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경상도 안의(安義)의 유학(幼學) 전학순(田鶴淳)의 상소문

야촌(1) 2010. 5. 18. 22:37

■ 의복 제도의 개편을 부강의 수단으로 삼지 말 것을 청하는 경상도 안의(安義)의 유학(幼學) 전학순(田學淳)

    상소문

 

경상도 안의(安義)의 유학(幼學) 전학순(田鶴淳)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듣자하니 천 사람이 ‘예예’ 하는 것이 선비 한 사람이 곧은 말 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신은 먼 지방의 천한 몸으로 비록 감히 선비로 자처할 수는 없지만, 다행히 밝으신 성상의 세상에 태어나 유현(儒賢)의 문하에서 교유할 수 있었으므로 충효의 도리와 《춘추》의 의리에 대해 대강이나마 알기에, 항상 스스로 신하로 태어나서 유독 하루도 임금에게 나아가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깊은 골짜기에서 늙어 죽는다고 생각하니, 지극한 통한이 마음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삼가 듣자하니, 전하께서 사방의 일을 밝게 보시고 환히 들으시는 성덕으로 언로를 활짝 열어 간하는 말을 지체없이 받아들이시어, 위로 조정의 백관으로부터 아래로 여항(閭巷)의 필부(匹夫)에 이르기까지 모두 글을 올려 충정을 다하게 하였다 하니, 이는 진실로 무위 빈천한 저 같은 사람에게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고 하겠습니다.

 

신은 감격과 환희를 이기지 못하여 몽매함을 무릅쓰고 우러러 아뢰니, 엎드려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살펴 주십시오. 신이 듣자하니 전하께서는 우리나라의 의복에 불편한 점이 많다 하여 옛 제도를 손보아 시의(時宜)를 헤아려서 번잡한 것을 없애고 간편한 쪽으로 나아가고 사치를 막고 검소함을 숭상하여, 두루마기로 창의(氅衣)를 대신하고 답호(褡)로 도포를 대신하여 팔역(八域)의 의관이 면모를 일신하게 하였다 하니, 아, 훌륭하십니다.

 

어찌 감히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혹자가 말하기를, ‘이는 선왕의 법복이 아니니 입어서는 안 된다.’하면, 신은 ‘그렇지 않다. 법은 왕으로부터 나오니, 현재 왕의 제도가 어찌 법복이 아니겠는가.’ 하고, 혹자가 말하기를, ‘이것 역시 선왕의 법복이니 입는 것이 옳다.’ 하면 신은 ‘그렇지 않다. 모두 선왕의 법복이기는 하나 취하고 버리는 사이에 본래 의리가 존재한다.’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복장은 명 나라의 유제(遺制) 입니다.

 

명(明) 나라의 우리나라에 대한 그 크고도 넓은 은택은 과연 어떠합니까. 500년 종묘 사직이 편안히 태평을 누린 것과 삼천리 만백성이 성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우리 신종 현황제(神宗顯皇帝)와 의종 열황제(毅宗烈皇帝)께서 다시 일으켜 주신 성덕(聖德)입니다.

 

천하의 힘을 다해 일국의 운명을 구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중국이 안으로 들끓어 마침내 전복되기에 이르렀으니, 그 의복을 입고 그 관을 쓰는 자가 누군들 하늘 끝, 땅 끝까지 망극한 아픔을 갚고자 하지 않는 이가 있겠습니까?

 

왕택(王澤)은 이미 사라지고 문화마저 없어져 천하 만국이 모두 머리를 깎고 좌임(左袵)을 했지만, 오직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만이 일월(日月) 같은 충성과 강한(江漢) 같은 정성으로 홀로 명나라의 유제(遺制)를 지키시어 그대로 따르고 바꾸지 않아 천하에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밝히셨습니다.

 

지금까지도 천하가 조선을 예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대개 의관과 문물에 찬란하게 선왕의 유풍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각국이 연합하기도 하고 분열하기도 하여 벽루(壁壘)가 서로 이어 있어 팔역(八域)의 인심이 불안에 떨어 안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건대 느닷없이 의복 제도를 바꾸라는 명에 대해 신은 먼저 충직한 마음을 가진 신하에게 실망을 사고 훗날 천하 후세에 비웃음을 사게 될까 두렵습니다.

