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조선왕기(ㅣ)

야촌(1) 2010. 6. 13. 04:12

↑조선 건국왕 태조(太祖) 1335년(충숙왕 복위 4)~1408년(태종 8)

 

■ 태조(太祖)

 

조선의 제1대왕 태조(太祖 : 재위 1392~1398)는 성이 이(李)씨로, 본관은 전주(全州) 휘는 단(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初字)는 중결(仲潔), 자(字)는 군진(君晋), 호(號)는 송헌(松軒)이며 몽골식 이름은 아기바토르(阿其拔都)이다.

 

그는 함경도 영흥(永興) 출신으로. 자춘(子春)의 제2남으로 태어나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내부(來附)한 뒤 1361년 홍건적의 침입 때 전공을 세우고 원나라의 나하추가 침입하자 격파 하였다.

 

1388년 명(明)의 철령위 설치 문제로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출정을 반대 하였으나 거절당한 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 최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전제개혁을 단행하고 정몽주를 제거한 뒤, 스스로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이듬해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고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 했다.

사대주의 배불숭유 농본주의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초기국가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을 시발로 한 왕자들의 권력다툼으로 말년에는 동북 면에 가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후에는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여생을 보냈는데 수(壽)는 74세이고 능은 양주(楊州)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

 

 

↑조선 제2대왕 정종(定宗) 1357년(공민왕 6~1419년(세종 1)

 

■ 제2대 정종(定宗)

 

조선 제2대왕 정종(定宗 : 재위 1399~1400)의 휘(諱)는 경(敬), 초명은 방과(芳果), 자(字)는 광원(光遠), 1357년 음력 7월 1일에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품이 온화하고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나 고려 말기에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쟁터에 참여하여 많은 공적을 세웠다.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이방과는 영안대군으로 책봉되었다가 1398년 음력 8월에 동생 정안대군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본래 왕위에 뜻이 없었던 방과는 왕세자가 되기를 극구 사양하였지만, 태조의 맏아들이자 형 진안대군 방우는 이미 죽었던 데다가, 그 당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동생 방원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왕세자에 올랐다가 1개월 뒤인 1398년 음력 9월에 태조의 양위로 조선의 임금이 되었다.

 

정종은 2년의 재위 기간 동안 동생인 방원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방원의 뜻에 따라 권력가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들을 해체하고 군사권을 국가의 최고 군사기관인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집중시켰다. 정종은 서울의 운기가 나빠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는 이유를 들어 수도를 서울에서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그러나 다음 해인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원을 왕세제로 책봉하고 9개월 뒤인 음력 11월 13일에 왕세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정종으로서는 권력의 중심인 왕위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은 인덕궁에서 격구나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오락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다가 세종 1년인 1419년 음력 9월 26일에 63살의 나이에 승하하였다. 능은 개경에 있는 후릉(厚陵)이다. 2년 동안의 짧은 치세에 거의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정종을 과도기 집권자로 여기고 묘호도 올리지 않고 「공정대왕(恭靖大王)」으로 불렀으나, 262년이 지난 1681년(숙종 7년) 음력 12월에 이르러서야 정종이란 묘호를 받게 되었다.

 

 

↑ 조선 제3대왕 태종(太宗) 1367년(공민왕 16)∼1422년(세종 4).

 

■ 제3대 태종(太宗)

 

조선의 3대왕 태종(太宗 : 재위 1400~1418)의 휘(諱)는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韓氏) 사이의 다섯째 아들이다. 태조의 개국(開國)에 공헌이 컸으며 정안대군(靖安大君)에 피봉 되었다.

 

태조가 계비 강씨(繼妃 康氏)소생의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을 세자로 정하자 태종은 이에 불만을 품고 세자를 보필하는 정도전(鄭道傳)과 방석을 죽이고, 형인 영안대군(永安大君) 방과(芳果 : 定宗)를 세자로 책봉 즉위케 하였고,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의 반란을 평정 하는 등 왕위를 얻기 위해 두 번이나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을 일으켜 드디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 하였다.

천성이 영민하여 철저한 배불숭유정책(排佛崇儒政策)을 강행 관제(官制)의 개혁에 주력 하였으며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여 민정(民情)을 들을 수 있게 하는 한편, 호패법(號牌法)을 신설 하여 호구 수(戶口數)를 명학히 하는 등 제반제도를 개혁 정비했다.

 

한편 학문의 장려와 무술의 수상에도 힘써서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서책(書冊)을 간행 하게 하였다.

