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학목민(聖學牧民)으로 부국부민(富國富民)을 추구 <1>
역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빨리 깨우치지 않거나,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교훈으로 배우는 데 실패한 국가나 민족은 역사가 절대 가지 말라고 저어하는 그 어두운 질곡의 터널을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는 한심한 운명에 처하고 만다.
「맹자(孟子)의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經界)로부터 시작된다.」
한국의 정신문명과 문화의식에 찬란한 창조성과 실용성을 동시에 흐르게 한 <역옹패설>을 스스로 박잡(駁雜)한 글로 ‘열매 없는 피' 같은 잡물이라며 ‘인간적 겸손'을 피력한 영원한 고려의 충신이자 지식창조자였던 익재 이제현은 몽고 지배에서 무너져 가던 고려를 혁신하고자 정치와 학문을 실재적으로 융합했다.
그래서 그는 정주학(程朱學)을 기초로 한 ‘제왕학'을 써서 자신의 주군(主君)인 충선왕(忠宣王)에게 올곧이 바친 것이 사회개혁서 <사찬(史贊)>이다. 이 책에서 이제현은 사회개혁의 핵심은 먼저 경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피력했다.
1918년 모든 토지와 경제가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약탈되고, 모든 교육은 노예지 학문으로 전락된 가운데, 전 세계 약 5,0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 펜데믹(Pandemic)이 한반도를 엄습하여 하루아침에 조선 8도는 초토화되고 말았다.
이 때 조선 독립을 가장 염원하던 당시의 선각자들은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다 함께 세워질 미래의 독립정부 비전내각을 만고도목(萬古都目) 차원에서 조각(組閣)하여 발표했다.
이 때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국무총리로는 고구려 고국천태왕 때의 명재상 을파소(乙巴素, ?~203)가 천거되었고, 대통령비서실장에는 고려 말의 지식(知識) 거목(巨木)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지명되었다.
이 두 영웅의 공통적 품성은 지금까지 모든 역사적 명재상들과 마찬가지로 부국부민(富國富民)의 가치, 정치적 품격, 민생경제와 함께 하는 겸손, 그리고 엄정한 상벌과 책임소재를 명확히 밝힌 것이었다. 또한 을파소와 이제현은 서민들 삶에서 다 함께 배고픔과 아픔을 서로 공유하고 나누었다.
◈유학에만 치우치지 않는 사상의 개방이나 실용성 강조
<익재난고>, <서정록>, <사략(史略)>, <효행록>, <익재집>, <역옹패설>등을 남긴 이제현은 몽고 지배 하의 고려조정에서 평생 다섯 임금을 보좌하며, 주군(主君)을 위해 목숨을 걸고 다섯 번이나 중국 대륙을 눈물로 배회하면서, 그들이 당한 모함과 배신, 그리고 유배로부터 구출해 내는 것에 자신의 모든 정열과 지식, 그리고 자존심까지도 희생하면서 헌신했다.
나중에 원나라 조정대신과 당대 세계적 지식인과 문화인들이 이에 감복해 고려를 비호해 줄만큼 그는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온 열정을 바쳤다. 요즘으로 보면 진정한 대통령비서실장이자 착한 관료였으며, 시대의 운명을 함께 극복하고자 노력한 좋은 정치적 동지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군(主君) 임금의 관점과 시선이 언제나 민초(民草)의 배고픔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이끌었으며, 어떤 때는 죽음을 각오하고 질타하기도 했다. 그래서 공민왕은 장인이자 대스승이었던 이제현을 유일하게 두려워하면서 신뢰했다.
실재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악랄한 원나라 지배의 격동기에 정직과 의리로 주군을 보호하며, 한편으로 시대의 아픔을 미래적 관점에서 통찰하면서 정주학의 성학(聖學)과 단군철학의 홍익(弘益)으로 식민지 고려를 혁신하고자 눈물을 흘렸다.
또한 현실적 실용정치를 추진한 역옹 이제현은 원나라 식민통치하에서도 주군(主君) 충선왕에게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맹부 서체를 도입·유행시키기도 한 그는 성리학에만 치우치지 않고 사상의 개방이나 실용성을 강조하면서 민생(民生) 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동 시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창조적 가치실용을 중시한 지식인이자 문학자였다.
