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준 생졸년] 1454년(세조 元年)∼1499년(연산군 5).
■ 용재 이공 묘석 음기(慵齋李公墓石陰記〕
27世 월성군파(月城君派)
홍여하(洪汝河) 찬(撰)
공의 휘는 종준(宗準)이고, 자는 중균(仲匀)이며, 호는 용재(慵齋)이고, 경주 이 씨로 대대로 안동(安東) 금계리(金溪里)에 살았다. 아버지 시민(時敏)은 생원이었고, 조부는 대사헌 승직(繩直)이다.
증조부는 대호군(大護軍) 만실(蔓實)로 성화(成化) 정유년(1477년 : 성종 8)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을사년(1485년, 성종 16)에 문과에 입격했다.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ㆍ수헌 권오복(睡軒 權五福)과 우의가 도타웠고 이름과 절개로 서로 격려했으며 지낸 벼슬 또한 대개 서로 비슷했다.
공은 흉금이 깨끗하여 사람들이 바라보기를 마치 신선가운데 있는 사람인 듯 했다. 짓는 문장은 웅대하면서도 고고(高古) 하였고 서화(書畵)는 모두 절묘했다.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었다.
문소(聞韶 = 경북 의성의 옛 지명) 현감으로 나가자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얻었으며, 아무렇게나 쓴 소첩(訴牒) 하나도 갈무리하여 대대로 전하는 보물로 삼았다. 연산군 조에 김일손ㆍ권오복의 사사(史事)에 연좌되어 북방으로 귀양 갔다가 나환(拿還) 되어 장차 무거운 형벌에 처해지려 했다. 우리선조 문광공(文匡公)이 상소를 올려 구하려 했지만 임금은 끝내 듣지 않았다.
그때가 홍치(弘治) 무오년(1498년, 연산군 4)이며, 170여 년 뒤에 금계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공을 제사지냈다. 신해년(1671년, 현종 12) 고을사람 김계광(金啓光)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하여 돌을 다듬어 묘도(墓道)를 세우려고 나에게 명문을 부탁했다.
나는 생각하건대, 연산군은 잔악하고 흉포하여 이름난 선비들을 죽인 것이 짐짓 백여 명이었으며, 우리 문광공도 감히 구하지 못하였다. 나아가 공을 구하기 위해 간절한 말을 아뢰고 충성을 바치다가 차라리 함께 죽을지언정 이를 달게 여겼으니, 사대부들이 지금도 이야기 하는 일이다.
나는 문광공의 후손으로 공의 묘지를 기록함에 감히 졸렬하다고 사양할 수 있으랴. 이것으로 명(銘)을 짓는다.
[주기]
1) 김일손(金馹孫) : 1464~1498.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ㆍ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며, 무오사화 때 처형되었다.
2) 권오복(權五福) : 1467~1498. 본관은 예천, 자는 향지(嚮之), 호는 수헌(睡軒)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며, 무오
사화 때 처형되었다.
3) 문광공(文匡公) : 시호가 문광인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을 가리킨다.
4) 김계광(金啓光) : 1621년(광해군 13)~1675년(숙종 1) 때인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그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
는 경겸(景謙), 호는 구재(鳩齋)이다. 저서로는 《구재문집》 4권이 있다.
[참고문헌]
□ 목재집 제7권 >갈명(碣銘)
목재집(木齋集)은 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의 문집(文集)이다.
○홍여하(洪汝河) 1620년~1674년 때인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백원(百源), 응도(應圖), 호는 산택재(山澤
齋), 목재(木齋), 대박산인(大朴山人)이고 본관은 부계(缶溪)이다.
