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충분의평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오성부원군 이공 행장(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鰲城府院君李公行狀)
덕수 장유 찬(德水 張維, 撰)
공의 휘(諱)는 항복(恒福)이요, 자(字)는 자상(子常)이요, 그 선조는 경주(慶州) 사람이다. 원대(遠代)의 선조인 문충공(文忠公) 제현(齊賢)은 문장과 덕업(德業)으로 고려의 명상(名相)이 되었는데 세상에서 익재 선생(益齋先生)으로 일컬어져 오고 있다.
부친 몽량(夢亮)은 중종(中宗)ㆍ인종(仁宗)ㆍ명종(明宗) 3조(朝)를 잇따라 섬기면서 관직이 참찬에 이르렀는데, 최 부인(崔夫人)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병진년 10월 경자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 이틀 동안 젖을 먹지 않고 사흘이나 울지 않았으므로 가인(家人)이 걱정을 하였는데, 참찬공이 점쟁이로 하여금 점을 쳐보게 하였더니, 점쟁이가 축하하면서 말하기를, “사람으로서는 최고의 귀한 자리에 오를 괘(卦)입니다.” 하였다.
그 뒤로 차츰 자라나면서 재기가 번뜩이고 준걸스러워짐은 물론 식견과 도량이 보통 아이들을 훨씬 뛰어넘었으므로 참찬공이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아이가 필시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낼 것이다.” 하였다.
8세 때에 이르러 처음 글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월등하게 총명한 자질을 보였다. 한번은 참찬공이 검(劍)과 금(琴) 두 글자를 내주며 대구(對句)를 지어 보라고 명하였는데, 공이 그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시를 짓기를, “칼에는 장부의 기상이 서려 있고, 거문고엔 천고의 소리가 감추어져 있다.[劍有丈夫氣 琴藏千古音]” 하였으므로, 이를 들은 사람들이 장차 대성(大成)할 그릇이라는 것을 감지하였다.
9세 때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애훼(哀毁)하기를 성인(成人)처럼 하였고 소식(素食)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그리고 12, 13세 무렵에 벌써 의기(義氣)를 자부하는 행동을 곧잘 발휘하면서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다른 이들을 구해 주려는 뜻을 펼쳐 보이곤 하였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새로 지어 준 솜옷을 입고 나갔다가 해진 옷을 입은 이웃집 아이가 이를 보고서 입고 싶어하자 공이 즉시 벗어서 준 적도 있었고, 또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남에게 주고는 맨발로 집에 돌아온 일도 있었다.
이에 최 부인이 공의 뜻을 시험해 볼 목적으로 짐짓 성내며 꾸짖었더니, 공이 대답하기를, “다른 이가 갖고 싶어하는데 차마 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으므로, 최 부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참으로 특이한 일이다.” 하기도 하였다.
15세 무렵에 이미 건장하고 씩씩한 면모를 과시하며 용기를 뽐내기를 좋아하여 각저(角抵 소처럼 머리를 맞대고 힘을 겨루는 것)나 축국(蹴踘 발로 공을 차는 것) 같은 소년의 놀이에서 두각을 나타내곤 하였는데, 최 부인이 듣고서 준절하게 책망하자 공이 하고 싶은 마음을 통렬히 끊어 버리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16세에 최 부인이 죽었는데 거상(居喪)하면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상복을 벗고 나서는 학궁(學宮)에서 노닐게 되었는데 학문이 갈수록 이루어져 성예(聲譽)가 드높았다. 25세 때 경진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권지(權知)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고, 이듬해 예문관에 뽑혀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다.
선조(宣祖)가 장차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講)할 목적으로 태학사(太學士)에게 명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할 만한 재신(材臣)을 미리 뽑아 두도록 하였다. 이에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다섯 사람을 추천해 올렸는데, 이때 공이 실로 거기에 참여되었다.
그러자 상이 대내(大內)에 소장하고 있던 《강목》 1질(帙)을 하사하는 한편, 이문(吏文), 한어(漢語)나 시사(試射)와 같은 잡다한 기예(技藝)로 번거롭히지 말도록 명하고, 이어 장가독서(長暇讀書)의 은사(恩賜)를 내린 뒤 옥당으로 선발해 들여 정자(正字)에 임명하였다.
갑신년에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대사간 이발(李潑)에 대해 붕당(朋黨)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체직시킬 것을 논했다가 당로자(當路者)의 비위를 크게 거슬리게 되자 마침내 병을 핑계 대고 3번이나 정고(呈告)하였는데, 선조가 하교하기를, “이모(李某)를 옥당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다시는 소장을 올리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뒤이어 박사(博士)로 승진했으며, 을유년 봄에 예문관 봉교로 옮겨 제수되었다. 그리고 차서(次序)에 따라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한 다음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으며, 천거를 통해 이조 좌랑과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다.
전랑(銓郞)은 세상에서 열관(熱官 위세 있는 관직)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공은 마치 한사(寒士)처럼 숙연하게 그 자리에 임하였다. 이때 조사(朝士) 두 사람이 관각(館閣)의 직책에 몸담고 있으면서 은밀히 전조(銓曹)에 들어오려고 획책하여 공에게 빈객(賓客)을 보내 많이 유세(游說)를 벌이곤 하였는데, 공이 평소에 그들의 사람됨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듣고도 전혀 못 들은 것처럼 일관하였다.
그 뒤에 곧바로 수찬이 되었다가 병술년에 또 정언으로 임명되었으며, 정해년에 교리로 승진하였다. 그 뒤 무자년에 다시 이조에 들어가 정랑이 되었고, 기축년에 여기에서 체직되어 예조 정랑이 되었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발각되자 상이 친림(親臨)하여 죄수들을 국문(鞫問)하였는데, 이때 공이 문사낭청(問事朗廳)으로 입시하면서 상의 뜻에 걸맞게 일 처리를 명민하게 하였다.
그러자 선조가 늘 공을 호명(呼名)하며 이르기를, “이모(李某)에게 말을 전달하게 하라.” 하곤 하였는데, 다른 동료들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있기만 할 뿐 감히 상의 그러한 총애를 기대하지도 못하였다.
그리고 대신이 헌의(獻議 죄수를 재심리(再審理)하여 평의(評議)하는 것)할 때마다 공이 그 사이에서 주선하면서 가능한 한 평반(平反 관대한 쪽으로 율(律)을 적용하는 것)이 되도록 노력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보전하여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경인년에 응교로 승진한 다음 의정부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거쳐 전한(典翰)으로 다시 승진하였다. 언젠가 강연(講筵)에 입시하였을 때, 선조가 특별히 공을 앞으로 부르고 나서 문사낭청 당시의 일을 거론하며 공을 고재(高才)라고 거듭 일컬으면서 극구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 뒤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통정대부로 품계가 오르는 동시에 승정원 동부승지의 제수를 받았다. 또 문신(文臣)을 대상으로 한 정시(庭試)에서 공이 수석을 차지하여 구마(廐馬)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신묘년 봄에 체직되어 호조 참의가 되었는데, 요회(要會 월말 및 연말의 회계 결산)를 정밀하게 따져 쓸데없는 비용을 감축한 결과 겨우 한 달이 지나는 사이에 부고(府庫)가 충실해졌다.