대외 관계에 있어 명나라로 부터 고명금인(誥命金印)을 받아냈고 대내적으로 왕권 확립에 주력 국가 기반을 충실히 하는데 이바지 하였다. 능은 헌릉(獻陵)이다.

 

 

↑조선 제4대왕 세종(世宗) 1397년(태조 6)∼1450년(세종 32).

 

■ 제4대 세종(世宗)

 

조선 제4대왕 세종(世宗 : 재위 1397~1450)의 휘(諱)는 (도), 자는 원정(元正), 시호는 장헌(莊憲),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의 셋째 아들이다.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고, 140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군 1412년 대군이 되고 1418년(태종 18)왕세자에 책봉, 그 해 8월 양위를 받아 즉위하니 나이 22세였다.

 

세종은 현명하고 학문을 즐겼으며 내치. 외교. 문화. 등 여러 방면으로 크게 치적을 올려 이씨왕조의 기틀을 더욱 튼튼히 하였다. 즉위 후 정음청(正音聽)을 두어 훈민정음(訓民正音:한글) 을 창제하고 집현전(集賢殿)을 설치 국내의 우수한 학자를 총망라 하여 학문을 강론케 하였고 활자를 개량하여 학자들을 지도해서 많은 책을 편찬케 하였다.

 

불교를 개혁하고 불서의 간행과 과거에 승과(僧科)설치 하는 등 불교 발달에도 도움을 주었다.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두어 전제. 세제를 정비(경제육전(經濟六典)을 반포하여 농업을 장려하는 한편 측우기를 고안하고 이천 .장영실. 등을 시켜 물시계. 해시계. 호천의 등 각종 과학기구를 발명 제작하여 천체를 측정하고 역서를 만들었다.

 

또한 북변 국경지대를 개측해 압록강 상류에 4군을 두만강 변에 6진을 설치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영능이다.

 

 

↑조선 제5대왕 문종(文宗) 1414(태종 14)~1452(문종 2).

 

■ 제5대 문종(文宗)

 

조선의 제5대왕 문종(文宗 : 재위 1450~1452)의 이름은 향(珦), 자는 휘지(輝之), 시호는 공순(恭順), 세종대왕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청송심씨(淸松沈氏)의 맏아들로 태어나 8살의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 되었는데, 조선의 왕 중에서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왕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일찍 혼인하였으나 첫 번째 부인이었던 휘빈 김씨는 문종의 사랑을 얻으려 온갖 잡술을 이용하다가 발각되어 폐위되었고, 두 번째 아내였던 순빈 봉씨는 폭력적이고 동성애적인 기질로 나인 소쌍과 동침하여 자질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으로 인해 폐위되었다.

 

그리고 이미 후궁으로 들어와 있던 권씨와 혼인하였으나. 권씨는 왕세자빈 시절이었던 1441년단종을 낳은 지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문종은 어렸을 때부터 인품이 관대하고 후하여 누구에게나 좋은 소리를 들었으며 학문을 무척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정량적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를 발명할 정도로 천문학과 산술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1421년부터 1450년까지 무려 29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왕세자로 지내는 동안 문신과 무신을 골고루 등용하였으며, 언관의 언론에 대해 관대한 정치를 폄으로써 언론을 활성화해 민심을 파악하는 데 힘쓰는 등 아버지 세종을 곁에서 잘 보필하였다.

 

1442년 세종이 병상에 누워 국정을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세종을 대신하여 8년간의 섭정기간 동안 국사를 처리하다가 1450년 음력 2월에 세종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조선의 임금이 되었다. 이미 8년 동안 대리청정을 한 덕분에 공백 기간 동안 정사 처리에 문제가 없었다.

 

문종은 재위 기간 동안 언론의 활성화와 역사책 편찬, 병법의 정비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유연함과 강함을 병행하는 정치를 실시하려고 했다. 문종은 6품 이상까지 윤대를 허락하는 등 하급 관리들의 말도 빠짐없이 경청하는 등 열린 정책을 펴는 한편,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하였다. 문종은 역사와 병법을 정리함으로써 사회 기반을 정착시키고 제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문종은 왕세자 시절에 진법을 편찬했을 만큼 국방에도 관심이 많아서 병력 증대를 통해 병법의 정비와 국방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또 태종 때 만들었던 화차를 새롭게 개발하여 “문종화차”를 만들어 혹시나 있을 전쟁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문종은 왕세자 시절의 과중한 업무와 공부로 인해 건강이 급속히 나빠진데다가 임금으로 즉위한 후에는 건강이 더욱 악화되는 바람에 재위 기간 내내 병상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러다가 결국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인 1452년 음력 5월에 39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다.

