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궁,정려,서원

1902년의 서울 궁궐사진

야촌(1) 2010. 1. 29. 23:35

■ 1902년의 서울 궁궐사진들

    (서프라이즈/1902년의 / 2009-9-27 08:34)

 

●잡초가 무성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의 집과 같다는 사연에 대한 연구 글에 나오는 사진들이다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국왕의 침전(寢殿). 정면 11칸, 측면 5칸의 큰 건물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1917년 창덕궁 희정전(熙政殿)이 소실되자 강녕전을 헐어 그 재목으로 중건했다. 현재 경복궁에는 강녕전이 새로 복원됐다.

 

 

↑경복궁 집옥재(集玉齋)

 

경복궁이 중건된 뒤에 건립된 고종의 서재다. 중국풍 건물로 장방형의 높은 석조기단 위에 세워졌다. 중앙에 돌계단이 있다. 왼쪽의 팔각 2층 건물은 서고인 팔우정(八隅亭). 오른쪽으로 언뜻 협길당(協吉堂)이 보인다.

 

 

↑경복궁 향원정(香遠亭)

 

경복궁 후원의 정자. 인공연못인 향원지에 작은 섬을 만들고 2층 정자를 세워 나무 구름다리 취향교(醉香橋)를 통해 건너 다니게 했다. 아래와 위층이 같은 크기이며 겹처마와 육모지붕으로 단장한 화려한 정자다. 고종 초기인 1860~70년대에 지어졌는데, 추녀마루가 모이는 곳에 탑 모양의 기와장식을 얹어 치장했다.

 

 

↑경복궁

 

↑덕수궁 함녕전(咸寧殿)

 

일대 원래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리던 덕수궁은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퇴위하고 머물면서 궁호가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함녕전은 황제의 침전으로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환궁하며 세운 전각인데, 1904년 화재로 소실돼 중건하였다. 1919년 1월 고종은 이곳에서 승하했다.

 

 

↑흥례문

 

↑근정전

 

↑근정문

 

↑경복궁 영제교(永濟橋)

 

↑경회루

 

↑교태전

 

↑경복궁 영추문

 

↑경복궁 광화문(1)

 

↑경복궁 광화문(2)

 

● 이하 창덕궁(昌德宮)

↑돈화문

 

↑금천교

 

↑신선문

 

↑창덕궁 인정문

 

↑창덕궁 인정전

 

↑부용정

 

↑어수문

 

↑창덕궁 주합루

 

↑창덕궁 존덕정

 

↑낙선재

 

↑승화루

 

↑창덕궁 평원루(昌慶宮)

 

↑창경궁 명정문

 

↑창경궁 명정전

 

↑창경궁 홍화문

 

↑창경궁 통명전

 

↑서울전경

 

↑보신각

 

↑수표교

 

↑숭례문

 

↑시전(1)

 

↑시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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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역사 : 1902년 경복궁사진의 미스테리의 답과「일제70년」의 기록

 

◈글쓴이: 만리무운(08.10.06 08:00)

 

경복궁은 그 창건 초기 부터, 조선조 멸망까지(1394~1910년) 조선의 정궁으로서 제 구실을 못한 불운의 궁이었으며, 조선조 500년동안에 사람이 산 기간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긴 세월 동안 폐허로 방치될 수 밖에 없었던 슬픈 운명을 타고난 비운의 궁이다.

자, 그러면 이 불운의 경복궁의 역사를 더듬어 보자.

 

이성계가 고려왕조을 배반하고 역성혁명을 일으켜서 왕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씨 조선을 건국한 것은 1392년이고, 그때 그는 개성에 있었다. 후사가 두려운 이성계는 고려왕족인 왕씨 일족의 씨를 말리려 왕씨 가문의 사람들을 꾀어 강화도와 거제도에 가서 살라고 배에 태워 싣고 가다가 10만명이 넘는 왕씨 왕족의 후예들을 바다에 빠트려 거의 몰살 시켰다.

 

그러니 이성계는 개성에 계속 있는것이 불안하고 불편하여 정도전과 함께 한양천도를 모색하는데, 제일 먼저 계룡산 신도안을 계획하고 착수했다가 포기하고, 1394년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궁을 새로 지어야 할 시급한 과제 속에서 이성계는 정도전의 훈수를 받아 1394년 12월부터 경복궁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395년에는 근정전, 사졍전 같은 주요한 전각들을 완공 하였으며 나머지 전각들도 12년에 걸쳐서 다 지었다.