찬인은 용재공이 시서화(詩書畵)에 대한 재주와 김일손(金馹孫,1464~1498).·권오복(權五福,1467~1498)과 매우 친하게 지낸 일과 김일손· 권오복의 사사(史事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국문당할 때 자신의 선조 문광공(文匡公) 홍귀달(洪貴達,1438~1504)이 구하려 했다는 일을 적고 풍기군수(豊基郡守) 김계광(金啓光,1621~1675)이 묘도(墓道)를 만들면서 명(銘)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여 쓴다고 적었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전재동 (역) | 2014
[原文]
慵齋李先生墓石陰記(용재이선생묘석음기)
洪汝河 撰
公諱宗準。字仲匀。號慵齋。月城李氏。世居安東金溪里。父。生員時敏。祖。大司憲繩直。曾祖。大護軍蔓實。中成化丁酉進士。乙巳文科。與金濯纓馹孫,權睡軒五 福友善。以名節相激勵。歷仕亦大抵相同。公襟韻灑落。望之如神仙中人。爲文章。卓偉高古。書畫俱妙絶。嘗赴燕京。出宰聞韶。人得其揮灑之跡。至於訴牒胡題。藏襲珍之。喬桐朝。坐金權史事。北竄拿還。將置重▒。吾先祖文匡公上書救解。主竟不聽。時弘治戊午歲也。後百七十餘年。金溪人立祠俎豆公。歲辛亥。金啓光守豐基郡。爲礱石樹墓道。索余銘。余惟喬桐主方肆虐酗怒。名流被戮者。動以百數。吾文匡莫之敢救。銳爲救公。陳懇獻忠。寧同死是甘。士大夫至今談之。余文匡裔孫也。其於識公之墓。敢辭拙文。是爲銘。
자료 : 용재유고(慵齋遺稿) > 慵齋先生遺稿 > 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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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慵齋) 선생 이공(李公) 묘갈명 – 갈암 이현일
공은 휘가 종준(宗準)이고 자는 중균(仲勻)이며, 일찍이 자호를 용재(慵齋)라 하였다. 그 선조(先祖)는 월성(月城) 사람인데 후에 영가(永嘉)의 금계리(金溪里)로 이주하였다. 성화(成化) 정유년(1477, 성종 8)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병오년(1486)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교리에 이르렀다.
공은 젊어서 우뚝한 기개가 있었고, 시문은 청건(淸健)하여 격력(格力)이 있었으며, 또 서화(書畫)에 능하여 중국 사람이 칭찬할 정도였다.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김선생[김종직(金宗直)]을 사사(師事)하였고, 또 일두(一蠹) 정선생[정여창(鄭汝昌)], 한훤당(寒暄堂) 김선생[김굉필(金宏弼)] 및 탁영(濯纓) 김공[김일손(金馹孫)], 추강(秋江) 남공[남효온(南孝溫)]과 도의(道義)의 벗이 되었다.
그리하여 경연(經筵)에서 학문으로 임금을 보필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연산군(燕山君)에게 죄를 받아서 죽으니, 홍치(弘治) 무오년(1498, 연산군 4)이었다.
중묘(中廟)때, 화를 당했던 이들이 모두 복관(復官)되었는데 유독 공만은 후사(後嗣)가 없어 복관을 청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조(仁祖) 무자년(1648, 인조 26)에 영가의 인사들이 비로소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으며, 금상(今上) 기사년(1689, 숙종 15)에 또 조정에 복관을 청하여 부제학의 증직이 내렸다. 장차 묘비를 세우고자 현일(玄逸)에게 명을 짓게 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빼어난 자질에 문장을 갖춰 백설처럼 환한 풍모 / 質秀而文皎白雪