 

능은 경기도구리시동구릉 내에 위치한 현릉(顯陵)에 안장되었는데, 현덕왕후 권씨는 원래 소릉에 안장되었다가 계유정난 이후 1457년 추 폐되어 재궁이 바닷가에 버려졌었고, 중종 7년 1512년에 현릉에 같이 묻히게 되었다.

 

 

↑조선 제6대왕 단종(端宗) 1441(세종 23)~1457(세조 3)

 

■ 제6대 단종(端宗)

 

조선의 제6대왕 단종(端宗 : 재위1452~1455)의 이름은 홍위(弘暐), 제5대 왕인 문종(文宗)이 왕세자로 있던 시절 왕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외아들로 1441년음력 7월 23일 태어났으나, 당시 몸이 약한 세자빈 권씨(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 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의 보살핌 아래에서 자랐다.

 

비(妃)는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송현수(宋玹壽)의 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1448년(세종 30)에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었고 1450년에 문종이 즉위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1452년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王位)에 올랐는데 1453년에 그를 보필하던 황보인. 김종서 등이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해 제거 당하자 수양대군이 군국(軍國)의 모든 권리를 장악 하였으며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8살이 되던 1448년에 왕세손으로 책봉된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세종은 자신의 병이 악화되어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으며, 몸이 약한 아들 문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늘 어린 단종을 몹시 걱정했다.

 

문종마저 일찍 죽고 나면 야심으로 가득 찬 둘째 아들 수양대군을 비롯한 혈기왕성한 여러 대군 사이에서 어린 손자가 아무 탈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전에 황보인·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왕세손을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다.

 

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즉위한 그 해에 단종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세종이 우려했던 대로 문종은 왕으로 즉위한 지 겨우 2년 3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하고 말았다.

1452년 단종은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어릴 때부터 세종의 칭찬이 자자했을 만큼 영리하였으나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혼자서 나랏일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경우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대비의 도움을 받아 정사를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지만, 당시 궁중엔 대비는 물론 대왕대비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결정은 신하들이 도맡아 했고, 단종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특히 인사 문제는 ‘황표정사(黃票政事)’라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왕의 권력이 축소된 것에 반해 세종의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인 수양대군 등 왕족의 세력은 나날이 팽창되어 갔다.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 경쟁은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인 1453년 음력 10월, 계유정난을 불러왔다.

 

계유정난으로써 수양대군이 정치적 실권을 거의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고 말았으며,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가서 사약을 받았다. 이듬해에 수양대군이 단종의 나머지 측근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하는 일이 일어나자 1455년(세조 1년) 단종은 수양대군의 측근 세력인 한명회· 권남 등이 선위를 강요받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1456년 음력 6월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 이른바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 바람에 1457년 단종은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으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숙부인 금성대군 역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사약을 받고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단종은 서인(庶人)으로 내려지고 마침내 1457년음력 12월 24일 17살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았다.

 

단종은 죽은 뒤 묘호도 없이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1681년(숙종 7년)에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년)에는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자료내용 : 위기백과 참조

 

 

↑제7대왕 세조(世祖) 1417(태종 17)~1468(세조 14).

 

■ 제7대 세조(世祖)

 

조선 제7대왕 세조(世祖 : 재위 1455~1468)의 휘(諱)는 유(柔)요, 자는 수지(粹之), 시호는 혜장(惠莊), 세종과 소헌왕후 청송 심 씨의 제2왕자로서. 문종의 아우가 이다. 처음에 진평대군(晋平大君), 뒤에 함평(咸平), 함양(咸陽)으로 마지막에 수양(首陽)대군으로 고쳤다.

 

문종이 죽고 어린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등을 죽이고 아우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에 귀양 보낸 후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병마의 실권을 장악 하고 왕위를 강탈 하였다.

 

그는 천성이 호탕하여 활쏘기에 능하였고 또 병서에 정통 하였다.

세종 때 설치한 북변의 4군(四郡)을 철폐하고 1460년에 신숙주(申淑舟)를 보내 무련위야인(毛憐衛野人)을 정벌하고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고 명나라에 호응하여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하고 이만주(李滿住)를 베어 국위를 북변에 떨쳤다.

