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궁,정려,서원

동호정(東湖亭)

야촌(1) 2010. 5. 19. 02:28

↑소재지 : 경남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842번지/사진 출처 >엽토 51

 

↑동호정 - 정면사진 >엽토 51

 

 

 

↑동호정 상량문(東湖亭上樑文)

 

 

 

↑장만리(章萬里). 선생 충효정려각/사진 : 감래킹

 

↑장만리 정려비

 

■ 장만리(章萬里)

    조선 선조때의 학자로 자(字)는 문숙(文叔) 호는 동호(東湖)로 본관(本貫)은 거창이다.

선생은 함양군 서하면 황산마을 태생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왕을 등에 업고 의주에서 신의주까지 피난 하였는데,선조께서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호성공신의 원종 공신에 책록하였으며 고종황제는 1892년 좌승지에 추증하고 충신 정려를 내렸다.

 

훗 날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이 곳에서 심신을 수련하며 때때로 낚시를 즐기던 곳이다.

선생께선 당시 성리학에 정통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던 충의지사로서 후손들이 충성심을 기리기 위하여 이 곳에다 1895년경 정자를 세우고 호를 따서 동호정(東湖亭)이라 하였다.

 

동호정(東湖亭)은 아름다운 수변 경관과 더불어 넓은 강폭에 펼쳐진 ‘차일암’은 보는 이의 마음에 시심(詩心)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어, 예로부터 이 곳에서 많은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으며 도처로부터 찾는 이가 많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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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정기(東湖亭記)


화림(花林)은 산수의 고을이니라. 그 봉우리가 우거지고 숲이 깊으니 황석산(黃石山) 아래 초현(綃峴)마을이 있고 물결이 아름답고 암석(嚴石)이 기이하니 옥녀담(玉女潭) 가운데 차일암(遮日巖)이니라!.

 

나는 일찍 이 고을에 임해서 고적(古蹟)을 상세(詳細)히 듣고 가정(嘉靖) 병자(丙子)년에 동호처사 장만리(東湖處士 章萬里)께서 마을을 복축(卜築)하고 바위에 놀면서 낚시하며 널리 배우고 돈독한 행의로 장차 몸을 마치려 하더니 선조(宣祖) 때, 계미년에 와서 북쪽의 오랑캐가 육진(六鎭)을 노략질 하니 조정(朝庭)에서는 장사(壯士)를 선발하는데 공(公)이 자원하여 전쟁터에 나아가 몸소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여러 차례 기이한 공을 세웠으므로 신묘년(辛卯年)에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제수하고 옮겨서 용사(龍蛇)의 난(亂)을 당하여 임금께서 용만(龍彎)에 피하여 주둔할 때 큰 비가 심하게 쏟아지고 적의 창날이 갑작스레 이르자 공은 임금을 업고 십여리(十餘里)를 달려가서 화(禍)를 면하였도다.

 

계사년 6월에 공(公)의 나이 40에 행재(行在)한 곳에서 돌아가시니 선조(宣祖)께서 가상(嘉尙)히 여겨 증(贈)하기를 영세불망자(永世不忘者)라 하니라. 교지에 성상(聖上)을 따르는 공신이라 하고 금상(今上) 28년(1891년 고종 28)에 통정대부 좌승지(通政大夫左承旨)를 증하고 그 정려(旌閭)를 명하니라.

 

슬프다!

공의 충의는 만부(萬夫)에 특립(特立)했으니

조정에서 가정(家庭)에 은혜를 백세토록 포장(褒章)하니 가히 유감없느니라.

 

공의 손 대규(大奎)와 재헌(載憲) 동헌(東憲) 등이 나에게 기문을 요청하니 나는 보건대 대저 사람이 산수(山水)를 얻어서 산수를 즐기니 사람으로 인하여 차일 암(遮日巖)도 중하게 되었으니 암상(巖上)에 장처사 조대(章處士釣臺)라 각자(刻字)하고 다섯 채의 유적(遺蹟)이 상존(尙存)하니 공이 물을 얻음은 물이 인지(仁智)의 낙(樂)을 아는바 이니라.

 

끼친 터에다 정자를 짓고 조선(祖先)의 아름다운 덕(德)을 찬양하여서 지금부터 후에 차일암(遮日巖)이 사람으로 인하여 산수가 중히 됨을 보임이니라. 나는 이에 느낌이 있어 옛날에 들은 것을 위와 같이 짓고 쓰니라.