좋은 사우의 도움을 얻어 학식이 나날이 향상됐지 / 獲師友資邁厥識
경연에서 논사하여 임금을 잘 보필하였으며 / 經幄論思補袞闕
한 번 중국에 사행 가자 삼절의 명성 자자했네 / 一行觀周籍三絶
좋지 못한 시운을 만나 큰 화란이 일어났으나 / 逢時不祥禍熸烈
밝은 세상이 다시 와서 누명을 벗을 수 있었지 / 皓天有復事著白
저 우뚝한 외루에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 鬱彼畏壘載尸祝
성상께서 감동하여 또 증직을 내리셨으니 / 有感宸衷又追秩
내 그 사적을 모아서 비석에 새기노라 / 我最其蹟鑱墓石
[原文]
慵齋先生李公墓碣銘
公諱宗準。字仲匀。嘗自號慵齋。其先月城人。後徙居永嘉之金溪里。成化丁酉。擧進士。丙午登第。官至弘文館校理。公少倜儻負氣。爲詩文。淸健有格力。又能工書畫。中國人稱之。嘗師事佔畢齋金先生。又與一蠹鄭先生,寒暄金先生及濯纓金公,秋江南公。結道義交。其在經幄。補益弘多。得罪燕山死。弘治戊午中廟時。諸被禍者。皆得復官。獨公無嗣。未有爲之請者。仁祖戊子。永嘉人士始立廟享之。今上己巳。又請於朝。贈副提學。且將立石表其墓。俾玄逸爲之銘。銘曰。
質秀而文。皎白雪。獲師友資邁厥識。經幄論思補衮闕。一行觀周籍三絶。逢時不祥禍熸烈。皓天有復事著白。鬱彼畏壘載尸祝。有感宸衷又追秩。我最其蹟鑱墓石。
갈암집 > 葛庵先生文集卷之二十四 > 墓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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慵齋李先生行狀 - 임여재 류규[柳 (氵+奎)]
慵齋李先生。旣奉安于鏡光書院。後幾年。豎碣于先生之墓前。先生八代孫學慶。袖遺蹟踵門而言曰。先祖節行。特蒙文忠公先生撰出戊午黨籍。以行於世。狀本則學慶從先祖訥齋公所草。而拘於時諱。不能詳具世德。且世代綿邈。蠧食字畫。不成完編。敢請追補而刪潤之。以續先先生撰錄之遺意。不佞誠老病不敢當。而但世契則固然。敢不勉焉。謹依本狀。略加櫽括如左。先生姓李氏諱宗準字仲均。自號莊六堂。又稱慵齋。新羅佐命大臣謁平之後。至麗季有曰之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是生揆官四宰謚貞烈。是生元林。入我朝判司僕寺事。是生蔓實吏曹判書。於先生爲曾祖也。祖諱繩直進士。筮仕于世宗朝。行楊州牧慶尙道觀察使。以大司憲終。淸白見重於朝。考諱時敏。俱中生進。以文章節行。負一世重望。延及金相國宗瑞之禍。被禁錮。歸老金溪。敎授生徒。多至成就。號琴湖。鄕人方議尸祝之禮。妣永嘉權氏。縣監啓經之女也。先生生于永嘉之金溪村。幼而岐嶷。五歲屬文。七歲讀書通大義。生員公以詩戒之曰一飯都忘歲月輕。豈知斯世樹風聲。空身雖向窓前坐。逸意應馳野外行。先生雖在妙齡。常莊誦此詩。益勉課業。十歲言于生員公曰。經書皆是聖贒傳授文字。而或出於門人之記。至於易經則文王周公孔子三聖之手書。此眞聖人書。學者最當尊重者也。生員公聞而大奇之。手植一株銀杏於大廳之前。生員公曰此夫子講學之樹也。他日當與盛德君子。講習於此樹下。對曰東方亦有聖人乎。生員公曰行聖人之道。皆可爲聖人徒。况我東箕子遺風。至今流傳。豈可無贒人君子也。十三歲文章已成。筆法蒼古。欲赴鄕解。生員公以學業未成不許。嘗遊學于京中。生員公慮其才勝。每以書戒之。其第二書略曰汝之遊學。非豪俠輩可比。謹言行戒酒色無慢遊。無友放浪人。吾之先世。爲朝家名臣。及余之身。不幸坎軻。余則已矣。積善之久。豈無餘慶。汝兄不學無才。汝弟亦不好學。吾之所望者汝。汝亦學而不誠。不誠則無實。吾所謂實者。德行之謂也。非才華也。苟無其行。雖有七步之才。何足取焉。先生佩服此訓。雖微言細行。不敢不謹。癸巳丁生員公喪。哀毁過禮。服闋後以慈夫人命。入山讀書。同里裴公裀隨而課讀。志倦神疲。則裴掩卷而息。先生終宵不輟。如是數月。精力如初。裴曰君以血氣之身。勤苦過人。乃能若是耶。先生曰至樂在此。有何疲倦也。每月朔。歸覲夫人。課誦一月所讀於夫人之前。無一字訛漏。然後夫人供別饌而給之。丁酉中司馬試。