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시대
■ 혜비이씨(惠妃李氏)
◇ 31代 공민왕 후궁.
◇생졸년 : ?~1408년(태종 8) 음력 2월 3일
혜비이씨(惠妃李氏)는 계림인(鷄林人)이니 부원군(府院君)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의 여섯째 딸이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아들이 없으매 재상(宰相)들이 명가(名家)의 딸로써 자식 둘 자를 들이도록 청하니 이에 뽑아 들여서 혜비(惠妃)로 봉(封)하였다.
홍륜(洪倫)과 한안(韓安)이 여러 비(妃)를 강제로 욕(辱)보일 때에 비(妃)는 거절하여 따르지 않았고, 공민왕(恭愍王)이 이미 시해(弑害) 당하매 머리를 깎고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
2. 조선시대
■ 숙원이씨(淑媛李氏 墓).
◇11代 중종의 후궁.
◇묘의 소재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 산17-1
숙원이씨(淑媛李氏, ?~1524)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사섬시 첨정(司瞻寺 僉正)를 지낸 형신(亨臣)의 딸이다. 중종(中宗)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 덕양군(德陽君) 이기(李岐:1524-1581)를 낳았으나 산후 닷새 만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숙의 김씨 손에서 자랐다.
덕양군(德陽君)은 중종은 물론 인종· 명종과도 우애가 깊었으며 선조도 대접이 극진했다.
종친부 종부시에 종사하고 문소전· 연은전 양전의 일을 보았다.
덕양군(德陽君)은 성격이 어질고 겸손하였으며, 음악에도 해박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 친구들과 자연 속에서 사냥과 낚시로 지내다가 1581년(선조 14) 6월 22일 향수 57세로 별세하였다. 시호는 정희(靖僖)이며,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궁내동 동남현 둔덕에 부인과 합장되어 있다. 또 묘소 아래 궁내동 366번지에는 덕양군의 사당 정희사(靖僖祠)가 자리 잡고 있다.
부인은 호조 판서 권찬(權纘)의 딸로서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으로 봉해졌으며 현록대부 풍산군(豊山君) 종린(宗麟)을 낳았다. 그 외의 소생으로 풍성군(豊城君) 희린(希麟), 풍천도정(豊川都正) 명린(命麟), 풍해수(豊海守) 계린(季麟)이 있다.
● 중종은 2명의 계비와 6명의 후궁에게서 모두 9남 11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은 인종대왕으로 장경왕후 윤씨 소생이다.
둘째 아들은 명종대왕으로 문정왕후 소생이다.
후궁 소생으로 7남이 있는데,
◇1남은 복성군(福城君) 미(嵋)로 경빈 박씨 소생이다.
◇2남은 해안군(海安君) 희인데 1511년(중종 6) 6월 15일에 출생하였으며, 숙의 홍씨 소생이다.
◇3남은 금원군(錦原君) 영으로 희빈 남양 홍씨 소생이다.
◇4남은 영양군(永陽君) 거(?)로 창빈 안산 안씨 소생이다.
◇5남은 덕양군(德陽君) 기(岐)인데 숙원(淑媛) 경주 이씨 소생이다.
■ 안빈 이씨(安嬪 李氏)
◇제17대 효종의 빈(嬪)》
◇사적 제366호(1991. 10월. 25)
◇면적 : 1,983㎡
◇묘의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471~1
안빈 경주이씨(安嬪 慶州李氏, 1622~1693)는 1622년(광해군 14) 9월에 공조참의 응헌(應憲)의 딸로 태어나 효종의 후궁이 되었으며, 병자호란 후 1637년(인조 15) 봉림대군이 청나라의 심양(瀋陽)에 볼모로 끌려갈 때 배종(陪從)하여 갔다가 1645년(인조 23) 귀국하여 효종과의 사이에 숙녕옹주(淑寧翁主, 1649~1668)를 두었다.
16661년(효종 2) 10월 20일(병인) 효종은 후궁 이씨를 숙의(淑義)로 삼았고, 1686년(숙종 12) 5월 27일(경술) 숙종(肅宗)은 안빈이씨(安嬪李氏)가 심양에서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 효종을 8년 시종하면서 충성을 다 바친 일로, 그를 귀인(貴人)에서 안빈(安嬪)으로 승격하였으며, 1693년(숙종 19) 10월 23일 72세로 서거 하자 조천(祧遷)하지 말도록 명하고서, 이후로 왕실에서 계속 제사지냈다.