그러자 판서로 있던 윤공 두수(尹公斗壽)가 대기(大器)라고 탄복하며 말하기를, “문한(文翰)을 전공한 인사가 이렇듯 전곡(錢穀)에 관한 일까지 능란하게 처리하다니 참으로 통재(通才)이다.” 라고 하였다. 역적을 다스린 공으로 책훈(策勳)되어 공에게 추충분의평난공신(推忠奮義平難功臣)의 호가 하사되었다.
그때 마침 사화(士禍)가 일어났는데 정 상공 철(鄭相公澈)을 화수(禍首)로 삼아 삼사(三司)가 법문(法文)을 농간부리면서 장차 부도(不道) 이상의 죄를 적용하려고 하였으므로 정공(鄭公)이 강변에 나가 처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화기(禍機)가 매우 급박하게 전개되자 문생(門生)이나 친척, 고구(古舊)들 모두가 겁에 질린 나머지 감히 문안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만은 홀로 차례로 방문하면서 조용히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태롭게 여겼다.
얼마 안 있어 공이 승지로 임명되었는데, 정철의 죄안(罪案)을 조당(朝堂)에 게시하도록 했는데도 공이 봉행(奉行)하는 일을 완만하게 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승지에 임명되었다.
당시 명류(名流)로서 시의(時議)를 거역한 인사들은 일체 당인(黨人)이라는 지목을 받은 나머지 거의 대부분 차례차례 관직이 떨어지는가 하면 귀양가는 신세가 되곤 하였다.
그리하여 공에 대해서도 예전부터 유감을 품어온 대관(臺官) 하나가 귀양보내는 대상에 포함시키려 하였는데, 대사헌으로 있던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극력 구해 준 덕택에 공이 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고 나서 공이 차서에 따라 도승지로 승진하였다.
임진년 4월에 왜노(倭奴)가 대거 침입해 들어왔는데, 신립(申砬)의 패보(敗報)가 전해지자 중외(中外)가 경악하여 마지않았다. 상이 서쪽으로 피신 갈 계책을 이미 굳히고 나서 좌상(左相) 유성룡(柳成龍)을 책명(策命)하여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았다. 이에 공이 동료에게 말하기를, “좌상을 이곳에 머물러 있게 한들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태로 볼 때 장차 상국(上國)에 들어가 구원을 호소해야 할 텐데, 그때의 사명(辭命 외교 문서의 작성 및 전달)에는 반드시 그의 솜씨가 필요할 것이다.” 하고는, 명을 개정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적보(賊報)가 날로 급해지자 공 스스로 나라에 몸바칠 각오를 단단히 하고는, 공무를 파하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외사(外舍)에 거처하면서 안쪽 문을 걸어 잠근 채 집안일로 자신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엄금하였다.
그리고 형과 누이와도 서로 결별(訣別)을 하였는데, 측실(側室)이 울면서 한번만이라도 얼굴을 보게 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달 그믐에 대가(大駕)가 출발하려 할 때 백관들도 미처 모이지 못한 상황에서 칠흑 같은 밤에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중전(中殿)은 독자적으로 시녀(侍女) 10여 인과 함께 도보(徒步)로 인화문(仁和門)을 빠져 나갔다. 공이 촛불을 들고 앞길을 인도하는 가운데 거가(車駕)가 밤에 임진(臨津)을 건넜다.
이튿날 상이 따라온 재신(宰臣)들을 불러 모은 뒤 채찍으로 땅을 두드리며 하문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하겠는가?” 하였는데, 재신들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공이 맨 먼저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병력만으로는 적을 막기에 부족하니, 서쪽으로 나아가서 중국 조정에 구원을 요청하는 길 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좋은 의견이라고 수긍하였다.
송도(松都)에 도착하고 나서 공을 특별히 이조 참판에 승진시키고 오성군(鰲城君)에 봉(封)한 뒤 두 왕자를 보호해 먼저 평양(平壤)으로 가도록 명하였다.
얼마 뒤에 거가도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하교하기를, “이모(李某)는 오래도록 근시(近侍)에 있었던 신분으로 뜻이 굳세고 사려가 깊으니 승진시켜 발탁하여 중책을 맡기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는, 뒤이어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에 제수하고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당시에 공이 이공 덕형(李公德馨)과 입대(入對)하여 빨리 구원병을 청하는 주본(奏本)을 올리자고 청하였는데, 대신이 처음에는 공과 의견을 달리하였으나 공이 강력하게 쟁집(爭執)하자 그렇게 하 기로 의논이 정해졌다.
그리고 조도사(調度使)를 세 곳으로 나눠 보내어 군량을 조달하게 함으로써 끝내 국가를 재건하는 공을 이룩하게 하였는데, 이것도 바로 공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병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그리고 지경연, 춘추관, 동지성균관사와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에 임명되었다. 임진(臨津)의 수비가 무너지면서 적이 패강(浿江 대동강(大同江))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그러자 이공 덕형이 자진하여 청하기를, “내가 배를 타고 가서 적장 현소(玄蘇)와 조신(調信)을 만나 왜적의 진격을 늦춰 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두 적의 머리를 베어 오겠다.”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두 적으로 말하면 매우 미미한 존재이니 그들을 죽인다 해도 적에게 타격을 입히기에 부족하다.
단지 우리가 먼저 의롭지 못했다는 소문만 날 것이니, 온당한 계책이 못 된다.” 하여,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상이 따라온 신하들을 모아 놓고 앞으로 갈 곳을 의논하게 하자, 더러 아뢰기를, “함흥(咸興)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고 궁벽진 곳이긴 하나 병량(兵糧)이 많으니 지켜 낼 만합니다.” 하였는데, 공과 이공 덕형이 누차 쟁집하여 아뢰기를, “함흥은 상국(上國)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곳에 가시면 안 됩니다.
영변(寧邊)으로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공과 이공이 각각 자진해서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구원병을 요청하겠다고 청하였는데, 상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병조 판서가 멀리 나가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상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이공에게 가라고 명하였다. 이에 공이 자신의 참마(驂馬)를 수레에서 풀어 이공에게 주면서 눈물로 작별하였다.
적병은 점차 거리를 좁혀 오는데 관군이 잇따라 패하여 무너지자, 상이 신하들을 불러 모아 의논하기를, “일이 급하게 된 만큼 내가 내부(內附)해야 하겠다. 다만 부자(父子)가 함께 압강(鴨江)을 건너게 되면 나라에 주인이 없게 되니, 세자는 종묘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머물러 있는 것이 좋겠다.
경들 중에 누가 나를 따라서 서쪽으로 건너가겠는가?” 하였는데, 신하들이 미처 응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이 눈물을 흘리며 답변드리기를, “신은 몸이 건강한 데다 부모도 안 계시니 목숨을 바쳐 전하를 따라가고자 합니다.” 하였다.
