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퍼진 가짜 도학의 소문
주류 문화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많은 아류 문화가 생기는 법이다. 조선시대 유교 문화도 그러했다.
홍한주는 1820년대 이래 많은 소문을 남긴 윤광현의 이야기를 전하며 서울에서 가짜 도학의 유행을 경계한다. 가짜 도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조선후기 유교 사회의 세속화 과정의 산물이다.
주류 문화에 근접하려는 문화적 욕망을 지닌 아류 문화의 표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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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원미(王元美)1)가 말했다.
“자칭 도학(道學)이라 이름붙인 자는 모두 비루한 유자(儒者)가 꾸며내는 것으로 탐욕스런 무리의 소굴이다.”
이 말은 혼란스럽고 천박하니 명교(名敎)의 죄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고금에 보면 거짓 군자, 가짜 도학으로 세상을 속이고 명성을 훔친 자들도 없지는 않았다.
근세에 남성(南城) 밖에 윤광현(尹光鉉)이란 자가 있는데 가세(家世)가 한미하여 처음부터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그런데, 경전에 통달하고 옛것을 배웠다고 자칭하고 걸핏하면 본성과 천명[性命], 이치와 기운[理氣]을 담론하는데 호학(湖學)을 주로 하였다. 그를 좇아 배우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 처도 학식이 있어 문사에 능하고 예법을 잘 말하였다. 사족 가문에서 간혹 의심스런 예법을 갖고 와서 물으면 반드시 여러 유학자들의 예론(禮論)에 의거하여 이를 취해 답해 주었다. 그 학문이 실로 윤광현보다 나았다.
하지만, 매양 본성을 논할 적에 그 처는 전적으로 낙학(洛學)을 주로 하였다.
때문에 부부가 서로 견해가 달라 반드시 언성을 높여 시끄럽게 다투다가 그쳤다.
부녀자가 예법을 설명할 줄 알고 본성을 설명할 줄 안다는 것은 옛날에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윤광현은 소략하고 괴상한데 함부로 자기를 유학자인 척하니 비웃는 사람들이 많다.
참판 유진오(兪鎭五) 경중(景中)이 나이 어려 아직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을 때 일이다.2)
한번은 여름날에 젊은이들을 데리고 용호(蓉湖)의 읍청루(挹淸樓)3)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참외를 사서 함께 먹으며 맨발로 즐겁게 놀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대나무 갓끈에 해진 갓을 쓰고 긴 도포자락을 끌며 절도있는 걸음걸이로 올라왔다. 따라온 선비들도 대여섯 명 되었다.
경중이 막 옷을 여미자 그 사람은 난간에서 경치를 구경하다 갑자기 손을 들고 돌아보며 말했다.
“강한호호의(江漢浩浩矣)4)로다.”
문생들이 손을 모아 대답하였다. “
그렇습니다.”
그리고는 서둘러 주머니를 더듬어 종이와 붓을 꺼내 곧바로 적었다.
선생이 문생들을 돌아보며
“강한호호운운(江漢浩浩云云)”
하며 말하자, 그가 말할 때마다 모두들 듣는 대로 즉시 받아 적는 것이었다.
경중이 이윽고 참외를 갖고 그 사람을 향해 나아갔다.
“강한호호(江漢浩浩)가 무어 특별한 것이 있겠소? 이것을 먹는 것만 못하오.”
그 사람은 눈썹을 찌푸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문생들을 돌아보며
“여기는 오래 머무르기 어렵겠다.”
하고는 황망히 정자를 내려갔다. 문생들도 생선 꿰미처럼 뒤를 따랐다.
나중에 들어 보니 이 사람이 윤광현이었다. 대개 거짓 학문으로 명성을 훔치는 것이 이와 같다.
옛사람은 문중자(文中子)를 성인의 우맹(優孟)이라고 했는데5) 윤광현 같은 자야말로 족히 학자의 우맹이라고 이를 만하니 우습지 않은가?
경중이 일찍이 이런 말을 내게 한 적이 있었는데 듣는 자가 포복절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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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말의 문인 왕세정(王世楨, 1526-1590)을 가리킨다.
2) 유진오는 1808년생으로 1829년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경중은 유진오의 자(字)이다.
3) 한양 서부(西部) 용산방(龍山坊)에 있던 정자.
4) “한강이 넓고 넓구나”라는 뜻이다.
陳子昻의 시에
“江漢浩浩而長流, 天地居然而不動”
이라는 시구가 있다. 여기서는 한강을 고상하게 강한이라 표현한 것이다.
5) 문중자는 수(隋)나라의 유학자 왕통(王通)을 가리킨다.
