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오사화의 발생동기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조의제문(曺繼文〉이 그가 죽은 6년 뒤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조의제문 弔義帝文〉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킨 단초가 되었다.
이 일로 김종직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柳子光)· 정문형(鄭文炯)· 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정치행태를 비판해왔던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이어져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이종준(李宗準). 이 원(李 黿) 등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중종이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의 건의로 김종직(金宗直)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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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내용
또 이승건(李承健)이 한림으로 있으면서 사초에 쓰기를
“남인: 영남인)들이 서로 추켜올려서 선생은 제자들을 칭찬하고 제자들은 선생을 칭송하여 일당(一黨)을 지었었다고 하였는데, 그뒤에 이극돈이 승건의 사초를 보고, 매양 직필(直筆)이라고 일컬었다.
「정암연주(靜庵筵奏)」용재공 이종준(1454-1499)이 1498년(연산군 4), 김종직의 문인 이라하여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연루되어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귀양가던 도중에 단천군(端川郡), 마곡역을 지나면서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하다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 하면서 시(詩)한수를 써놓고 갔는데 당시 함경도 관찰사 이승건(李承健 : 우봉이씨(牛峰李氏)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임금을 기롱(譏弄)한 일이라 조정에 고함으로서, 마침내 연산군이 왕을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하여 한양(서울)으로 압송, 국문도중에 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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