거가가 박천(博川)에 머무르고 있을 때 급보(急報)가 이르렀으므로 상이 재촉하며 출발하도록 명하였는데 시간은 벌써 밤 2고(鼓)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마침 비가 내리면서 가는 길이 험하기만 하였는데, 시위(侍衛)하는 자들이라야 10명의 숫자도 채우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공이 관속(官屬)들에게 이르기를, “전위(前衛)가 무척 허술하니 우리들이 거가 뒤에 있으면 안 되겠다.” 하고는, 마침내 말에 채찍질하여 앞장서서 인도하였다. 거가가 의주(義州)에 도착하자, 성안에 거주하고 있던 백성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다.
이에 공이 해사(廨舍)를 수리하여 오래 머물 뜻을 보여 주자고 청하였는데, 그렇게 하자 이민(吏民)이 과연 조금씩 돌아와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공이 또 건의하기를, “호(湖)ㆍ영(嶺) 등 3로(路)에서 행재(行在)가 어디에 머물고 계신지 모르고 있으니, 급히 사신을 보내 선유(宣諭)함으로써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상이 그 말을 따라 윤승훈(尹承勳)을 해로(海路)로 호남에 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조정의 명이 비로소 통하면서 제도(諸道)의 근왕병이 점차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순찰사(巡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금여(琴旅)의 형세가 단약(單弱)한 것을 염려한 나머지 전사(戰士)들을 나누어 입위(入衛)케 하자고 청하였는데, 공이 이를 물리치면서 아뢰기를, “전투 부대의 군졸들은 적을 격파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하고, 별도로 민정(民丁)을 뽑아 금위(禁衛)를 보완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요좌(遼左)에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우리나라가 왜적을 인도하여 중국에 쳐들어온다고 하였으므로,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지휘(指揮) 화응양(黃應暘)을 보내 사정을 탐지하게 하였는데, 응양이 처음에 우리나라를 상당히 의심하면서 왜서(倭書)를 한번 보자고 요구하였다.
그런데 공이 도성(都城)에 있을 때부터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서 신묘년에 왜추(倭酋)가 보낸 모욕적인 서신을 직접 싸가지고 왔다가 이때에 이르러 응양에게 보여 주니, 응양의 의심이 완전히 풀리면서 심지어는 가슴을 치고 큰소리로 통곡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돌아간 다음 사유를 갖추어 사실대로 보고하였으므로 우리나라에 구원병을 보내는 의논이 마침내 결정되었다. 명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과 사유(史儒)가 7천 병력을 이끌고 먼저 도착하였다.
이때 공이 말하기를, “조장(祖將)을 보건대 조급하게 굴기만 할 뿐 계책이 없으니 군대가 반드시 패하고 말 것이다.” 하였는데, 평양(平壤)으로 진격하다가 과연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사유가 전사하고 승훈은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왔는데, 돌아가서는 거꾸로 우리나라가 왜구를 도왔다고 무함을 하였다. 이에 공이 대신을 파견하여 광녕(廣寧)에 가서 그 무함을 해명하게 할 것을 청하는 한편, 또 사신을 보내 상주(上奏)하여 대군의 출발을 재촉하자고 청하였다.
12월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5만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공이 군사 행동에 기율(紀律)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상에게 아뢰기를, “군사 작전이 반드시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다만 막하(幕下)에서 정 동지(鄭同知 정문빈(鄭文彬))와 조 지현(趙知縣 조여매(趙如梅))이 모든 일을 좌우하고 있는데, 뒷날 큰 계책을 저지할 자들은 필시 이자들일 것입니다.” 하였다.
계사년 정월에 제독이 평양에 진격하여 적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적을 추격하다가 벽제(碧蹄)에 이르렀을 때, 적의 복병을 만나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제독의 기가 꺾이면서 마침내 화의(和議)에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는데, 이때 정(鄭)과 조(趙) 두 사람이 실로 그 모의를 주도하였으니, 공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았다고 하겠다.
경성의 적이 일단 퇴각을 하자 공이 대가(大駕)를 돌릴 것을 강력히 청하여 10월에 대가가 서울로 돌아왔다. 11월에 명나라의 행인(行人) 사헌(司憲)이 조칙(詔勅)을 받들고 오자 공이 원접사(遠接使)로 나가 영접하였다.
그런데 당시에 황제가 조칙을 내려 왕세자로 하여금 호조 및 병조의 관원과 함께 전라ㆍ경상 지방에 먼저 내려가 군대의 일을 살피도록 하였다. 이에 공이 병조의 장관 신분이라서 마침내 원접사의 임무를 그만두고 세자를 배행(陪行)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갑오년 봄에 호서(湖西)의 역적 송유진(宋儒眞)이 반란을 일으키자 분조(分朝)의 신하들이 세자를 모시고 조정에 돌아가 적을 피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온당한 계책이 못 된다고 반박하니, 세자가 따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역적의 무리 역시 평정되었다.
세자가 홍주(洪州)에 있을 적에 보령(保寧)의 수영(水營)으로 옮겨 머물려고 하면서 공으로 하여금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공이 다녀와서는 머물 수 없는 곳이라고 속임수로 대답하였다. 이에 더러 의심을 하자, 공이 말하기를, “영보정(永保亭)은 그 경치가 호중(湖中)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곳이다.
따라서 소주(少主)께서 이곳에 머무르시면 뒷날 방탕하는 마음을 갖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 식자들이 그 원대한 식견에 탄복하였다.
을미년에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병신년에 중국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일본의 추장(酋長)을 책봉(冊封)하려 하였는데, 부사(副使) 양방형(楊邦亨)이 공을 접반사(接伴使)로 삼게 해 달라고 청하자, 상이 허락하였다.
공이 사조(辭朝)한 다음 이조 판서와 대제학의 직책을 해면(解免)시켜 줄 것을 청하니,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하였다. 양 부사가 공을 그지없이 공경하고 중히 여기면서 늘 말하기를, “동방에 이런 인물이 있으니, 어찌 외국(外國)이라고 해서 경시해서야 되겠는가.” 하곤 하였다.
왜영(倭營)에 들어가 있을 때에 정사(正使) 이종성(李宗城)이 장차 적이 무도(無道)한 짓을 저지르려 한다는 소문을 잘못 듣고는 자기 혼자 빠져 나와 야간도주를 하였으므로 원근(遠近)이 크게 경악하였다.
이에 양사(楊使)가 급히 공으로 하여금 조정에 달려가 보고하게 하자, 공이 이틀 밤낮을 전속력으로 말을 치달려 도착하고 보니 이사(李使)가 이미 거기에 와 있었다.
그런데 적들 또한 끝까지 그런 행동을 취하려 하지를 않았다. 처음에 공이 이사(李使)를 보고 나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귀한 집 자제로 문묵(文墨)만 일삼아 왔으니 분명히 명(命)을 욕되게 할 것이다.” 하였는데, 지나고 보니 과연 공의 말대로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공을 감식안(鑑識眼)이 있다고 일컬었다. 겨울에 양사(楊使)가 본국에 돌아가자 공이 국경까지 그를 전송하였다.