 

또 신숙주(申淑舟)등에게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최항(崔恒) 등에게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 시키는 등 치적이 많았으며 불교를 깊이 믿어서 1465년 서울에 대원각사(大圓覺寺)를 창립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어 불경을 간행 하였다.

1468년 9월 왕위를 예종에게 넘기고 죽었으며 능은 광릉(光陵)이다.

 

 

↑조선 제8대왕 예종(睿宗) 1441(세종 23)~1469(예종 1)

 

■ 제8대 예종(睿宗)

 

조선 제8대왕 예종(睿宗 : 재위 1468~1469)의 휘는 황(晄)이요, 는 명조(明照) 또는 평남(平南). 시호는 양도(襄悼)이다.

1450년 경오 정월 정축일에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해양대군으로 봉해졌으나 형인 의경세자가 1457년 까닭 없이 갑자기 죽게 되자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1살 때인 1460년 한명회의 딸을 세자빈(이후 장순왕후)으로 맞이한다.

그러나 1461년 음력 11월 왕실의 적통인 인성대군을 출산한 후 산후병으로 17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이듬해 1462년 안순왕후를 맞이한다.

 

1468년 음력 9월에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19살 때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예종은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아직 성년인 20살이 되지 않았으므로 왕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예종의 국정은 어머니인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세조가 지명한 3명의 신하들이 내린 결정을 형식적으로 결재하는 원상 제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예종의 재위 기간은 14개월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1468년에 남이의 옥 사건이 일어났으며, 1469년에는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에서 일본과의 개별 무역을 금지하였고, 그 외에도 병영에 딸려 있는 논과 밭을 일반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또한 세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했던 《경국대전》을 드디어 완성했으나 이를 반포하지 못한 채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말았다. 예종은 원상제도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임금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재위 기간 동안 정희왕후의 강력한 통치로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예종은 2명의 왕자와 1명의 공주를 두었으나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왕세자에 책봉됨으로써 예종의 아들들은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능은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의 창릉(昌陵)이다.

 

 

↑조선 제9대왕 성종(成宗) 1457(세조 3)~1494(성종 25).

 

■ 제9대 성종(成宗)

 

조선의 제 9대왕 성종(成宗 : 재위 1469~1494)의 휘(諱)는 혈(娎), 시호는 강정(康靖),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훗날 덕종으로 추존됨)와 왕세자빈 한씨[소혜왕후(昭蕙王后)]로 추존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도량이 넓어 세조로부터 태조를 닮아 기상과 학식이 뛰어날 것이라는 칭찬을 들으며 무척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1461년 5살이 되던 해에 자산군(者山君)으로, 의경세자의 동생인 해양대군이 예종으로 즉위하면서 자을산군(者乙山君)에 봉해졌다가 예종이 즉위한 지 10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당시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은 4살이었고, 또 형인 월산군은 병환 중이었기 때문에 정희왕후(貞顯王后)의 명령에 따라 1469년(예종 1년) 음력 11월 28일에 조선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즉위 초반에는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 윤씨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당시 유력한 국왕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던 만큼 섭정을 받은 7년 동안 국정의 모든 결정권은 신숙주, 한명회 등의 원로 대신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수렴청정을 끝낸 1476년(성종 7년)부터는 원로대신 들이 국정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원상 제도를 폐지하여 결재권을 되찾았다.

 

임사홍, 유자광 등의 공신들을 유배시키는 한편, 성균관을 비롯한 각 도의 향학에 전결과 서적을 주어 교육과 문화의 진흥에 힘썼으며, 김종직 등 사림파를 과감히 등용함으로써 신진세력을 형성시키고 정치적 기반을 만들었다.

 

그해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왕비로 삼았으나 1479년(성종 10년)에 폐위하고 이듬해 사사(賜死)하여 연산군 때 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성종의 치세는 ‘문화의 황금기’라고 불렸을 만큼 세종과 세조가 이룩해 놓은 치적들을 바탕으로 빛나는 문화 정책을 펴 나간 시기였다.

 

1474년(성종 5년)에는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했으며 1492년에는 경국대전을 보충한 《대전속록》과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동문선(東文選)》, 《악학궤범》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간행했다.

 

세조 때 폐지된 집현전과 비슷한 역할을 맡은 홍문관을 설치하는 한편, 문신 중에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물을 골라 집에서 독서하게 하는 호당제도를 실시하는 등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한 승려들을 엄하게 통제하고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는 등 숭유억불 정책을 철저하게 실천했다.