 

경복궁이라는 이름과 모든 전각이름,그리고 한양의 모든 거리이름은 모두 정도전이 지은 것이며, 경복궁의 경복(景福)은 사서삼경중의 하나인 시경에 나오는「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문구의 뜻에서 따 온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경복궁은 복있기는 커녕, 파란만장 하였으며, 왕이 살았던 기간도 곁에 있는 창덕궁 보다도 훨씬 짧았던 비운의 궁이었다. 이성계에게 정도전은 비방(秘方)과 같은 절대적 존재였다.

 

정도전은 경복궁의 안산인 관악산이 火山인것을 알고 경복궁 정문앞에 해태상을 세우게 하였으나 창건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화마를 당하였다. 또한 경복궁에 사는 동안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고,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이 와중에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방원은 정도전의 목에 칼을 대고「첫째는 스승인 이색을 속였고, 둘째는 정몽주를 속였고, 셋째는 동지인 나를 속였다.」고 말하고 단칼에 목을 베었다. 이때 이성계는 괴씸하고 괴로운 심정으로 그의 고향인 함흥으로 가 있었고, 이방원은 개성에 가 있으면서 이성계를 회유하고자 차사를 여러차례 함흥으로 보냈으나, 이성계는 그때마다 차사의 목을 베어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는「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개성에 머물고 있던 태종은 태종 5년에 창덕궁(비원)을 새로 지어 옮겨 살았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대왕은「나라의 임금이 정궁인 경복궁에 사는 것은 당연하다.」며 경복궁을 수리하여 들어가 살았는데, 그의 재위 기간(1418~1450년)인 32년동안 경복궁을 정궁답게 활용한 가장 훌륭한 임금이었다.

 

세종대왕은 경복궁의 궁성을 보강중수하면서 집현전 학자들과 논의하여 경복궁의 정문인「사정문」을 광화문'으로 이름하였고, 한글 창제와 천문과학과 음악, 농사, 외교, 국방등 각 분야에서 실사구시와 문화적 주체성을 이뤄 낸, 우리 한겨레 역사상 가장 어질고 눈부신 업적을 이룩한 성군(聖君)이었다.

 

세종이 붕어하자 문종이 등극 하였으나 명이 짧아 일찍 죽고, 어린 단종이 뒤를 이었으나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영월로 귀양 보내고 왕위를 찬탈하니 세조가 되었다.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수많은 반대세력을 무참히 죽였으며, 경복궁은 피비린내 나는 살륙의 현장이 되었다. 

 

세조는 경복궁에 살기 싫다고 하여 다시 창덕궁으로 옮겨 살았다. 그후 사람이 살지 않는 경복궁에서 1543년 중종때와 1553년 명종때도 크고 작은 불이 났다. 이렇게 을씨년스러워진 경복궁은 왕이 들락날락 하는 불안정한 상태로, 정궁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해 오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 났을 때, 분노한 백성들에 의해서 처참히 소실되었다.

 

일본군이 아니라 내국의 백성이 전소시키다니? 이 무슨 사연인가? 참 기가 막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명나라로 도망가기 위해 의주(지금의 신의주)에 이르러 멈추었는데, 그 이유는 명나라의 반응이 시쿤둥하였을 뿐 아니라 유성룡을 비롯한 신하들이 적극 막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민중은 선조가 백성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갔다고 분개하였으며,「저 따위가 무슨 왕이냐?」며 경복궁을 싹 태워 버린다. 와~! 무서운 백성이다. 이 선조 때의 절대 위기상황에서 다행히 이순신 장군 같은 위대한 분이 있었기에 나라와 백성을 구하게 되니, 천지신명의 한겨레 보호하심이 어찌 아니랴!

 

이순신 장군은 소신 없는 군왕과 신하들 틈바구니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면서 오로지 나라와 백성 구하는 사명에 충실 하였으며, 철갑선(거북선)을 만들고 수군(水軍) 진영을 정비하였으며, 군사적 전략이 뛰어 나서 세계 전략사에 빛나는 겨레의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성웅(聖雄)이었다.