우맹은 초(楚)나라의 악인으로 초나라 재상 손숙오(孫叔敖)가 죽은 뒤 손숙오의 곤궁한 자제들을 돌보려고
손숙오처럼 행세했는데 임금과 좌우 사람들도 그를 분간하지 못했다고 한다.
문중자를 성인의 우맹이라고 한 것은 공자가 육경을 산정한 것을 모방해 왕통이 육경의 속편을 지었기 때문
이다.
- 홍한주(洪翰周),〈가도학(假道學)〉,《지수염필(知水拈筆)》
▶ 우천망한강 일부_정수영_국립중앙박물관 소장_아름다운옛서울(보림출판사) 인용
[해설]
흔히 조선시대 성리학의 삼대 논쟁으로 사단칠정 논쟁, 호락 논쟁, 심설 논쟁을 꼽는 경우가 많다.
사단칠정 논쟁은 인간의 도덕적 감정인 사단과 일반적 감정인 칠정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문제를 놓고 전개된 것이다.
호락 논쟁은 다양한 쟁점이 있지만 특히 사람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은 근원적으로 같다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다르다고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다.
심설 논쟁은 인간의 마음에 도덕적인 실천의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능동성을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마음에 대한 규율을 강화할 것인가를 놓고 전개된 것이다.
논쟁이 중점적으로 전개된 시기와 그 시대적 함의는 서로 각각 다르다. 사단칠정 논쟁은 16세기 중반 혼탁한 사화(士禍)의 시기에 인간의 도덕을 세우려는 실천적인 문제의식과 관계 있었다.
호락 논쟁은 18세기 조선사회의 경향(京鄕) 분리에 조응하여 사대부적 자아를 새롭게 형성하는 문제의식과 관계 있었다. 심설 논쟁은 19세기 후반 민란(民亂)과 양요(洋擾)의 혼란에 직면하여 유교적인 주체를 재건하는 문제의식과 관계 있었다.
논쟁의 세부적인 내용은 달랐으나 자신의 시대를 성찰하는 진지한 물음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 홍한주가 전하는 서울의 가짜 도학 이야기는 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성리학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그것은 조선사회의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난 겉모양의 성리학, 모방의 성리학, 연출의 성리학이다.
소문의 주인공 윤광현은 도무지 내력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인물로 적어도 1820년대부터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는 유학자로 보이기 위해 대단한 열성을 기울인 듯, 한여름에 정장을 하고 자기 제자들까지 대동해서 피서객이 있는 정자에 오른다. 서울의 진짜 양반은 맨발로 참외를 먹고 있는 중이지만 도리어 그는 한강을 바라보며 근엄하게 “강한호호”라는 문자를 쓰며 제자들에게 받아 적게 한다.
이 보다 더 압권은 윤광현의 집에서 벌어지는 부부싸움 이야기이다. 18세기 호락 논쟁은 어디까지나 사대부들 사이의 철학 논쟁이었는데 이제 19세기 전반에 이르면 서울에서 정체 불명의 부부 사이에 이웃이 다 들을 정도로 시끄럽게 발산되는 집안 싸움이 된 것이다.
부부 싸움을 하더라도 유식한 철학 논쟁으로 한다니 참으로 교양 있는 부부이구나, 당사자들은 이런 소문이 나기를 바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작 서울 사대부의 눈으로 볼 때에는 전통 있는 고상한 철학 논쟁이 어쩌다 이렇게 교양 없는 부부의 언쟁으로 타락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다만, 모자란 남편이 호학을 주로 하고 똑똑한 아내가 낙학을 주로 한다는 발상은 설사 이런 소문의 내용이 진실이었다 할지라도 낙학의 본거지인 서울 사대부들의 당파적인 의식이 작용한 면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홍한주가 개탄하는 모방의 성리학이 과연 그렇게 나쁜 현상이라고만 보아야 할까? 조선후기 유교 교양이 확산되면서 족보가 있는 양반 계층뿐 아니라 내력을 모르는 비양반 계층도 유교를 사용해 자신의 문화적 가치를 상승하고자 하는 열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본래적인 유교 교양을 갖추고 있던 양반 사대부들은 유교 교양의 확산 과정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계층의 어설픈 모방적인 유교 문화가
“가짜 도학”으로 우려되었겠지만, 부부 싸움도 근사하게 호락 논쟁으로 하고자 하는 신흥 계층의 유교적인 문화 욕망을 그렇게 간단히 “가짜”라고만 몰아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가짜”의 확산은 “가짜”와 차별성을 갖는 “진짜”를 다시 정립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법, 과연 홍한주를 포함한 서울 양반들은 “진짜” 유학을 어떤 문화 전략으로 만들고자 했을까. 단지 포복절도하며 “가짜”를 비웃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했을 터이다.
글쓴이 / 노관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