상지(上之) 30년(1893년 고종 30) 중하상한(仲夏上澣)에 보국판서 숭록대부 봉조하(輔國判書崇祿大夫奉朝賀) 김재현(金在鉉)은 삼가 기록하다.

 

[原文]

 

東湖亭記


花林山水鄕也其峰巒蔚林壑深邃黃石山峴村也水波明媚巖石奇絶玉女潭中遮日巖也余曾是邑得聞古蹟之詳也在嘉靖丙子東湖處士章萬里卜築于村遊釣于巖傳學篤行若將終身逮宣廟癸未北胡冠六鎭朝庭選壯士公自願赴戰躬冒矢石累立奇功辛卯除箕子殿參奉移定陵合龍蛇之大駕避駐龍彎時値療雨暴注賊鋒猝至公負玉體走十餘里而得免以癸巳六月公年四十而卒于行在所宣祖嘉之時贈以及永世不忘者敎旨策扈聖功臣今上二十八年贈通政大夫左承旨命旌其閭鳴呼公忠義特立萬夫朝家恩褒勸百世可謂無遺憾矣公之孫大奎載憲東憲等追慕其先祖遊賞之意小亭於遮日巖傍要余記之余觀夫人得山水而樂山水因人而重遮日巖上刻章處士釣臺五宇遺蹟跡尙存公之得水水而識仁智之樂者也亭遺址闡揚先懿用口今與後遮日巖之因人得山水之重者也余有感於此因述舊聞 而書之如右云
上之三十三年仲夏上澣輔國判書崇祿大夫奉朝賀
光山金在顯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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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정상량문(東湖亭上樑文)


군자(君子)가 숨어 살 곳을 점(占)할 때에는 먼저 임천(林泉)이 좋은 곳을 택(擇)하고 충신이 절기(節氣)를 세울 때는 반듯이 지주(砥柱)가 굳세어야 함이니 진실로 창건(?建)의 넓은 본받음이 없다면 어찌 출처(出處)의 대의를 칭하리요.

 

그윽히 생각건대 높은 풍채(風彩)와 위열(위열)은 참으로 후인의 능히 선함을 말할 바 아니니라. 품형(稟形)은 강의하고 정직하며 성품은 충효와 이의(理義)의 학(學)을 받아 일찍이 이 마을에 은거(隱居)하면서 스스로 호(號)를 동호(東湖)라 하니 동(東)은 이 해동(海東)이요.

 

호(湖)는 곧 금호(錦湖)니라. 백운산(白雲山)의 동쪽 맥(脈)이 구비 쳐서 형국(形局)을 열었으니 황석산(黃石山)의 남쪽 다리가 구불구불 이어진 모양이 장호암(藏壺岩)과 차일암(遮日巖)이라.

 

사시(四時)에 노닐고 구경하기 알맞고 주대(酒臺)와 금적대(琴笛臺)에는 여러 뭇 손님이 등임(登臨)하니 푸른 이끼 대조(臺釣) 위에 어가(漁歌)를 서로 화답(和答)하고 복사꽃 기슭 아래 술잔이 마주치며 여러 봉우리 끼고 서서 그림의 주렴을 구름밖에 펼쳤으며 급히 흐르는 물 부딪치며 돌아서는 큰 종(鍾)을 석상에 걸쳤으며 부드러운 풀 양지쪽에 미록(美鹿)들과 같이 잠들고 꽃 지는 평림에는 학과 원을 따라 맹서하니 여기서 노닌지 몇 해만에 장차 이 몸을 마치고자 하여 더불어 홀로 선(善)함이 어찌 홍제이윤(弘濟伊尹)이 신야(莘野)에서 밭 갈고 번연이 탕(湯) 임금에게 나아가서 크게 밝았으며 초막(草幕)에서 일어나 드디어 한(漢)나라를 도우사 벼슬에 올라서 만력년(萬曆年)에 같이 원로(鵷鷺)의 반(班)을 따라 정릉(定陵)에 이배(移拜)하여 합하고 돌아서 진사(辰巳)년의 변(變)을 만나 몸에 쇠옷을 입고 능히 천병(千兵)을 물리쳐 임금을 등에 업고 십리를 달렸으니 풍진(風塵)의 한 꿈이 장구(杖屨)의 곳으로 돌아오지 아니하여 일월(日月)의 외로운 충성(忠誠) 잠들지 아니하고 죽백(竹帛)의 이름을 돌에 새겨도 견디어 부스러지지 아니하니 천재(千載)의 후(後)를 말할진대 작설(綽楔)의 전법(典法)이 있어 백세(百世)의 아래에 괴원(槐院)에 품격(品格)을 높이고 임금의 은혜가 전중(腆重)하니 화림별구(花林別區)에 지명(地名)이 더욱 빛나니라.