 

유약한 선조는 의주에 머물면서 그의 아들인 광해군에게 「니가 한양으로 내려가서 분조(分朝)해서 난리를 진압하라」고 등떠밀어 보내어 광해군이 전국을 돌아 다니며 진압에 힘써 전국이 어느정도 안정되자, 1593년에 선조는 한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경복궁은 주춧돌만 남았을 뿐, 전각은 한채도 없이 다 타버렸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선조는 월산대군(세조의 손자)의 사저(私邸)인 덕수궁에서 살게 되었고, 덕수궁은 차츰 확장되어 규모가 커졌으며, 이때부터 고종2년(1865년)까지 조선왕들은 덕수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살았다. 다시 말하면 경복궁은 1592년 부터 1868년 까지 276년 동안 중수되지 않은 폐궁이었다.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1863년에 등극하였는데, 나이가 어린 탓에 대원군이 섭정을 하였다. 그리고 1865년 대원군은 고종의 기를 살려 주려고 경복궁 복원을 계획하게 된다. 이때 대원군은 경복궁을 복원하고자 원납전(願納錢;자진해서 원해서 납부하는 돈)을 발행하여 돈을 거둬 들였는데 백성의 원성을 샀으므로 원망할 원자원납전(怨字怨納錢)이라 불려졌다.

 

경복궁 복원사업은 전국의 군인과 농민들을 부역시켜서 대원군의 열정으로 3년만인 1868년 2,000여간(間) 규모로 복원되었다. 그런데, 다 지어서 고종이 들어가 살게 된지 6년만인 1874년에 다시 불이 나서 절반에 가까운 830여간이 불에 탔다.

 

그래서 고종은 다시 창덕궁으로 이사를 간다.

창덕궁에 살면서 경복궁을 개수하여 1888년 다시 경복궁으로 이주 했는데, 이번에는 경복궁에 들어가서 살게된지 7년만인 1895년에 명성황후가 일본놈들에 의해 시해되는 끔찍한 참변이 일어났다. 이것을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집고 넘어 가야할 대목이 있다. 우리는 1910년 한일합병을 기점으로 해서 1945년 까지를 계산해서 「일제36년」이라고 하는데, 한일합병 훨씬 전인 1876년 부터 이미 일본은 조선을 짓밟고 자기들 마음대로 조선의 조정을 휘저었으며 국모인 명성황후(민비)를 처참히 시해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일제 70년」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임진왜란에서 조선정복의 야욕을 채우지 못한 일본은 호시탐탐 조선침략을 노리다가 조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1875년 저들의 군함인 운양호를 인천 강화도로 진격시켰는데, 우리 조선군이 대포를 쏴서 운양호를 쫒아버린 사건이 있었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다음해인 1876년에 조선을 협박하여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맺었는데 이는 사실상 조선에 불리한 불평등 조약으로서 일본이 조선의 정치 외교권과 경제권, 군사권등을 강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사실상 조선은 1876년 일본에 의해서 망하기 시작한지라, 엄밀히 따지면 1876년부터 계산해서 1945년 해방까지 일본강점의 기간은 70년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명성황후시해를 기점으로 일본은 저들의 야욕을 채우는 갖가지 술책을 썼는데 이에 대항하는 우리 의병들의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나자 전국 각 군마다 일본헌병 20명씩을 배치하여 백성을 통제하였고, 조선땅에는 일본화폐가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부철도 부설권을 비롯한 광산 채굴권등의 이권을 따 내었으며,철도부설 공사에 우리 백성들을 동원하여 일본은 공짜로 운영권을 독점하였다.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되자, 러시아 쪽으로 돌아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 가 살았으며 1년뒤 덕수궁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96년 이 땅에 서양의 커피가 들어와서 고종과 순종이 즐겨 먹게 되었는데, 1898년 소위 고종을 살해 하려는 독차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고종의 시중, 한사람이 커피에 독약을 넣었는데, 고종은 커피향이 이상하여 마시지 않았고 그의 세자(훗날 순종)는 한모금 마시고 난 뒤 이빨이 다 빠지는 기가 막힌 사건이 벌어졌다.