 

명 나라가 망한 것이 갑신년(1644, 인조22)이었는데 지금 다시 갑신년을 맞아 유제를 모두 바꾸니 마음의 아픔이 명 나라가 망할 때와 다를 게 없습니다. 이는 실로 본래의 떳떳한 성품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의리를 밝히시고 옛 제도를 준수하시어 선왕의 유덕(遺德)을 빛내시고 명 나라의 구은(舊恩)을 깊이 추모하소서.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성명이 이미 내려져 다시 거두기 어려운 점이 있거든 새로운 복장과 옛 복장을 둘 다 통용해 입어 일 없이 한가하게 거할 때에는 옛날의 복장대로 입고, 일이 있어 활동할 때에는 새로운 복장을 입어 편의에 따라 입도록 한다면 의리가 밝아지고 인심이 안정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저들은 날랜데 우리는 둔하고 저들은 부유한데 우리는 가난한 것을 염려하시어 이런 의복 제도를 바꾸라는 명령을 두셨으나 국가가 부강해지는 방법이 어찌 모두 의복 제도를 바꾸는 한 가지 일에만 달려 있겠습니까.

 

지난 역사를 살펴보니, 국가를 다스리는 자들은 모두들 현자를 임용하고 능력 있는 자를 쓰며 재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부강함을 이루었으며, 한 사람도 의복 제도를 바꾸는 논의를 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이때에 부강해지고자 한다면 또한 의당 널리 인재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전하의 총명하신 성지(聖智)로 지위와 문벌에 구애받지 마시고 정성껏 어진 인재를 구한다면 부암에서 성을 쌓던 부열(傅說)이나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질하던 강태공 같은 이가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

 

현자가 지위에 있고 능력 있는 자가 직위에 있으면서 계책을 내고 제안을 하고 선언(善言)을 진술하고 충성을 바친다면 국가가 부강해지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신이 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깊이 강구해 보았는데 먼저 부강해지는 방법으로 대략 그 대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국가의 형세는 만일 제도 개혁을 대대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비록 관중(管仲)이나 제갈량(諸葛亮) 같은 경륜(經綸)과 지모(智謀)가 있는 자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니, 먼저 재원(財源)을 확보할 방법을 찾은 뒤에야 부(富)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의 재용은 백성의 세금에서 나오고 백성의 세금은 전결(田結)에서 나오는데 전결은 토지를 측량하여 한번 정해진 것입니다. 지금 국가 재정의 지출이 전일의 백 배나 되는데 백성들이 바치는 세금은 일정하여 변함이 없다면 국가가 무슨 수로 가난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백성이 무슨 수로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수백 년 동안 태평한 시대가 계속되면서 인구 수가 많아져서 산야와 풀밭을 모두 개간하여 곡식을 파종하였고, 양전(良田)과 옥토(沃土)에서는 전일보다 배나 잘 자라 토지마다 결(結)을 매기고 결마다 세금을 정하여 전세의 소출도 전일의 배나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국용은 항상 부족하고 백성의 살림살이는 항상 넉넉지 못하니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간사한 관리들이 함부로 횡령하고 은닉하여 전결의 세가 태반은 그들의 개인 재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도마다 모두 그러하고 읍마다 이와 같으니 이제부터 법령을 엄격히 세워서 계산에 밝은 사람으로 하여금 전결을 조사하여 정리한다면 팔도의 전결이 반드시 전일의 배가 될 것이요,

 

전세의 소출도 조금도 새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은 한 달 정도밖에 안 걸리니 조금도 백성의 본업에 해될 것이 없습니다. 또 조정의 관작으로 말하자면 긴요하지 않은 것은 줄이고 한 사람이 몇 사람의 일을 겸한다면 봉록으로 나가는 비용을 반드시 전일의 반으로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각도의 수령은 작은 읍을 합하여 두 읍에 한 사람씩 둔다면 봉록으로 나가는 비용이 역시 전일의 반으로 줄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곡창엔 곡식이 남고 창고엔 재물이 남아 충분히 쓰고도 남을 것입니다.

 

다시 군대를 강하게 하는 방법으로 대략 그 대강을 진술하겠습니다. 대개 병제(兵制)를 먼저 확립한 뒤에야 강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군사를 농사일에 넣어 두어 국가에 별일이 없을 때는 병사가 모두 농부로 있다가 국가 유사시에 농부가 모두 병사가 되었으니 백성은 항상 여유 있고 군대는 힘이 강해 나라의 재정이 부유해지고 교화가 행해졌습니다.

