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에겐 다른 길이 없었다.
[기고]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
2010년 5월 25일(화요일) L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red1917@empas.com)
세월이 속절없이 빨라서 노무현 대통령의 1주기가 막 지났다. 시간의 자오선을 거슬러 올라 1년 전으로 돌아간다고 가정해 보자. 노무현에게 자살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별로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이야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상당수가 그의 죽음을 사무치게 애통해하고 분해하고 억울해하지만, 노무현의 사망 직전을 회고해 보면 노무현은 고아(孤兒)와 다르지 않은 처지였다. 까닭 모를 증오와 정치적 셈법으로 노무현을 파렴치범으로 만든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 검찰, 조중동 등의 과점신문이 노무현과 노무현 일가, 노무현의 측근들에게 가했던 법적, 윤리적 매질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야비하고 가혹한 것이었다.
검‧언 복합체가 설정한 프레임에 포획된 대다수 국민들도 노무현에게 돌을 던지거나 실망과 냉소를 쏟아냈다. 이른바 진보, 개혁 진영이나 진보언론 조차 마치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처럼 노무현이라는 존재를 부인하기에 급급했다. 노무현은 대한민국에서 문자 그대로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앞날을 예측해 봐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노무현 앞에는 대한민국을 움켜쥔 사익추구세력의 조롱과 멸시와 천대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 주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노무현을 호명하여 괴롭히고 모욕할 것이 자명했다.
노무현의 가족들과 측근들 역시 사익추구세력의 희생양 신세를 벗어날 길이 영영 없었다. 완전히 떠나버린 국민들의 마음이 돌아올 리도 만무했다. 결국 노무현에게 주어진 선택은 두 가지 뿐이었다. 욕된 생을 견디느냐 아니면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느냐. 노무현은 후자를 택했다.
그의 유언처럼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랬기에 원망도, 미움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자살(?) 이후에야 국민들은 그의 진심을 알았다. 그에게 쏟아졌던 분노와 미움과 실망이 고스란히 애도와 슬픔으로 변했다.
그 변화의 과정이 너무나 극적이고 갑작스러워서 도리어 당혹스럽고, 노무현에 대한 그리움과 흠모의 마음이 지나치게 절절해 감정의 과잉으로 느껴질 정도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노무현을 조문했던 국민 중 대다수가 노무현이 곤경에 처했을 때 침묵했거나 윤리적 매질에 동참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마음이 스산해진다.
설령 노무현의 죽음이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했을지라도 그의 죽음이후 표변한 민심은 부박(浮薄)하기 그지없고 무엇보다 무섭다. 있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많은것이 바뀌고 변했다.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야권과 친노(親盧)진영은 일패도지 상태에서 벗어나 전열을 정비할 계기를 얻었다. 살아있을 때 진보, 개혁진영의 원심력으로 작용하던 노무현이 죽어서 진보, 개혁진영의 구심력으로 작용하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곧 치러질 지방선거에서 야권이 한나라당과 접전을 벌이고 있는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노무현의 존재감이라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어쩌면 천안함 사태 이후 대한민국에 사납게 몰아치고 있는 반공‧반북이데올로기의 광풍을 야권이 극복하고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는 기적을 이룰 지도 모른다. 또한 훗날 야권이 재집권을 위한 준비-인물, 철학, 정책 등-를 철저히 해서 재집권에 성공하고, 참여정부의 좌절을 반면교사로 삼아 훌륭하게 국정을 운영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진보, 개혁 진영이 연립정부를 구성해 계속 집권에 성공하고 극우정당인 한나라당은 잔존하는 수준으로 전락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고 시민들의 삶은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이라는 자연인의 자살 이후에야 병든 한국사회의 성찰이, 시민들의 각성과 다짐이 본격화됐고 이를 계기로 거대한 변화가 시작됐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정서적 울림을 준다. 일신에 사(私)가 없었던 한 인간의 불꽃같은 삶을 송두리째 삼킨 후 전진하는 역사란 얼마나 냉혹하고 무정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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