 

그래서 순종은 이때부터 사람구실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훗날 저능아 같아진 순종을 심심하지 않게 위로한다는 구실로 1908년 일본놈들은 창경궁에 동물을 끌어들여 동물원을 만들어서 조선의 오대왕 궁중에 하나인 창경궁을 하루아침에 동물원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1862년 ~1910년 사이에는 전국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으며, 그 결정판이 1894년에 일어난 동학혁명이었다. 전봉준을 선봉으로 동학당의 활약은 대단하였으나 1895년 진압되었다.

 

1895년은 바로 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난 해이고,고종은 끔찍한 민비사건의 현장인 경복궁을 차마 보고 살 수가 없고, 또한 일본에 정이 떨어져서 1896년 세자를 데리고 러시아 공관으로 잠시 옮겨 살았는데, 이것을 아관파천이라고 부르며, 친일정권이 무너지고 친러정권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좁은 러시아공관에서 오래 살 수가 없어서 이듬해인 1897년에 다시 덕수궁으로 옮겨 살게 되었고, 이후 경복궁에는 다시 들어가 살지않아 경복궁은 폐궁이 되었다.

 

고종은 이 와중에「대한제국」(1897년)이라, 나라이름을 바꾸고 스스로를 황제라고 하였으며 년호를 광무(光武)라고 하였다. 얼마나 상황판단에 어두운 일인가! 나라는 외세가 판을 치고 백성들은 억압되어 피눈물을 흘리는데 이러한 상황에서「황제」라니.....

 

어쩌면 사라져 가는 왕국의 자존을 살려 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던가?

일설에는 억울하게 시해된 민비의 원혼을 달래고자 황후로 격상하기 위함이라는 설도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역사이다.

 

한편, 1894년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동학혁명)은 끝까지 성공하지 못했지만, 김홍집등의 개혁파들이 주도한 갑오경장을 통해서 문벌제도와 반상차별 등의 신분제 철폐를 이뤄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친일적 성향의 개혁파들은 일본의 술책에 꼭두각시가 되어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강탈하기 쉽고 저들의 이권을 획책하기 쉬운 제도들을 많이 만들고 말았다.

 

그 당시 우리백성 절반이 성(姓)이 없었는데 일제가 호구조사를 하면서 비로소 성을 붙히게 되었고, 이때 조사된 총 인구가 960여만 명이었다.(이때 일본본토 인구는 약4,000여만 명이었다.) 

 

그리고 일본 놈들은 1902년 인천에서 하와이로 우리 백성 121명을 이민이라는 이름으로 일본배에 태워 첫 노예수출을 하였다.

 

또, 1902년 이후로 일본놈들이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를 거의 다 집어 삼켜서 우리 농민들은 농사 지을 땅이 없어서 서간도 북간도로 이주해 간, 가구수가 이 당시 1,300여 가구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막을 힘도 없었기에 각자 요령껏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등진 것이다.

 

척박한 땅, 사람이 살기 힘든 만주 간도 개발은 이런 조선 백성들이 일구어 낸 것이었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일본놈들은 경복궁을 뜯어내어 일본으로 목재를 실어 날러 일본에 오꾸라 박물관을 지었고, 그 외에도 경복궁은 일본놈들이 목재 창고처럼 여기고 궁전을 뜯어다가 개인 사택과 호텔등을 짓는데 썼으며, 1921년에는 경복궁의 전각 일부를 뜯어다가 창덕궁(비원)의 전각을 짓기도 하였다.

 

고종 독살실패 후, 일본은 헤이그밀사 사건(1907년 고종이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이위종의 밀사를 보내어 일본과 맺은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침략상을 만방에 호소하여, 대한제국의 주권을 찾으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하고(이준은 그곳에서 순국하였음) 일본은 이 일을 빌미로 친일파 신하들(이완용, 송병준 등)을 앞세워, 1907년 고종에게「물러 나시요, 

 

순종에게 양위하시요」하고 간언 압박하게 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안된다고 들고 일어났으며, 이 때 최익현 선생은 매일 도끼를 들고 덕수궁 밖, 대안문[大安門 : 나중에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침] 앞에서 1인 반대 데모를 하여 두 차례 귀양을 갔다 왔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또 반대 했을 때는 지독하다고 하여 일본 놈들이 일본 땅 대마도로 세 번째 유배를 보냈는데, 최익현 선생은 그곳에서 일본 놈들이 농사지은 곡식으로 지은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하여 두 달여 만에 굶어 돌아 가셨다. 아!~조선의 지조여!

