수장·아악사를 역임하고 1940년 3월 일신상의 사정으로 아악 부를 퇴직했다.

 

그러다가 1950년 2월 구왕궁 아악 부 기술촉탁, 그 해 4월 국립국악원 개원과 더불어 동 예술사·국악사에 임명되어 복직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환도 이후 두봉은 심장병·신장병으로 괴로운 투병생활을 계속한다. 이 기간의 정황을 그림같이 묘사한 글이 있다.

 

'지나친 쇠약으로 귀까지 먹었다는 이씨는 드문드문 말을 이어 한다. 세습된 가통을 다음 대에도 전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분연히 '그럴 생각은 없다'고 말하며 차남 동규(16세)군이 국악사양성소에서 가야금을 배우고 있으나 '이는 대를 잇게 하자는 뜻이 아니오, 요는 학교에 보낼 돈이 없는 탓이라'고 자학에 가까운 어조다.' 두봉은 끝내 약석의 보람없이 1960년 11월 2일 시외 구파발 자택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52세였다.

 

현재 장남 동규, 사남 정규, 형제가 건실히 성장하여 국립국악원과 KBS국악관현악단에 각각 복무 하며, 함께 선고의 유업인 가곡을 전공으로 하고 있는 것도 두봉이 원했건 아니건 하늘의 섭리로 고즈넉이 받아들여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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