정유년에 다시 병조 판서가 되었다. 중국 조정에서 재차 군대를 일으켜 왜적을 정벌할 때, 양 어사 호(楊御使鎬)가 군무(軍務)를 경리(經理)하였는데, 격문(檄文)으로 호조ㆍ병조ㆍ공조의 관원을 불러 국경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이에 공이 구연성(九連城)으로 나아가 영접한 뒤 모두 기의(機宜)에 맞게 응대하였다.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뒤이어 다시 병조 판서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로 공이 병조 판서를 맡은 것이 모두 5번이었다. 당시 대적(大賊)이 나라 안에 그득하고 중국 군대가 수륙(水陸)으로 건너와 집결하는 상황에서 군사에 관한 일치고 병조 판서의 책임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공이 이에 매사를 온당하게 조처하며 시원스럽게 너끈히 처리함은 물론 항상 포목(布木) 1만 필을 남겨 비축해 둠으로써 급할 때 쓸 수 있도록 대비를 하였는데, 양 경리(楊經理)도 이런 공의 일처리에 탄복한 나머지 어려운 일을 당하기만 하면 반드시 이 상서(李尙書)를 찾아보라고 하곤 하였다.
무술년 가을에 명 나라의 찬획(贊畫) 정응태(丁應泰)가 양 경리를 무함하여 탄핵하자, 우리나라에서 경략을 변호하는 주문(奏文)을 올려 유임시켰는데, 응태가 이 일로 우리나라에 대해서 유감을 품고 절치부심(切齒腐心)한 끝에 이번에는 우리나라를 무함하는 주본(奏本)을 올리면서 그지없이 참혹하게 지껄여 대었다.
이에 선조(宣祖)가 크게 놀라 장차 대신을 보내 해명하려고 하면서 영상(領相) 유성룡(柳成龍)을 의중에 두고 있었는데, 유공(柳公)이 자진해서 가겠다고 제때에 청하지 않자 서노작 노여워하였다.
그리하여 유공이 탄핵을 받고 정승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마침내 공이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고 부원군(府院君)으로 작위가 올라가면서 진주사(陳奏使)가 되었다.
이때 공이 2번이나 차자를 올려 극력 사양하면서 가짜로 임시 직함을 띠고 사명(使命)을 수행하고자 하였으나, 상이 이르기를, “무함을 해명하려고 하면서 먼저 임금을 기만하면 되겠는가.” 하였으므로, 공이 어쩔 수 없이 명에 숙배(肅拜)하였다.
공이 이틀 길을 하루에 달릴 정도로 급히 북경(北京)에 달려가서 일단 주문(奏文)을 올린 다음, 두루 각부(閣部)를 찾아다니며 정문(呈文)으로 통쾌하게 변박(辨駁)을 하였는데, 각부의 제공(諸公)이 공의 의표(儀表)에 이미 공경하는 뜻을 품고 있었던 터에, 문장의 논리 또한 명쾌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므로, 더욱 칭찬하고 탄복하며 경쟁적으로 다주(茶酒)를 대접하면서 말하기를, “나라의 치욕은 자연히 씻어질 것이니 염려할 것이 없다.” 하였다.
그리하여 천자가 마침내 정응태를 혁직(革職)시키는 동시에 위유(慰諭)하는 조칙(詔勅)을 내려 주기까지 하였는데, 이듬해에 공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선조가 크게 기뻐하며 공에게 전답과 노복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그 뒤에 논하는 이들이 정응태 사건에 대한 죄를 당시 접반사(接伴使)였던 백유함(白惟咸)의 탓으로 돌려 그를 하옥시켰는데, 삼성회국(三省會鞫 의정부ㆍ사헌부ㆍ의금부의 관원이 연석(連席)하여 죄인을 국문하는 것)을 벌일 때 공이 위관(委官 재판장)으로 상헌(上讞 죄의 경중을 재심리하여 위에 보고하는 것)하면서 그의 억울한 정상을 아뢰자, 선조가 용서해 주었다.
이때 조정의 의논이 더욱 강력하게 유상(柳相)을 공격하고 나섰는데, 그 명분이 갑오년에 화의(和議)를 주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공이 소장을 올려, 자신도 일찍이 화의에 찬동했던 만큼 감히 요행수로 면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 탄핵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병을 핑계로 면직되고 말았는데,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이 일과 관련하여 선조가 하교하기를, “어떤 일을 다른 사람과 함께하다가 끝에 가서 그만 태도를 바꿔 버리는 자는 바로 이모(李某)의 죄인이라 할 것이다.” 하였다.
경자년에 도체찰사(都體察使) 겸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어 호(湖)ㆍ영(嶺) 등 제로(諸路)를 선무(宣撫)하였다. 이때 호남 지방의 역역(力役)을 관대하게 해 줄 것을 청하는 한편 백성을 안정시키고 해로(海路)를 방어할 16개 조목의 계책을 올렸는데, 상이 그 주장을 많이 채택하였으므로 남쪽 백성들이 그 은덕을 많이 입었다. 여름에 영의정으로 임명되어 소환되었다.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상승(上昇)하자 공이 장례 행렬을 따라 산릉(山陵)에 갔는데, 궁인(宮人)이 실화(失火)하는 바람에 영악전(靈幄殿)에까지 불길이 옮겨 붙었다. 창졸간에 일어난 변이라서 사람들이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 공이 조용히 지휘하며 불을 끄고 나서 예관(禮官)을 불러 속히 위안제(慰安祭)를 거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재궁(梓宮)을 받들고 의례(儀禮)대로 장례일을 마치게 하였는데,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한편으로는 거행하고 한편으로는 치계(馳啓)하면서 끝내는 이날 돌아와 우제(虞祭)를 지낼 수 있게 하였으므로, 이를 듣고는 사람들이 변고에 대처하는 공의 능력에 대해서 탄복하였다.
공이 누차 사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고 매우 간절하게 돈유(敦諭)하자 공이 이에 일어나 정사를 보기 시작하였다. 상이 학행(學行)을 소유한 인사들을 천거하라고 명하자, 공이 김장생(金長生), 신응구(申應榘), 이기설(李基卨) 등을 추천하여 유지(有旨)에 응하였다.
또 언젠가는 입대(入對)하여 치도(治道)를 논하면서 아뢰기를, “위에서는 마음을 활짝 열어 주며 공도(公道)가 펼쳐지게 하고, 아래에서는 붕당(朋黨)을 깨뜨리고 염치있게 행동하는 이것보다 오늘날 더 급히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하니, 상이 훌륭하다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이때 건주위(建州衛)의 오랑캐 추장이 글을 보내 우호 관계의 수립을 청하였는데, 공이 의논드리기를, “이 추장이 중국 조정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있는 만큼 의리로 볼 때 우리나라가 사적(私的)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을 뿐더러 뒷날 걱정을 끼치게 될 것이 또한 분명하니 사신을 사절(謝絶)토록 하소서.” 하였다.