 

일본 놈들은 한일합병 5년 전인 1905년에 통감부를 설치하였는데, 제 1대 통감이 이등박문(이또히로부미)이였고, 이를 우리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총을 쏘아 죽여 버렸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안중근의사는「내가 조선사람인데 니네가 왜 나를 재판하느냐?」며 일제에 꼿꼿이 항거하다가 1910년 여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사형집행 되었다.

 

아~ 안중근 의사시여!

그 충혼과 기백이시여!

당신은 꺼져가는 겨레의 혼을 살려내신 위대한 애국자이셨다.

 

1910년 드디어 치욕의 한일합병이 되고, 일제의 침략기구인 조선총독부가 창설되었다.

1912년 조선의 정궁 앞을 가로막고 조선총독부 건물이 지어졌다.

1895년 명성황후가 우리의 정궁인 경복궁에서 일본에 의해 무참히 시해된 을미사변 직후인

1896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지냈고(아관파천)

1897년 부터 1927년 까지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옮겨서 살았다.

 

***따라서 덩치님이 올린 1902년 경복궁 사진과 전진님이 올린 경복궁 사진의 미스테리의 답은 <그 때 경복궁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고 사람이 살지 않은 햇수가 제법 되어 풀이 무성하고 폐궁의 몰골이 된 것이다>이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또 역사에 꾸준한 관심도 없었던 그저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나라사랑과 나라걱정을 천성적으로 타고난 감성적 숙명적 애국자일 뿐이다. 또 문장력이나 기술력이 숙달 된 바도 없는 산골에 사는 초로의 늙은이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 왜곡이 너무 심하고,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이 한참 엉망인 상황이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그리고 조선내륙설이니 백두산이니 얼토당토 않은 입방아들이 아무런 걸림장치 없이, 마구 쏟아져 일반 국민을 혼란케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렇게 미천한 지식으로 나서게 되었다. 혹 나의 글에 두서 없음이 있다면 양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삼태 극 운영진에게 한 말씀 드린다. 삼태 극 운영진은 이런 고증되지 않은 자료들이 올라오면 무조건 내 보내서 삼태 극 카페 회원들을 혼란케 하지 말고, 혹 실어 올렸으면 운영진에서 철저히 연구하여, 입장을 신속하게 밝히고 정리해 주기를 바란다.

 

삼태극의 수많은 회원들은 참역사에 목말라 하는 분들이고 이에, 삼태극이 샘물 역할과 참역사의 이정표요 한겨레 숨결의 산소 역할을 해야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연구 결론은,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기 훨씬 이전인 1876년부터 이미 우리조선은 차츰차츰 일본에 먹혀 가다가 거의 식물인간처럼 압박되어 주권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876년~1945년 까지 무려 70년을 「일제70년」 을 나라 없이 서럽고 어둡게 살게 된것이다.

 

우리 민족이 일찌기 이렇게 어둡게 살아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8.15 해방일은 반드시 광복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제 36년이 아니고, 36년의 두 배인 70년을 국권과 주권을 강탈 당하고 서럽게 살아 온 것이다.***

 

친일 매국노들의 이름을 지금 다 호명하고 싶지는 않다.

 

다 아시니까. 그러나 이 시기에 우리 민족의 저력과 시퍼렇게 살아있는 주인정신을 갖었던 많은 이름없는 백성들과 애국지사, 독립투사님들, 그 중에서도 최익현 선생과 안중근의사와 윤봉길의사의 정신과 용기는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것이다.

 

아울러 한 말씀 더 보탠다면, 친일도 문제이지만 친중이나 친러나 친미도 주인정신 없기는 매 일반이니 우리가 지금 친일만 거론하다가, 친러 친중을 해 온 김일성의 과오를 간과하거나, 친미한 이승만과 기타 사람들의 과오를 간과하는 일이 있어서도 아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하대세를 보는 입장에서는, 개인의 과오만 따지다가 미래의 나라 운명을 미리 준비하는 유비무환의 방책에 소홀해서도 안된 다는 것이다.

 

수많은 외침을 겪으면서도 이 만큼 지켜 온, 우리 겨레 우리 땅, 우리 정신과 얼을, 우리세대에 와서 상실하는 어리석음과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는 지금 정신을 들고 서로 하나되게 끌어 안으면서 신중하게 헤쳐 나가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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