묘의 시설로는 봉분(封墳)․ 곡장(曲牆)․ 묘표(墓表).혼유석(魂遊石)․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이 있고, 장명등 좌우에 키가 작은 동자석(童子石)이 있다. 묘표의 앞면에 「조선국안빈경주이씨묘표(朝鮮國安嬪慶州李氏墓表)」라 새겨져 있고 후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다.
● 안빈이씨(安嬪 李氏)에 관한 일화
효종의 부마(駙馬 : 임금의 사위)였던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의 저술(著述)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 이런 일
화의 기록이 있다.
안빈이씨(安嬪 李氏)가 자신의 소생인 숙녕옹주(淑寧翁主)에게 “너”라고 하대하여 칭했다가 효종의 극노에 인선왕후의 간청에 의하여 용서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낳은 자식도 당시엔 왕자 왕녀가 모두 중전의 소생이 되는 것이 궁중의 법도이니 후궁살이가 사대부가 첩실살이 만큼이나 서러움이 만치 않았을까 여겨진다.
● 효종조 후궁 안빈의 제사문제로 제수로 쓸 쌀과 돈, 집을 주도록 하다.
[승정원 일기 정조 20년 병진(1796 가경 1) 8월 9일(신사)]
예조판서 민종현이 아뢰기를
「효종조 후궁 안빈(安嬪)에게 딸 한사람이 있었는데, 곧 금평위(錦平尉) 옹주입니다.
지난 정축년(1637)에 안빈(安嬪)은 심양((瀋陽)에 까지 모시고 가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서 10년 동안 섬겼으니 수고로움이 매우 많았습니다.
숙종 조에 이르러 부조(不祧)의 은전을 내리도록 특별히 명을 내렸는데, 숙년옹주(淑寧翁主)가 박씨 가문의 맏며느리여서 별립(別立)하기 어려워 안빈의 묘에 대해 드디어 그 사위인 이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빈(嬪)의 제사를 봉안하게 하여 여러 대 동안 그대로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씨 집안이 지금 매우 잔약해져 제사를 장차 폐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지금 만약 제사를 주관할 곳을 금평위의 자손에게로 고쳐 정한다면 예의 뜻이나 일의 형편으로 볼 때 두 가지 다 편한 것이 될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금평위의 집안으로 다시 붙이는 것이 예의 뜻으로 볼 때에는 그러하다. 그런데 그 사실을 듣건데, 안빈(安嬪)에게는 숙녕옹주 한분 밖에 없는데, 옹주의 딸이 이수철(李秀喆)의 처가 되었다고 한다.
안빈(安嬪)이 장수를 누려 숙종 조에 까지 이르렀는데, 그때 그 자신의 후사(後事)를 묻자 안빈이 “금평위의 집안에다 의탁하고 싶으나 그 집안이 대종(大宗)이어서 일의 형세가 편치 않으니, 금평위의 외손에게 제사를 맡기도록 명하소서”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이수철(李秀喆)의 집안에 명하여 안빈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이어 부조의 은전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그 집안의 절수전토(折受田土)가 대진(代盡)한 궁결(宮結)로서 세금을 거두는 데로 들어가게 되어 제사를 계속 이어가기 어렵다고 하니, 듣기에 매우 불쌍하다.
제수(祭需)는 매년 해조로 하여금 쌀과 돈을 헤아려 지급해 주고 또한 집을 사서 주도록 하라」하였다.
■ 귀인이씨(貴人李氏, 1847~1914]/ 《조선 제26代 고종의 후궁》
이원태의 女 생 1남 1녀(어릴 때 모두 사망) 상궁→숙원→귀인
당호(堂號)는 내안당(內安堂)이다. 1847년(헌종 13) 8월에 출생하였다. 궁인(宮人) 신분에서 1900년(고종 37) 소의(昭儀: 정2품의 품계를 가진 내명부)로 책봉되었으며 1906년(고종 43) 귀인(貴人: 종1품의 품계를 가진 내명부)으로 책봉되었다.
고종과의 사이에서 한 명의 왕자 이육(李堉)과 두 명의 옹주를 두었으나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1914년 1월에 사망하였으며 사적 제200호인 서삼릉(西三陵)에 마련된 후궁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