임인년 봄에 이르러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여 삼사(三司)가 성우계(成牛溪 성혼(成渾))를 논핵하면서 장차 그의 죄를 추가하려고 하자, 공이 ‘성혼은 유림(儒林)으로부터 중망(重望)을 받고 있는 만큼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차자(箚子)를 작성하였는데, 그때 마침 권신(權臣)의 사주를 받은 사람이 공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공이 정상 철(鄭相澈)의 패거리라고 몰아세웠으므로, 공이 마침내 인고(引告)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차자도 결국 올리지 못한 채 마침내는 이 일 때문에 정승에서 해면(解免)되기에 이르렀다.
일단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되자 공은 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을 사양한 채 경전(經傳)과 염락(濂洛 성리학자(性理學者))의 서적들을 두루 읽기 시작하였는데, 그 과정(課程)을 설치한 것이 매우 엄격하였다.
공은 또 본래부터 산수(山水)를 좋아하는 성품이라서 젊었을 적에 중흥동(中興洞) 계곡을 찾아 많이 노닐곤 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화창한 날을 맞게 되면 문득 한두 명의 자질(子姪)을 따라 필마(匹馬)로 가 노닐면서 밤새도록 읊조리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선조는 평소 공을 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공이 지위를 떠나 있었어도 은례(恩禮)는 여전히 쇠하지 않았다. 갑진년 원일(元日)에 흰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는 이변이 일어나자 상이 신하들에게 구언(求言)하였다.
이에 공이 유지(有旨)에 응해 차자를 올려 잘못된 일들을 극론(極論)하면서 아뢰기를, “성의(誠意)를 미루어 나가는 것은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셔야 할 것이요, 공도(公道)를 확립하는 것은 인재를 등용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 개절(剴切)함에 탄복하였다.
호종(扈從)한 공을 책훈(策勳)할 적에 공이 원훈(元勳)으로서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의 호를 하사 받았다.
난 도적이 재신(宰臣) 유희서(柳煕緖)를 죽였는데,그 도적을 잡지 못하였다. 그런데 포도대장 변양걸(邊良傑)이 그 사건을 끝까지 캐내며 수사하다가 유배를 당하는가 하면 희서의 아들까지도 장류(杖流)되는 사태에 이르자, 수상(首相) 이덕형(李德馨)이 상소하여 이를 논하였는데, 상의 뜻을 거스른 나머지 마침내 정승의 직책에서 파면되고 말았다.
이에 공이 이공 대신 다시 정승이 되었는데, 누차 사직소를 올리면서 아뢰기를, “양걸이 폄적(貶謫)된 것에 대해서는 신도 그야말로 내심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는데 단지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덕형은 이미 말씀드린 신하요, 신은 아직 말씀드리지 못한 덕형일 따름입니다.
그러니 죄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신의 속마음이야 숨길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런 내용의 소장이 8차례나 올라간 끝에야 상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병오년에 대마도(對馬島)의 오랑캐 의지(義智)가 사신을 보내 화의(和議)를 청하였다. 유영경(柳永慶)이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위에 건의하여 임진왜란 때 능(陵)을 범한 적들을 잡아 보내게 하였다.
이에 의지가 속임수로 사형수 2명을 잡아와 바쳤는데, 모두 나이가 어려 임진년 당시에는 7, 8세의 나이에도 미치지 않았을 그런 자들이었다. 그런데 영경은 이를 자신의 공으로 삼으려고 그들을 종묘에 장차 바친 뒤 용서해 주자고 하였고, 공은 그들을 변경에서 주륙(誅戮)함으로써 왜사(倭使)에게 조정의 태도를 보여 주자고 하였으나, 조정에서 결국은 영경의 의논을 채택하였다.
김계(金稽)라는 자가 상소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선조(宣祖)의 생부)을 추존(追尊)하자고 청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영경이 귀 뜸해 준 결과였다. 상이 그 일을 의논하도록 아래에 내려 보내자 비위를 맞춰 요행수를 바라는 무리들이 서로 앞다투어 견강부회하였는데, 공이 의논드리기를, “이러한 일을 위에서 이미 행한 임금들이 있으니, 애ㆍ안ㆍ환ㆍ영(哀安桓靈 한(漢) 나라의 애제와 후한(後漢)의 안제, 환제, 영제를 가리킴)이 바로 그들이요,
아래에서 이를 비난한 인사들이 있으니 주ㆍ장ㆍ정ㆍ주(周張程朱 송(宋) 나라의 학자인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 정이(程頤), 주희(朱熹)를 가리킴)가 바로 그들입니다.” 하자, 군의(群議)가 결정되면서 그 일이 잠잠해지게 되었다. 처음에 선조(宣祖)가 적사(嫡嗣)를 두지 못했다.
그래서 광해(光海)가 오래도록 저위(儲位 세자의 위치)에 있었는데 실덕(失德)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당시에 선조가 장기간 병석에 누워 있게 되자, 국가를 위태롭게 하며 화란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자들이 헛소문을 퍼뜨려 동요시키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정인홍(鄭仁弘)의 소(疏)가 들어가자 인심이 의혹에 잠기고 중외(中外)가 온통 어쩔 줄을 몰라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조가 승하하고, 그 이튿날 광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런데 당시에 임해군(臨海君)이 나이가 가장 많아 몰리는 입장에 놓여 있었는데, 평소부터 잘못을 많이 범해 오면서 집에다 불량한 사나이들을 모아 놓고 있었다.
이에 광해가 의심을 해 오던 나머지 병력을 집결시켜 궐문(闕門)을 호위하도록 명하였는데, 대낮에도 궁문(宮門)을 열지 못하게 한 지가 한 달이 넘었다. 이때 어떤 관원이 공을 찾아와 임해군에 대한 일을 의논하자, 공이 말하기를, “왕자가 현재 상차(喪次)에 있고, 또 모반한 정상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무턱대고 형벌을 가한단 말인가.” 하였는데, 며칠 뒤에 삼사(三司)에서 임해가 불궤(不軌)를 꾀한다고 밀계(密啓)를 올린 결과 교동(喬桐)으로 유배보내기에 이르렀다.
이에 공이 다른 사태가 벌어질까 미리 염려하여 임해의 목숨을 온전히 보전케 해 줄 것을 극력 진달하였는데, 수상(首相)인 이공 원익(李公元翼)과 도헌(都憲)인 정공 구(鄭公逑)가 논한 것도 공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러자 논하는 자들이 떠들썩하게 일어나 역적을 변호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마침내 진신(搢紳)을 화망(禍網)에 빠뜨릴 계제(階梯)로 삼았다.
인산(因山 임금의 장례) 날짜가 확정된 상태에서 기자헌(奇自獻)이 좌도(左道)의 말을 믿고 다른 의논을 내어 동요시켰는데, 공이 상차(上箚)하여 그 망녕된 주장을 변박(辨駁)하였으므로 마침내 처음 정한 날짜에 따라 거행하게 되었다.
