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안빈 경주이씨 묘(安嬪 慶州李氏 墓)/조선 제17대 효종의 비

야촌(1) 2010. 5. 19. 23:55

■ 안빈 경주이씨 묘(安嬪 慶州李氏 墓) / 조선 제17대 효종의 빈(嬪).

 

  [사적] 제366호(1991. 10월. 25)

  [면적] 1,983㎡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471~1

 

 

 

 

 

 

 

 

 

 

 

 

 

 

 

 

 

 

 

 

 

 

 

 

 

 

 

 

 

■ 안빈 경주이씨(安嬪 慶州李氏)는 조선 제17대 효종의 빈(嬪)이다.

   [생졸년] 1622(인조 즉위). 음력 9월 ~ 1693(숙종 19). 음력 10월 23일 /壽72歲

  [아버지] 공조참의 이응헌(李應憲)의 딸 경주이씨이다.

 

안빈 경주이씨(安嬪 慶州李氏)는 1622년(광해군 14) 9월에 공조참의 응헌(應憲)의 딸로 태어나 효종의 후궁이 되었으며, 병자호란 후 1637년(인조 15) 봉림대군이 청나라의 심양(瀋陽)에 볼모로 끌려갈 때 배종(陪從)하여 갔다가 1645년(인조 23) 귀국하여 효종과의 사이에 숙녕옹주「淑寧翁主, 1649(효종 즉위)~1668(숙종 14)」를 두었다.

 

16661년(효종 2) 10월 20일(병인) 효종은 후궁 이씨를 숙의(淑義)로 삼았고, 1686년(숙종 12) 5월 27일(경술) 숙종(肅宗)은 안빈이씨(安李氏)가 심양에서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 효종을 8년 시종하면서 충성을 다 바친 일로, 그를 귀인(貴人)에서 안빈(安嬪)으로 승격하였으며, 1693년(숙종 19) 10월 23일 72세로 서거 하자 조천(祧遷)하지 말도록 명하고서, 이후로 왕실에서 계속 제사지냈다.

 

묘의 시설로는 봉분(封墳)․ 곡장(曲牆)․ 묘표(墓表).혼유석(魂遊石)․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이 있고, 장명등 좌우에 키가 작은 동자석(童子石)이 있다. 묘표의 앞면에 「조선국안빈경주이씨묘표(朝鮮國安嬪慶州李氏墓表)」라 새겨져 있고 후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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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빈이씨(安嬪 李氏)에 관한 일화

 

효종의 부마(駙馬 : 임금의 사위)였던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의 저술(著述)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 이런 일화의 기록이 있다.

 

안빈이씨(安嬪李氏)가 자신의 소생인 숙녕옹주(淑寧翁主)에게 “너”라고 하대하여 칭했다가 효종의 극노에 인선왕후의 간청에 의하여 용서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낳은 자식도 당시엔 왕자 왕녀가 모두 중전의 소생이 되는 것이 궁중의 법도이니 후궁살이가 사대부가의 첩실살이 만큼이나 서러움이 만치 않았을까 여겨진다.

 

●효종조 후궁 안빈의 제사문제로 제수로 쓸 쌀과 돈, 집을 주도록 하다.

  [승정원 일기 정조 20년 병진(1796 가경 1) 8월 9일(신사)]

 

예조판서 민종현「閔鍾顯,1735(영조 11) ~ 1798(정조 22)」이 아뢰기를

"효종조 후궁 안빈(安嬪)에게 딸 한사람이 있었는데, 곧 금평위(錦平尉) 옹주입니다.

지난 정축년(1637)에 안빈(安嬪)은 심양((瀋陽)에 까지 모시고 가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서 10년 동안 섬겼으니 수고로움이 매우 많았습니다.

 

숙종 조에 이르러 부조(不祧)의 은전을 내리도록 특별히 명을 내렸는데, 숙녕옹주(淑寧翁主)가 박씨 가문의 맏며느리여서 별립(別立)하기 어려워 안빈의 묘에 대해 드디어 그 사위인 이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빈(嬪)의 제사를 봉안하게 하여 여러대 동안 그대로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씨집안이 지금 매우 잔약해져 제사를 장차 폐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지금 만약 제사를 주관할 곳을 금평위의 자손에게로 고쳐 정한다면 예의 뜻이나 일의 형편으로 볼 때 두 가지 다 편한 것이 될듯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금평위의 집안으로 다시 붙이는 것이 예의 뜻으로 볼 때에는 그러하다. 그런데 그 사실을 듣건데, 안빈(安嬪)에게는 숙녕옹주 한분 밖에 없는데, 옹주의 딸이 이수철(李秀喆)의 처가 되었다고 한다.

 

안빈(安嬪)이 장수를 누려 숙종 조에 까지 이르렀는데, 그때 그 자신의 후사(後事)를 묻자 안빈이 “금평위의 집안에다 의탁하고 싶으나 그 집안이 대종(大宗)이어서 일의 형세가 편치 않으니, 금평위의 외손에게 제사를 맡기도록 명하소서”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이수철(李秀喆)의 집안에 명하여 안빈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이어 부조의 은전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그 집안의 절수전토(折受田土)가 대진(代盡)한 궁결(宮結)로서 세금을 거두는 데로 들어가게 되어 제사를 계속 이어가기 어렵다고 하니, 듣기에 매우 불쌍하다.

 

제수(祭需)는 매년 해조로 하여금 쌀과 돈을 헤아려 지급해 주고 또한 집을 사서 주도록 하라"하였다.

 

 

효종의 가계도

 

 

 

■ 안빈 경주이씨 가계도

 

제16대 인조                                   공조참의 이응헌(李應憲)

                                                         (경주이씨)

인렬왕후 한씨                                     ㅣ

(부: 서평부원군 한준겸)                   ㅣ

                                                          ㅣ

           ------제 17대 효종------안빈이씨(安嬪 李氏)

                                                          ㅣ

                                                   숙녕옹주(淑寧翁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