 

대외적으로는 1479년(성종 10년) 윤필상(尹弼商)으로 하여금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1491년(성종 22년) 허종(許琮)을 파견하여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 소굴을 소탕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조선 시대 초기 문물 제도는 성종 때에 거의 완성되었으며, 백성들은 건국 이후 가장 태평 성대한 세월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러한 태평성대는 성종의 치세 후기에 퇴폐 풍조를 조장하기도 했다. 재위 기간 25년 동안 내내 선정을 베풀었던 성종은 1494년음력 12월 24일 38살의 나이에 승하하였다. 능은 선릉(宣陵)이다.

 

자료내용 : 위기백과참조

 

 

↑조선 제10대왕 연산군(燕山君) 1476년(성종 7)∼1506년(중종 1).

 

■ 제10대 연산군(燕山君)

 

조선 제10대왕 연산군(燕山君 : 재위 1495~1506)의 휘(諱)는 융(隆)이요. 성종의 맏아들로 폐비 윤씨(제헌왕후)의 소생이다,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 거창신씨 이다.

 

즉위3년 동안은 국조보감(國朝寶鑑)등 여러 서적을 완성시켰으며 국방을 튼튼히 하고. 사창· 상평창· 진제창(賑濟倉)의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부활하였으며, 또한《경상우도지도》,《국조보감》,《동국명가집》등을 간행하였고,《역대제왕시문잡저》,《속국조보감》,《여지승람》을 완성하는 등, 즉위 초에는 다소의 업적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즉위 이듬해부터 그는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권시키는 일을 추진하게 되는데. 그러나 사림에서는 사후 백년간 논외에 부친다는 성종의 유언을 들며 폐비 복권을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감정이 악화된 연산군은 사림파의 제거를 추진한다.

 

이때 훈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 류자광(柳子光)등의 계략에 빠져 1498년(연산군 4) 사초(史草)를 문제 삼아 김종직(金宗直)등 많은 신진 사류(士流)를 죽이는 최초의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되고. 1504년에는 생모인 폐비윤씨가 내쫓겨 사사(賜死)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으며, 조모 인수대비(人粹大妃)를 병상에서 죽게 하였다.

 

이어 윤필상(尹弼商). 김굉필(金宏弼)등 수십명의 관료 학자들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으며. 한글 교습을 중단 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또한 각 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를 삼는 등,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이에 1506년(중종 1)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등이 거병하여 정치에 별로 관심도 없던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하여,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어 킴에 폐위되어 민가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강화도 교동(喬桐)으로 추방되었다.

 

이때 장녹수 등 그의 후궁들은 한성부 종로, 남대문 등에서 투석사형 당하였고 연산군의 어린 아들들도 반정 군에 의해 죽임 당하고. 그는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병사하고 말았다.

 

 

↑조선 제11대왕 중종(中宗) 1488년(성종 19)∼1544년(중종 39).

 

■ 제11대 중종(中宗)

 

조선 제11대왕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의 휘(諱)는 역(繹), 자는 낙천(樂天),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의 2남으로 태어났다. 연산군(燕山君)의 이복동생이기도하다, 비는 신수근(愼守勤)의 딸 단경왕후(端敬王后) 거창신씨 이고, 제1계비(繼妃)는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며, 제2계비는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1494년(성종25)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는데 1506년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등에 의한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에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연산군 시대의 폐정(弊政)을 개혁 하였으며 신진사류(新進士類)를 중용(重用)하여 그들이 표방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시하려 하였다.

 

치세초기에는 미신타파를 위하여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였고 과거재도의 모순을 시정 하려고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 하였으며 향약(鄕約)을 권장하여 백성들의 상조(相助)정신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기묘사화 이후 이와 같은 문화발전을 위한정책은 거의 정지되었으며 초기의 어진정치가 기묘사화 후 간신(奸臣)들의 계략으로 혼미를 거듭 좋은 치적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그는 결국 38년 2개월의 긴 세월의 왕의 재임중 큰 치적을 남기지 못한 채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준 다음날인 1544년음력 11월 14일, 57살의 나이로 승하하니. 능은 경기도 광주(廣州)의 정릉(靖陵)으로 능원엔 중종 혼자만 묻혀 있다.

 

 

↑조선 제12대왕 인종(仁宗) 1515년(중종 10)∼1545년(인종 1).