또 창원 부사(昌原府使) 정경세(鄭經世)가 상소하여 외척(外戚)이 정권을 잡는 것에 대한 부당함을 논하자, 광해가 노하여 선조(先朝)와 관련된 말이라고 하면서 장차 금부에 내려 다스리게 하려 하였는데, 공이 2번이나 아뢰어 극력 구해 준 덕분에 경세가 화를 면하고 단지 삭직(削職)만 당하였다.
4월에 좌상 겸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총호사(摠護使)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목릉(穆陵 선조의 능) 공사가 일단 마무리되자 삼사가 임해를 복주(伏誅)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공은 예전의 주장을 끝까지 고수하면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이에 정인홍이 상차하여, 목숨을 온전히 보전케 해 줄 것을 주장하는 이들을 공박하였으므로, 공이 2차례나 상차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신해년 여름에 인홍이 상소하여 문원(文元 이언적(李彦迪))과 문순(文純 이황(李滉)) 두 선정(先正)을 헐뜯으면서 문묘(文廟)의 향사(享祀)에 참여케 해서는 안 된다고 하자, 태학(太學)의 제생(諸生)이 상서(上書)하여 반박하고 해명하는 한편 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러자 인홍의 패거리인 지평 박여량(朴汝樑)이 이 사실을 고자질해 위에 아뢰자, 광해가 노하여 창의(倡議)한 유생을 찾아내 금고(禁錮)시키도록 명하였는데, 제생이 이 명을 듣고서 권당(捲堂 동맹 휴학)을 하고는 태학을 떠났다.
이에 공이 재차 차자를 올려 ‘인홍이 사감(私感)을 품고 선현(先賢)을 헐뜯고 있기 때문에 다사(多士)가 모두 분개하고 있는 것이니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극력 말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으로 잇따라 말하는 이들이 더욱 불어났으므로, 광해가 마지못해 그 의논을 따르게 되었다.
이에 앞서 거인(擧人 과거 응시자) 임숙영(任叔英)이 책문(策文)을 작성하면서 궁금(宮禁)의 행위를 비난하며 배척했는데, 이를 고관(考官)이 급제자 명단에 포함시켜 위에 올렸다. 그런데 광해가 명을 내려 그의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으므로 공이 간언(諫言)을 하였으나 광해가 따르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입대(入對)해서, 두 선정(先正)에 대해서는 의논할 만한 점이 없다는 것과 임숙영 역시 과거 급제를 취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차례로 개진하자, 광해의 마음이 풀리면서 임숙영의 급제를 원상회복시키도록 명하였다.
공이 정인홍의 뜻에 거슬리는 일을 계속 행하자 인홍이 어떻게 해서든 공을 중상모략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공을 헐뜯는 내용의 소장을 올린 그의 무리들이 전후에 걸쳐 무려 수십백 인에 이르렀으므로 공이 더욱 강력하게 그만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이 체부(體府)를 개설한 이후로 광해 역시 공의 덕망(德望)을 중시하여 공을 자못 믿고 일을 맡기곤 하였는데, 관서(關西)와 관북(關北)에 차견(差遣)하는 일은 일체 공에게 위임할 정도였다. 그래서 공이 사직할 때마다 허락을 받지 못하곤 하였는데, 이 때문에 군소배들이 더더욱 모질게 공을 해치려 들었다.
인홍이 다시 사람을 사주하여 상소하게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체부(體府)의 병권(兵權)이 너무나 무거우니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이 또 매우 위박(危迫)한 심정을 표현하면서 면직을 청하는 소장을 모두 20차례나 올렸지만 여전히 허락받지 못하였다.
임자년에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시인(詩人) 권필(權韠)이 시어(詩語)로 걸려들어 체포된 뒤 고신(考訊)을 당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공이 공식적인 자리를 벗어나 울면서 간(諫)하기까지 하였는데도 광해가 들어주지 않은 결과 결국 권필이 장사(杖死)되고 말았으므로 공이 통한(痛恨)해 마지않았다.
술사(術士) 이의신(李懿信)이 욤아한 말을 지껄여 대며 교하(交河)로 도성을 옮길 것을 청하자 광해가 그 설에 꽤나 솔깃하게 빠져 들었는데, 공이 이를 통렬하게 반박하여 물리쳤다.
계축년에 위성(衛聖)ㆍ익사(翼社)ㆍ형난(亨難) 등 3공신(功臣)에 책훈(策勳)되었는데, 이는 공의 뜻이 아니었다. 얼마 뒤에 사수(死囚) 박응서(朴應犀)가 간인(奸人)의 사주를 받고 상변(上變)하였는데, 이 일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집안이 온통 죽음을 당하였다.
이때 공은 사소한 허물 때문에 성곽 밖에 나가 대죄(待罪)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광해가 명소(命召)하여 국청(鞫廳)에 나아오게 하였다. 당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겨우 8세의 나이밖에 되지 않았는데 삼사(三司)가 역적의 괴수라고 지목하고는 차례로 소장을 올리며 죽일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정부(政府)에서만은 유독 정청(庭請)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군소배들이 기고만장하여 계속 날뛰는 바람에 무슨 화가 닥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2명의 재신(宰臣)이 밤에 공을 찾아와 화복(禍福)의 설을 가지고 위협하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였으나 공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자질배(子姪輩)가 눈물을 흘리면서 많은 식구들의 처지도 생각해 달라는 말을 하기까지 하였는데, 공은 의연히 수염을 떨치면서 말하기를, “내가 선조(先朝)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지위가 태정(台鼎 정승)에 이르렀다.
지금 늙어서 장차 죽을 나이에 어찌 차마 소신을 바꿔 임금을 저버리며 스스로 명의(名義)를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나의 뜻은 결정되었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 하였다. 그리하여 양사(兩司)가 날마다 상신(相臣)들을 윽박질렀으나 공은 예전의 주장을 그대로 견지하였다.
장령 정조(鄭造)ㆍ윤인(尹訒) 등이 위의 뜻에 영합하여 비위를 맞추려는 목적으로 앞장서서 말하면서, 대비(大妃)는 어미로서의 도리를 잃었으니 폐해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이상 덕형(李相德馨)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제 죽을 곳을 얻었다. 이자들이 사람들을 짓이기면서 걸핏하면 역적을 토죄(討罪)한다고 말하고, 또 《춘추(春秋)》를 함부로 인용하여 위에서 듣고서 의혹을 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대저 신하가 임금의 어미를 폐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역적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식이 된 도리에서는 어미를 원수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춘추》의 대의(大義)가 아니겠는가.
우리들이 경(經)을 인용하고 그 의리에 입각하여 하나의 소(疏)를 올림으로써 사설(邪說)을 통렬하게 격파해 버려야 하겠다.” 하니, 이상이 흔쾌히 동조하며 말하기를, “공이 한번 초안을 작성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공이 집에 돌아와서는 조의(朝衣)도 벗지 않은 채 외당(外堂)에 앉아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자제들이 들어가 그 연유를 묻자, 공이 장탄식을 하면서 말하기를, “삼강(三綱)이 무너졌으니 나라 구실을 할 수가 있겠느냐.
