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용재 이종준선생 묘갈명 병서 - 월성군파

야촌(1) 2010. 7. 3. 23:52

 [생졸년]  1627(인조 5)∼1704(숙종 30)

 

용재 선생 묘갈명 병서

(慵齋 先生 墓碣銘 幷序)

 

갈암 이현일 찬(葛庵 李玄逸 撰

 

공은 휘(諱)가 종준(宗準)이고 자는 중균(仲勻)이며, 일찍이 자호를 용재(慵齋)라 하였다.

그 선조(先祖)는 월성(月城) 사람인데 후에 영가(永嘉)의 금계리(金溪里)로 이주하였다.

성화(成化) 정유년(1477, 성종 8)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병오년(1486)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교리에 이르렀다.

 

공은 젊어서 우뚝한 기개가 있었고, 시문은 청건(淸健)하여 격력(格力)이 있었으며, 또 서화(書畫)에 능하여 중국 사람이 칭찬할 정도였다.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김선생(金先生, 金宗直)을 사사(師事)하였고, 또 일두(一蠹) 정선생(鄭先生, 鄭汝昌), 한훤당(寒暄堂) 김선생(金宏弼) 및 탁영(濯纓) 김공(金公, 金馹孫), 추강(秋江) 남공(南公, 南孝溫)과 도의(道義)의 벗이 되었다.

 

그리하여 경연(經筵)에서 학문으로 임금을 보필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연산군(燕山君)에게 죄를 받아서 죽으니, 홍치(弘治) 무오년(1498, 연산군 4)이었다. 중묘(中廟) 때 화를 당했던 이들이 모두 복관(復官)되었는데, 유독 공만은 후사(後嗣)가 없어 복관을 청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조(仁祖) 무자년(1648, 인조 26)에 영가의 인사들이 비로소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으며, 금상(今上) 기사년(1689, 숙종 15)에 또 조정에 복관을 청하여 부제학의 증직이 내렸다. 장차 묘비를 세우고자 현일(玄逸)에게 명을 짓게 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빼어난 자질에 문장을 갖춰 백설처럼 환한 풍모 / 質秀而文皎白雪

좋은 사우의 도움을 얻어 학식이 나날이 향상됐지 / 獲師友資邁厥識

 

경연에서 논사하여 임금을 잘 보필하였으며 / 經幄論思補袞闕

한 번 중국에 사행 가자 삼절의 명성 자자했네 / 一行觀周籍三絶

 

좋지 못한 시운을 만나 큰 화란이 일어났으나 / 逢時不祥禍熸烈

밝은 세상이 다시 와서 누명을 벗을 수 있었지 / 皓天有復事著白

 

저 우뚝한 외루에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 鬱彼畏壘載尸祝

성상께서 감동하여 또 증직을 내리셨으니 / 有感宸衷又追秩

 

내 그 사적을 모아서 비석에 새기노라 / 我最其蹟鑱墓石

 

[찬인소개]

선생은 1627(인조 5)∼1704(숙종 30)의.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 아버지는 참봉 시명(時明)이고, 어머니는 안동 장씨(安東張氏)로 흥효(興孝)의 딸이다. 휘일(徽逸)의 아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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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慵齋先生墓碣銘 幷序)

 

갈암 이현일 찬(葛庵 李玄逸 撰)

 

公諱宗準。字仲匀。嘗自號慵齋。其先月城人。後徙居永嘉之金溪里。成化丁酉。擧進士。丙午。登第。官至弘文館校理。公少。倜儻負氣。爲詩文。淸健有格力。又能工書畫。中國人稱之。嘗師事佔畢齋金先生。又與一蠹鄭先生,寒暄金先生及濯纓金公,秋江南公。結道義交。其在經幄。補益弘多。得罪燕山。死弘治戊午。中廟時。諸被禍者得復官。獨公未蒙恩典。仁祖戊子。永嘉人士。始立廟享之。今上已已。又請於朝。贈副提學。且將立石表其墓。俾玄逸爲之銘。銘曰。

 

質秀而文皎白雪。獲師友資邁厥識。經幄論思補衮闕。一行觀周籍三絶。逢時不幸禍熸烈。皓天有復事著白。鬱彼畏壘載尸祝。有感宸衷又追秩。我最其蹟鑱墓石。


[자료]

◈慵齋先生遺稿

◈용재 이종준(李宗準) 선생의 계대

21世 월성군 지수(之秀)→22世 貞烈公 규(揆)→13世 원림(元林)→ 24世 判書公 만실(蔓實)

→25世 大司憲公 승직(繩直) →26世 生員公 시민((時敏)→27世 용재공(慵齋公) 종준(宗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