 

우리나라의 병제가 비록 고제(古制)에 다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채용할 만한 것이 있으니, 바로 각읍의 이른바 ‘속오군(束伍軍)’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호포(戶布)를 낸 후에, 병제가 해이해져서 속오군의 무리가 모두 양반이라 칭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종적을 감추고 이름을 숨겨 한 사람도 향병(鄕兵)이라 자처하는 자가 없어, 이른바 군부(軍簿)의 명색(名色)이란 것이 한갓 종잇장 위의 무효한 글이 되었을 뿐입니다.

 

만약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그때 가서 징집을 하고자 한들 이미 흩어져 버린 병사를 어떻게 모을 것이며, 훈련받지 않은 병사로 어떻게 전쟁을 하겠습니까. 적병이 국경을 쳐들어와도 아마 속수무책으로 죽기만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크게 한숨 쉬며 눈물 흘릴 일입니다.

 

지금 이후로 먼저 기내(畿內)부터 해서 차차 각도 각읍에까지 미쳐 사족(士族)과 소민(小民)을 따질 것 없이 그 성명을 기록하여 모두 군적(軍籍)에 실어, 5오(伍)마다 통수(統首)를 두고 10통(統)마다 이장(里長)을 두고 100통마다 부장(部長)을 두어 각각 군직의 직함을 주어 차례대로 승진시키면, 군령이 엄숙하고 명백해지고 행진(行陣)이 화목해져서 양반과 상인의 명분이 절로 서고 귀천의 등급이 문란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봄, 가을로 농사가 없을 때에 부장과 이장이 각각 그 통, 오를 거느리어 병사를 훈련시키고 근면한 사람에겐 상을 내리고 태만한 사람에겐 벌을 주어, 통내의 백성으로 하여금 제 맘대로 떠나지 못하게 한다면, 한 사람도 군적에서 빠진 자가 없을 것이고 한 사람의 백성도 군사가 아닌 자가 없을 것입니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백성에게 어진 정치를 행하고 그들을 예의로써 가르치고 농상(農桑)으로써 권면하며, 세금을 박하게 거두어들이고 재용을 절약해서 교화가 민심에 젖어들면, 행여 예기치 않은 변란이 있더라도 군령이 한번 떨어지면 팔도의 군병이 일시에 자발적으로 달려와 모두 국가의 일에 목숨을 바치고자 할 것입니다.

 

이와 같으면 천하에 이보다 부유한 나라가 없을 것이고 이보다 강한 군대가 없을 것이니, 이웃 나라의 부강함을 두려워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자질구레하게 의복의 제도를 바꾸는 것으로 부강해지는 수단을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예예’ 하지마는 신은 유독 그렇지 않아 감히 성상의 크신 위엄을 번거롭게 하니,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깊이 살피어 채납(采納)하시어 신을 조정의 바른말하는 선비로 삼으신다면 신은 죽더라도 전인(前人)에게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요,

 

성덕(聖德)은 전대(前代)보다 더욱 빛남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황공한 마음 가눌 길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의복 제도에 대한 것은 절목이 이미 행해졌으니 이와 같이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하였다.

 

자료 : 승정원일기 > 고종 21년 갑신(1884, 광서 10) > 7월 24일 (병인)

 

위의 상소문은 通政大夫 行 商工學校 敎官을 지내신 필자의 외고조부(外高祖父)인

전학순(田鶴淳) 선생이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입니다.

 

[元文]

甲申年 變服時 上疏文 安義 田鶴淳

 

 

 

 

 

 

 

 

↑필자 소장본(크기 : 172㎝ x 18㎝)

 

■ 전학순(田鶴淳) 등을 상공학교 교관에 임용하였다.

 

●조병소(趙秉韶)를 경기관찰부 주사에 임용하고, 박기석(朴基錫), 남상익(南相翼), 윤증구(尹曾求), 정대근(丁大根)을 충청남도관찰부 주사에 임용하고, 강위수(姜渭秀), 계응규(桂膺奎), 김국현(金國鉉)을 평안북도관찰부 주사에 임용하고, 조홍승(曺弘承), 김병호(金秉鎬), 김용석(金用錫)을 함경북도관찰부 주사에 임용하고, 박제명(朴濟明)을 제주목 주사에 임용하고, 유인상(柳寅祥)을 법부 주사에 임용하고, 최태식(崔泰植)을 평리원 주사에 임용하고, 조윤규(趙允奎), 강태기(姜泰驥), 이상직(李常稙), 최면식(崔勉植), 전학순(田鶴淳) , 민선호(閔璿鎬)를 상공학교 교관(商工學校 敎官)에 임용하였다.

 

자료 : 승정원일기 > 고종 38년 신축(1901, 광무 5) > 12월 25일 (정사, 양력 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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