나는 의리상 차마 앉아서 볼 수만은 없으니, 목숨을 바쳐 죽는 한이 있어도 할 말을 다하고 나서 시체가 되어 돌아올 작정이다.” 하였다. 당시 대사헌으로 있던 최유원(崔有源)이 평소 공을 공경하였는데, 공이 의리를 가지고 복돋아 주자, 유원이 공이 말해 준 내용에 따라 마침내 정조와 윤인을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주장이 행해지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공의 힘이었다고 하겠다.
공이 상소문의 초안을 작성해서 이상에게 보여 주니, 이상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공이 정협(鄭浹)을 잘못 천거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물러났기 때문에 그 상소문은 실제로 올려지지 못하였다.
공이 탄핵을 당하고 나서는 동복(僮僕) 한 명에 말을 타고서 동쪽 교외로 빠져 나가 강가에서 우거(寓居)하다가 가을철이 되자 노원(蘆原) 촌가(村家)에서 잠시 기거하였는데, 볼품없는 오두막집에서 변변찮은 식사마저 충분치 못한 상황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거처하면서 오직 독서하는 데에 침잠하였으며, 한가할 때면 지팡이를 짚고 산과 계곡 사이를 소요하며 회포를 풀곤 하였다.
언젠가 미복(微服) 차림으로 노새를 타고 청평산(淸平山)에 가서 노닌 적이 있었는데, 혹 만나는 사람이 있어도 공인 줄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장남인 성남(星男)이 적노(賊奴)의 무함을 받고 감옥에 갇히자 가인(家人)이 뇌물을 주고서라도 화를 면하게 하고자 했었는데, 공이 통렬하게 이를 제지하였다.
정인홍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공을 미워한 나머지 양사(兩司)를 충동질하여 공을 삭출(削黜)시키도록 청하게 하였으나, 광해가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병진년에 망우리(忘憂里)에다 자그마한 집을 짓고는 노원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
이듬해 겨울철에 이르러 폐모론(廢母論)이 또 일어났다. 이이첨(李爾瞻)과 허균(許筠) 등이 불량한 작자들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게 하면서 자전(慈殿)의 죄상(罪狀)을 열거하도록 하였는데, 그 내용이 패역(悖逆)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광해가 그 소장을 아래에 내려 백관들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이때 공은 말질(末疾 손과 발이 마비되는 증세)에 걸려 있었는데, 홀연히 천둥 소리가 크게 들리자 공이 경악하여 말하기를, “아마도 하늘이 나에게 알려 줘 경계시키려고 하는가 보다.” 하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추부(樞府)의 낭관(郞官)이 의논을 수렴하려고 찾아오자, 공이 부축을 받고 일어나 붓을 떨쳐 자신의 의견을 써 내려갔는데, 그 대략에, “모르겠습니다만, 그 누가 전하에게 이러한 계책을 꾸며 올렸단 말입니까.
우순(虞舜)은 불행히도 완악한 아비와 무지몽매한 어미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늘 순을 죽이려 하면서 우물을 파게 하고 창고에올라가 흙을 바르게 하였으니, 위태로운 상황이 또한 극에 달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은 호읍(號泣)하고 원모(怨慕)하기만 하였을 뿐 부모의 옳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는 개의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이는 아비가 아무리 자애롭지 못하다 하더라도 자식된 도리에서는 효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춘추(春秋)》에서도 자식의 도리상 어미를 원수로 삼을 수 없는 의리를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급(伋)의 처(妻)는 바로 백(白)의 어미가 되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정성과 효성을 바쳐야 하는 중대한 인륜 관계에 있어 어찌 그 사이에 간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마땅히 효에 입각하여 나라를 다스려야 할 때이니, 그렇게만 하면 나라 전체가 점차적으로 교화될 희망이 앞으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런 이야기를 숨이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에 듣게 되었단 말입니까.
오늘날 행할 도리로 말하면, 순(舜) 임금과 같은 덕성을 몸받으시어 효성을 바쳐 화기롭게 하시고 날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스스로 다스려 나가면서 노여움을 자애로움으로 전환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신의 소망입니다.” 하였다.
공의 이 의논이 이르자, 조야(朝野)에서 듣고는 머리칼이 모두 곤두섰으며, 더러는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저리(邸吏)가 공의 의논을 기록하려고 왔다가 손이 떨려 제대로 써 내려가지 못하기도 하였다.
삼사(三司)가 절변(絶邊)에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멀리 귀양보내라고만 명하였다. 금부가 배소(配所)를 의논하는 과정에서 모두 6차례나 지역을 바꾼 끝에 비로소 북청(北靑)으로 배소가 확정되었다
무오년 정월에 이르러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공 스스로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짐작하고는 가인(家人)에게 명하여 의금(衣衾)과 염습(斂襲)에 필요한 물품들을 모두 챙겨 가지고 따라오게 하였다.
그리고 자제들을 경계시키기를, “나라를 섬기는 일을 형편없이 하여 이런 죄를 얻게 되었으니, 내가 죽더라도 조의(朝衣)로 염(斂)을 하지 말고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만 쓰도록 하라.” 하였다
배소에 도착하고 나서 예전에 앓던 풍질(風疾)이 다시 발작하여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다. 5월에 이르러 공이 꿈을 꾸었는데, 선조가 평대(平臺)에 임어(臨御)하고 유상 성룡(柳相成龍)과 김상 명원(金相命元)과 이상 덕형(李相德馨)이 모두 시립(侍立)해 있는 가운데 이상이 공을 불러오자고 청하는 내용이었다.
공이 꿈을 깨고 나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제 세상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였는데, 며칠 뒤에 병세가 마침내 위급해지더니 이달 13일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때의 나이 63세였다
이웃 고을의 사민(士民)들이 부음을 듣고 달려와 통곡을 하였는데 그 숫자는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함흥(咸興)의 전(前) 정랑(正郞) 한인록(韓仁祿) 등과 정평(定平)의 사인(士人) 장응시(張應時) 등과 영흥(永興)의 사인 주사룡(朱士龍) 등과 안변(安邊)의 사인 장응정(張應井) 등이 각각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致祭)하였으며, 영남의 사인 정심(鄭杺) 등이 천릿길에 사람을 보내 부의(賻儀)를 전하였는데, 이들 모두 평소에 공과는 면식(面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공의 자제들이 상구(喪柩)를 모시고 돌아와 이해 8월 4일에 포천(抱川)의 선영에다 공을 안장(安葬)하였다. 그 뒤 북청과 포천의 인사들이 공을 위해 사당을 세우기까지 하였는데, 나라에서 금해도 이를 막을 수가 없었으니, 공의(公議)가 바로 인심(人心)에 내재하고 있는 것을 어찌 속일 수가 있겠는가.