 

■ 제12대 인종(仁宗)

 

조선 제12대왕 인종(仁宗 : 재위 1544~1545)의 휘(諱)는 호(岵), 자는 천윤(天胤), 시호는 영정(榮靖), 중종과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맏아들이다. 비(妃)는 첨지중추부사 박용(朴墉)의 딸 인성왕후(仁聖王后)이다.

 

1520년(중종 15) 세자에 책봉되고 1522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유신(儒臣)들과 옛 글을 강론(講論)했다.

제간의 우애가 두터웠으며, 중종이 병이 들자 침식을 잊고 간병에 정성을 다했다.

1544년 11월에 즉위했으나 병으로 제대로 정사를 살피지 못했다.

 

1545년 기묘사화 때 희생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기준(奇遵) 등을 신원하고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설치했다.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승하했다. 능은 경기도고양시에 있는 효릉(孝陵)이다.

 

 

 

 

 

↑조선 제13대왕 명종(明宗) 1534년(중종 29) ~ 1567년(명종 22)

 

■ 제13대 명 종(明宗)

 

조선 제 13대 왕(재위 1545~1567)이다.

이름은 환(桓) 자(字)는 대양(對陽) 시호는 공헌(共憲)이다.

중종(中宗)의 제2자 인종(仁宗)의 이복동생으로 어머니는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윤지임(尹之任)의 딸로. 중종(中宗)의 두번째 계비(繼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비(妃)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綱)의 딸로 인순왕후(仁順王后)이다.

처음에 경원군(慶源君)으로 봉해졌다가 1545년(인종 1)에 경원대군이 되었으며 인종이 죽자 그 뒤를 이어 12세로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되자 그의 남동생인 윤원형(尹元衡)등 소윤(小尹) 일파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윤임(尹任) 등의 대윤(大尹)일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명종 재위중 1547년(명종 2)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壁書事件=丁未士禍라고도 함), 1548년(명종 3) 사관(史官)

안명세(安命世)의 시정기(時政記) 필화사건(筆禍事件) 1549년(명종 4) 이홍윤(李洪胤) 옥사(獄死) 등이 일어났으며 100여명의 선비들이 참화를 당하였다.

 

한편 불교를 독신(篤信)하는 문정왕후는 중 보우(普雨)를 중용하여 높은 벼슬을 주는등 불교를 중흥(中興)시켰다

1551년(명종 6)에는 권문세가(權門勢家)들이 불법적으로 겸병(兼倂)한 토지를 몰수하여 이를 공정하게 재분배하는 등 치안. 국방. 문화창달. 경제개혁 등에 업적을 남겼다.

 

 

↑조선 제14대왕 선조(宣祖) 1552년(명종 7)∼1608년(선조 41).

 

■ 제14대 선조(宣祖)

 

조선시대 제14대왕 선조(宣祖 : 재위 1567~1608)의 초휘는 균(鈞), 휘(諱)는 공(公), 시호는 소경(昭敬), 1552년음력 11월 11일 덕흥 대원군 초(岹)와 하동부대부인의 셋째 아들로 한성 인달 방 도정 궁(都正宮)에서 태어났다.

 

하성 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1567년 명종 이후 사 없이 승하하자 명종이1565년(명종 20년)에 병석에서 밝힌 바에 따라 1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 출신이 왕위에 오른 첫 번째 사례였다.

 

비(妃)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처음에는 이 황(李 滉), 이 이(李 珥)등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국정 쇄신에 노력 하였으며 유학을 장려 하가도 하였다.

 

그러나 1575년(선조 8)이후 치정의 방향을 잡지 못하다가 북변에서는 1583년과 1587년 두차례에 걸쳐 야인(野人)의 침입이 있었다. 남쪽에서는 왜 세(倭勢)가 위협적으로 팽창하여 통신사 김성일(金誠一)을 왜국에 보내어 사정을 살피게 하였으나 당파를 달리하는 두 사람의 보고가 상반되어 국방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허송하다가 임진왜란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의주(義州)에 까지 피난을 하여야 하는 시련 끝에 명나라의 원조와 이순신등의 선전(善戰)으로 왜군을 물리 칠 수 있었으나 전후의 복구사업을 할 겨를도 없이 다시 당쟁이 일어났으니 순조로운 정치를 하지 못한 채 광해군에게 계승되었다 .

 

자료출처 : 대한민국5000년사 역대왕조실록 ㅣ 위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