 

다음에 노닐고 낚시 하던 어느 언덕을 보니 오히려 경시(經始)하는 이 정자(亭子)를 상고하여 진실로 시세(時勢)의 틈을 내지 못함을 인연(因緣)으로 몇 번이나 여정(輿情)의 긴 탄식(歎息)을 일게 했음이랴.

 

자손의 구확(榘矱)이 경년(經年)토록 꾀하지 아니하고 계산(溪山)의 바라고 기다림을 많은 날에 같이 사양(辭讓)하고 또한 따르되 침묵(沈默)하니 하늘이 도우고 땅이 아껴서 감추어둔 밝은 터를 얻으니 귀신(鬼神)이 운수(運輸)하여 거역(巨役)을 이루니 들보, 기둥, 서까래 등 여러 재목(材木)이 각각 그 마땅하고 규구(規矩)와 준승(準繩)의 좋은 공인(工人)이 그 온전한 모양이 높고 아름답도다.

 

봉(鳳)과 용(龍)이 춤을 추는 첨하(簷下)에 나는 듯 이에 가지런히 임하여 이에 오르고 이에 집을 하니 거의 신령(神靈)께서 척강(陟降)하사 이에 이야기 하고 이에 웃는 듯 후인(後人)의 첨앙(瞻仰)하기에 마땅하고 산천의 초목이 다시 살아나 오늘의 정채(精彩)와 풍월연하(風月煙霞)가 모두 옛적의 형승(形勝)을 의지(依支)했고 호수(湖水)의 보기가 달라졌으니 가히 탁영선생(濯纓先生)의 맑은 뜻을 생각함이라.

 

운물(雲物)이 값을 더하니 부시(賦詩)는 일흥(逸興)을 완연(宛然)히 읍(挹)하듯 이 정자를 지나는 이 누군들 자손(子孫)된 큰 다행(多幸)함이 없으리요. 이는 또한 향당(鄕黨)에서 기꺼이 하례(賀禮)하고 공손(恭遜)히 졸(拙)한 글귀를 드려서 수설(修楔)을 도웁느니라.


들보를 동쪽에 얹으니 호수(湖水)는 넓고 넓어 아침의 해중(海中)에 낚시대는 의구(依舊)히 별탈 없으니 한 가닥 실을 풀어서 던지니 엄자릉(嚴子陵)의 풍(風)이로구나. 들보를 서쪽에 얹으니 덕유산(德裕山)의 아지랑이 전망(展望)이 흐리니 그사이서 쏟아나는 말고 힘찬 물 영가대(永歌臺) 아래서 깊은 시내 만들었네.


들보를 남쪽에 얹으니 아홉마디 신선(神仙)의 지팡이는 세상을 마다하여 임금에게 충성(忠誠)하는 모든 좋은 일 겸한 연후(然後) 에라야 호걸(豪傑)의 남자가 되는니라. 들보를 북쪽에 얹으니 황석산(黃石山)이 높아서 푸른 빛 영롱(零濃)하니 그 아래 개 짖고 닭이 우니 옛 집은 빽빽한 운림(雲林) 사이 있으리라.


들보를 위에 얹으니 하늘은 고요하고 북두성(北斗星)은 밝은데 들에는 편안한 뜻 지극(至極)한 정성을 드리오니 공산(空山)의 밤마다 애오라지 우러르네. 들보를 아래에 얹으니 그 누가 여러 봉을 서로 마지하리요.
그 때의 사람들이 감히 글을 임금에게 못 드리니 힘을 다해 용만(龍灣)에 임금의 수레를 따랐더니라.

 

엎드려 원하옵건대 들보를 올린 뒤에 어진 사람이 이어나며 길이길이 복되어서 도(道)를 배우고 글을 높혀 집은 돈독(敦篤)한 효제(孝弟)의 행(行)이 숫돌에 갈 듯 풍습(風習)은 정직한 풍(風)을 이루고 고상한 선비들은 앞선 분과 어깨를 견주며 충성(忠誠)하고 진실한 사람은 후대(後代)를 접(接)하고 이어서 문정(門庭)의 안에서 닦아 조정(朝庭)에까지 사모쳐서 임금이 써 충신(忠臣)과 늠열(凜烈)한 의(義)를 이어서 성묘(聖廟)에서 포양(褒揚)하는 은혜(恩惠)를 갚을지어다.