寓居于京城。一日與南秋江孝溫乘月而遊於杏花坊。權景裕君饒見其儀容淸秀。邀而虛座曰子非塵埃中人。眞所謂仙鶴在人間也。君饒先唱四韻。先生應口而對。故爲出塵之態。君饒大驚曰人言赤壁賦。無烟火之氣。子之詩韻。過於蘇賦。仍勸一盃酒。先生欲起去。君饒挽手止之。閉戶張燭。終宵吟咏。朝日視之。則乃東門外寓居進士李某也。大笑而罷。自後爲莫逆之交。每與秋江語及莊陵往事。未嘗不歔唏流涕。丙午登第。丁未以正字遷吏郞。是年秋。日本使來聘。上以關防甚重。且彼國使有文才。命極擇護送使。銓曹以先生應旨。先生奉命至東萊。倭使得先生書畫。拜受曰始得天下重寶。冬又受平安評事之命。至祥原郡。題三笑圖。詩在集中。後南秋江過此大驚曰。此必吾友手段也。戊申除弘文校理。選湖堂賜暇讀書。上幸環翠亭。先生應製居首。聲名籍甚。無爭鋒者。時論爲第一淸望。比之登瀛。尋拜正言。是時愼守勤始登淸顯。先生以外戚得權之漸。力諫其不可。直聲振朝廷。壬子拜副修撰。陳疏歸覲。癸丑以撿詳陞舍人。又以書狀官赴燕。見館驛畫屛不佳。以筆塗抹殆盡。驛官招通事怪詰之。通使曰書狀能書畫。必以不滿其意而然也。驛官首肯之。回程至其處。張新糚素屛二座。先生一書一畫。俱盡其妙。觀者歎賞。又以詩律鳴於皇城。後華使至而傳誦。甲寅除義城縣令。慈夫人時尙康寧。以居官愛民之意。作五言詩四十韻與之。先生拜受誦之。權睡軒以詩餞之曰聲名少小聳南斗。儒雅風流是謫仙。昵幄望隆通籍早。分符命下許城專。鄕閭三物成周化。烟火千家續漢循。俗吏紛紛徒爾耳。應歌來暮頌斯人。下車之初。見校宮之頹廢。擇地而移建。出俸祿以助工役。宏敞規模。招集境內之有儒望者。敎授鄕子弟。誦詩習禮。一如古法。絃誦常聞。時人以聞韶比武城。作竹樓於客館之南。爲公退休息之所。作記揭之。一時文士傳誦。至於訴帖揮灑筆跡。邑人皆珍而藏之。戊午棄官歸鄕里。是時柳子光,李克墩輩搆誣淸流。禍在朝夕。先生怡然自樂。不以爲憂。與李忘軒胄圍棊於杏亭。外人傳言紅衣官人一隊直入洞壑。左右請輟棊。先生徐曰未聞拿命則猶是閒散。對局如初。俄而金吾郞果至。先生曰老母在。願與之訣。金吾郞惻然而許之。拜辭慈夫人。夫人引范滂事諭之曰汝得其死。我何悲爲。汝往善死善死。無以我爲念。與忘軒同席被拿。及就鞫之日。不變神色。以手畫地作一字如長杠。無一言。有一奴能解文字。同被鞫。亦畫地無言。及定罪之日。決杖八十流北界。路經高山驛。書孤忠自許衆不與一律于壁上而去。監司以聞。喬桐主以爲有怨意。逮鞫殺之。時朝廷危懼。無敢言者。獨洪虛白貴達上書救解不得。被刑之日。顔色與平日無異。但勵聲曰首陽邈矣。埋我無地。聞者爲之墮淚。返葬于金溪之莎芒洞艮坐原。先生容貌端雅。如淸水芙蓉。志操瀅潔。如冰壺秋月。爲文發越。信筆滔滔。直與漢唐之文。同一體格。詩亦優游不迫。出於性情。有古詩人之風韻。至於書畫醫藥卜筮。無不精巧。嘗師事佔畢齋金先生。先生器之曰自見李某。胷襟灑落。與金寒暄,鄭一蠧兩先生。爲道義交。又與金濯纓,南秋江諸贒友善。秋江最敬重焉。茂豐副正一見而奇之曰公我東之詩仙也。自幼少時。無疾言遽色。雖在倉猝。未嘗失措。其經幄講論。一遵河南夫子。霜臺直言。無愧漢朝長孺。倜儻淸議。便是海東魯連。惜乎。其嘉言美行。雄詞健筆。不傳於世。以史禍家故也。中廟朝。昭雪復官。肅廟因儒疏贈弘文館副提學。夫人永嘉權氏。進士綽之女。不育。以弟公準第三子德淵爲嗣參奉。德淵生三男二女。長允恭次允儉皆參奉。次允讓進士。權景診直長,權銘其壻也。允恭生二男。曰煥曰燁。允儉生一男民覺號三隱。煥生復昌。燁生再昌。民覺生三男。長尙堉次尙墩次尙堧。尙堧生三男震英,章英,最英。震英有五子時華,元華,益華,復華,春華。最英有三子天華,箕華,盛華。復華系子東楫。謁余修狀者學慶。卽其子也。餘不盡錄。嗚呼。天生英偉特出之才。不能平步亨衢。大展蘊抱。而卒罹讒慝之口。不免一時屠戮之禍何哉。幸而天轉地旋。䨓雨發解。雪冤贈爵。澤漏泉壤。而至於先生父子則秉彝公議。百世不泯。先生享於鏡院。訥齋享於柰城之柏社。近又士論齊發。擬奉琴湖公於河丹溪彰烈之祠。於是乎天道昭然。人心爲之一快。斯可以少慰百世慈孫之心也夫。學慶行雅飭。篤於先。可知爲名家後裔。旣去復來。誠懇動人。烏敢辭。撥開昏耄。收拾精神。略具系德。以塞其求。兼以寓余高山景行之思云爾。<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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