공은 천부적으로 자질이 매우 뛰어난 데다 활달한 성품에 대인의 도량을 지니고 있었다. 신장은 중간 정도를 넘지 못했지만 의모(儀貌)가 괴위(魁偉)하고 풍신(風神)이 심원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으며, 청백(淸白)하고 효우(孝友)에 독실한 품성은 천성적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종족(宗族)을 잘 보살피며 화목한 분위기를 조성함에 있어서는 옛사람의 가법(家法)을 연상케 하였다. 젊었을 때 호탕한 성격에 관기(官妓) 하나를 좋아한 적이 있었는데, 정(情)이 한 곳에 쏠리면 반드시 심신(身心)을 해칠 것이라는 생각이 스스로 홀연히 들자, 마침내 통렬하게 끊어 버리고 그 뒤로는 결코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에 임금의 말고삐를 잡고 야숙(野宿)하면서 어떤 상황이 닥쳐오든 제대로 일처리를 하며 온갖 계책을 짜내어 있는 힘을 모두 다 바쳤는데, 중흥(中興)을 이룩하게 된 모유(謀猷)를 살펴보면 대체로 공에게서 나온 것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조정에 몸담은 39년 동안에 총재(冢宰 이조 판서)를 1번, 사마(司馬 병조 판서)를 5번, 의정(議政)을 4번, 원수(元帥)를 1번, 체찰(體察)을 2번 역임하였는데, 출장입상(出將入相)한 20여 년 동안 공이 계획을 세우고 건의를 드린 것으로서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혁혁히 남아 있는 것들을 거론해 보면 한두 가지만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공이 이룩한 공적이야말로 사직(社稷)을 보존케 한 것이었고 그 은택으로 말하면 생민(生民)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두루 끼쳐 준 것이었다. 게다가 공의 청렴함은 빙옥(冰玉)과 같았고 그 중망(重望)은 교악(喬岳)과 같았으니, 공이야말로 국가의 주석(柱石)이요 사류(士流)의 관면(冠冕)이었다.
그리고 정사년에 이르러 올린 하나의 소(疏)로 말하면, 윤기(倫紀)를 일으켜 세우고 정기(正氣)를 수립한 것으로서 그 드높은 기상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찼으나, 비록 일월(日月)과 빛을 다툰다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다 할 것이다.
공이 처음 벼슬길에 나섰을 때 언젠가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 이때 문성공이 국기(國器)임을 알아보고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시골로 돌아갈 생각을 갖고 있으니, 그대는 석담(石潭)으로 나를 한번 찾아오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는 당시에 문성공이 바야흐로 전조(銓曹)를 책임지고 있으면서 공을 중용(重用)하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었다.
그런데 공이 형적(形跡)에 혐의를 느낀 나머지 자주 함장(函丈 스승)에게 인사를 드리지 못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성공이 하세(下世)하였으므로 공이 종신토록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만년에 접어들어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장구(章句)나 도수(度數) 같은 데에 세심하게 관심을 쏟는 대신 독자적으로 본원(本源)에 계합(契合)하려고 노력하였다. 언젠가 공이 지은 《함양명(涵養銘)》을 보면 사의(詞意)가 범속(凡俗)한 경지를 멀리 뛰어넘으면서 자득(自得)한 지취(志趣)를 느끼게끔 하고 있다.
이 밖에 또 공은 치욕(恥辱), 서상(書床), 양야(養夜), 계주(戒晝), 경석(警夕) 등 5잠(箴)을 지어 자신을 성찰하는 자료로 삼기도 하였다.
공의 문장에는 기위(奇偉)한 기운이 흘러넘쳤는데 호방하고 준걸스러우면서도 언제나 대도(大道)에 입각하는 자세를 보여 주었다. 필적 또한 호탕한 가운데 법도가 갖추어져 있었다. 젊어서 단청(丹靑 회화)의 경지에 눈을 떠 오묘한 운치를 느끼게 하는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이윽고 손을 떼고 다시는 그일을 하지 않았다.
공의 저술로는 시문집(詩文集) 몇 권과 《조천창수록(朝天唱酬錄)》 1권과 《주의(奏議)》 2권과 《계사(啓辭)》 2권과 《예경(禮經)》의 중요한 내용을 분류해서 편집한 《사례훈몽(四禮訓蒙)》 몇 권과 《좌씨전(左氏傳)》 및 《내외전(內外傳)》을 비교 검토한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공이 죽자 광해 역시 슬픔을 감추지 못하면서 공의 관작을 원상으로 회복시키도록 명하였다. 그러다가 금상(今上)께서 즉위하고 나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제사를 올리도록 명하였다. 아, 하늘이 만약 공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어 오늘날과 같은 성대한 시대를 만나게 하였더라면, 중흥을 이루도록 보좌한 그 빛나는 공렬(功烈)을 어찌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공의 별호(別號)는 필운(弼雲)이요, 만년에 들어서는 백사(白沙)로 일컬어졌다. 그리고 견책을 받고 야외(野外)에서 거할 때에도 또 동강(東岡)이라고 칭하였다.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권씨(權氏)와의 사이에 성남(星男), 정남(井男) 등 두 아들을 두었고, 측실 소생으로 규남(奎男), 기남(箕男)의 두 아들이 있다.
내가 그윽히 생각건대, 공의 아름다운 덕업(德業)과 상세한 이력(履歷)은 국사(國史)에 기재되어 있는 동시에 만인의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헛된 말로 거양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에 삼가 잘 알려진 사실만을 뽑아 이상과 같이 찬술하면서 지언군자(知言君子)가 채택해 주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제15권
[각주]
[주-01]도적이---죽였는데 : 전 참판 유희서의 첩이 미인이라는 말을 듣고, 선조의 장자인 임해군(臨海君)이 그 첩을 비밀리에,불러들인 후 도적을 시켜 유희서를 암살하였다 한다. 《燃黎室記述 卷18 盜殺柳煕緖條》
[주-02]우순(虞舜)은---만났습니다 :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나오는 말이다.
[주-03]순을---하였으니 : 순에게 우물을 파게 한 뒤 흙을 덮어 버리고, 창고 위에 올라가게 한 뒤 사다리를 치워 버리고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나온다.
[주-04]호읍(號泣)하고---않았으니 :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오는 말이다.
[주-05]급(伋)의---무엇하겠습니까 : 선조(先祖)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는 엄연히 광해(光海)의 어미가 되는데, 폐위시키는 일을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급(伋)은 자사(子思)의 이름이고 백(白)은 자사의 아들인데 “나의 아내가 된 사람은 내 아들의 어미가 되고, 내 아내가 아닌 사람은 내 아들의 어미가 아니다.[爲伋也妻者 是爲白也母 不爲伋也妻者 是不爲白也母]”라는 자사의 말이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온다.
'■ 경주이씨 > 행장. 시장. ' 카테고리의 다른 글
秋溪 李圭植 行狀 - 익재공후 소경공파 (0) | 2010.05.08 |
---|---|
임이재 이석후 행장(臨履齋 李錫垕 行狀) (0) | 2010.02.24 |
贈 議政府左贊成 行 刑曹參判 李公 世弼 諡狀. (0) | 2009.04.25 |
이조판서 춘전 이경휘 시장(吏曹判書 春田 李慶徽 諡狀) (0) | 2009.04.25 |
좌참찬 이공(左參贊 李公 夢亮)의 시호(諡號)를 청한 행장(行狀) (0) | 2009.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