 


상지(上之) 32년(1895년 고종 32) 을미(乙未) 11월 하한(下澣)
초계인(草溪人) 사마생(司馬生) 정개석연갑(鄭介石然甲)은 짓다.

 

【주석】
◇작설(綽楔) : 효자나 의사(義士)들을 정표(旌表)하기 위하여 문 옆에 세운 대(臺)
◇괴원(槐院) : 삼공(三公)의 원(院)
◇여정(輿情) : 가마의 정(情)
◇구확(矩矱) : 모범
◇규구(規矩) : 잣대의 규격
◇준승(準繩) : 먹줄의 준측
◇첨하(檐下) : 처마(도리의 바깥부분을 구성하며 지붕의 밑 부분을 이루는 것)
◇척강(陟降) : 오르고 내림. ‘陟明降晦’라는 뜻
◇첨앙(瞻仰) : 우러러 사모함
◇정채(精彩) :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는 상태 , 뛰어나다
◇엄자릉(嚴子陵) : 자릉은 동한(東漢)의 은자(隱者)인 엄광(嚴光)의 자이다.

 

[原文]

 

東湖亭上樑文
君子筮遯擇林泉之勝 忠臣立節必如砥柱之堅 苟無建之宏 模曷稱出處之大義 惟先賢之高風威烈實非後人之能 言善形稟剛毅正直之性受 忠孝理義之學 早隱此洞自號東湖 東是海東湖則錦湖 白雲東屈曲 而開局黃石南脚 而且狀藏壺岩遮日巖 宣四時之遊 賞酒臺 琴笛臺偕象賓而登臨 綠苔磯上 漁歌互答 紅桃岸下 籌交錯 群峰擁立 開畵於雲外急流撞 回掛洪鍾於石上 軟草陽坡對鹿 而共眼落花平林 隨鶴猿而尋盟 遊玆幾年 若將終身 與其獨善 曷若弘濟伊尹 耕於莘野 而幡然就湯 孔明起於 草廬而遂 以輔漢登仕於萬曆年 而共隨?鷺之班 移拜終定陵合 而旋値龍蛇之變 身被鐵甲 能退千兵 背負玉體 力走十里 風塵一夢 未返杖之所 日月孤忠不泯 竹帛之名 鐫石不 堪語千載之後 綽楔有典 樹風於百世之下 槐院崇品 天恩重 花林別區地名 益彰第觀遊釣之某 邱尙稽經始之斯 亭固緣時勢之未 遑幾興輿情之永 嘆子孫之經年不謀 而同辭溪山之企 待多日亦從 而佑天?地 秘胥得明其鬼輸神運 利成巨役棟象村 各得其宣規矩準繩良工 咸盡厥技飛鳥革勢高哉美矣 鳳?龍舞角翼然臨于 攸攸宇 庶其靈神之陟降 爰笑爰語宣乎 後人之瞻仰 山川草木復生 今日之精彩 風月煙霞 摠依昔年之形勝 湖水改觀 可相濯纓之淸趣 雲物增價 宛賦之詩逸興 遇此亭者孰無雲仍之慶幸 是亦鄕黨之欣賀 恭獻拙句助擧脩樑抛樑東 湖水洋洋朝海 中依舊釣臺 無恙在一絲扶鼎子陵風
抛樑西德裕蒼嵐望欲 迷灣出其間 淸活水永歌臺下作深溪
抛樑南九節仙 玉女潭遯世忠君 皆好事兼之然後是豪男
抛樑北黃石嵯峨 零翠色其下 鷄鳴犬哭 村舊廬應在雲林間
抛樑上玉宇寥寥 星斗朗在野 安志拱極 誠空山夜夜聊瞻仰
抛樑下爲誰群峰 好相時人 不敢北移 文竭力龍灣扈玉駕
伏願上樑之後 賢人輩出 祚胤永錫 學道崇文 家敦孝悌之行 砥石礪節 俗成正直之風 高尙之士 比肩於前忠亮之人 接武於後修之 於門庭之內 達之於朝庭之上 以繼忠臣凜烈之義 庸報聖朝褒揚之恩
上之三十二年乙未至月下澣 草溪人司馬鄭介石然甲 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