그래서 그는 유교(儒敎)의 성학(聖學) 사회를 이룩하는데 성리학이 좋은 길잡이가 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정책으로 만들어 실행에 옮겼다. 그는 공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 정신을 창조적 미래비전으로 삼고, 당시 세계 지식사회를 주름잡던 ‘설총-최치원-안향'의 정신문화를 고려사회에 재현하고자 힘썼다.
문충공 계림부원군 이제현은 주자성리학을 현실정치와 민생경제에 바로 접목하여 단군(檀君)이 국시(國是)로 정한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를 고려의 국가질서로 재현하고자 몸부림쳤다.
그래서 그는 혼란하고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유교의 공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통해서 고려 사회의 민생과 도덕문제를 해결하면서 변화의 원리를 가치화 시키고자 <사찬(史贊)>을 편찬했던 것이다.
◈이제현이 소망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실용적 접목
인(仁)은 사랑, 의(義)는 공정, 예(禮)는 소통, 지(智)는 비전을 가리킨다. 그는 이 4가지 덕목을 가지고 공자가 고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몽골의 탄압으로 피폐해진 고려의 정신을 살리고자 골몰했다.
그래서 무신정권 이전의 귀족집단 기득권을 타파한 고려 원래의 모습을 바탕으로 당시 사회 전반적 문제로 횡횡하던 변절(變節)·배신(背信)·부패(腐敗)·부정(不正)·비리(非理)·부원배(附元輩)·반역(反逆)·불신(不信) 등의 ‘ㅂ'자 돌림병의 해결책을 모색했다.
인(仁)을 맹목적인 충효의 지배논리로 오도하는 대신 인간의 길, 사랑의 여정으로 가치를 재해석하여, 가까운 부모에 대한 효에서 출발하여 사회의 긍정적 가치로 효의 정신을 확장하는 배려와 섬김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義)에 대해 공자는 “나라 발전에는 반드시 백성의 배가 불러야 한다” 것을 전제하고, 경제가 잘 되려면 이(利)를 추구하는 데는 반드시 의(義)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의 견리사의(見利思義)를 먼저 강조했다.
부의 축적에 대한 공자의 생각은 의를 전제로 한 경제활동은 반드시 청빈(淸貧)이 아니라 청부(淸富)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의(義) 없이 이익만 추구하면 원망이 많게 된다면서 ‘방어리이행다원(放於利而行多怨)'을 경계했다.
예(禮)는 관계와 소통의 질서를 말한다. 공자는 예로써 가정, 사회, 나라의 문란함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공자는 예의 본질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禮)는 사치가 아니라 검약과 소통의 근본적 진정성을 말하므로, 형식과 절차보다 그 안에 깃든 진실한 마음, 즉 남을 배려하고 그와 함께 발전적으로 나가려는 의지를 말한다.
공자가 평소에 “매번 묻고 행하는 것이 예(禮)다”라고 했듯이 항상 자기를 돌아보고, 성찰하며, 먼저 남을 배려하고 남이 보지 않더라도 신독(愼獨)하는 제세를 견지하면 갈등과 불신이 사라진 진정한 사람냄새 나는 화평한 사회가 될 것이다.
지(智)는 자기 성찰의 길이다. 세상의 아픔을 함께 하려고 자신을 깎는 수양(修養)과 수련(修鍊)이 바로 지(智)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의 첫 장을 “배우고 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로 시작했다.
배움의 가치는 평생학습과 자기혁신에 있다.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으며, 서른에 뜻을 세웠고, 마흔에는 함부로 마음에 흔들리지 않았고, 쉰에 하늘의 듯을 알았으며, 예순에는 세상일을 들으면 이해됐고, 일흔에는 마음 가는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논어> <위정> 편의 교시적 메시지가 전인교육의 지(智)를 강조한다.
◈무실(務實)이 아닌 무실(無實)을 가장 부정한 행위로 간주
역옹 이제현은 이처럼 유학의 근본 가치가 당시 고려의 혼란한 난제를 극복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제현이 배우고 실천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유교 성리학의 4가지 덕목은 인격완성의 표상인 ‘군자(君子)'와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성학홍익(聖學弘益)올 전제하고 있으며, 변함없는 지혜와 가치로 거친 인간의 삶을 극복하는 슬기로운 지침을 예지하고 있다.
고려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온몸으로 섬긴 창조적인정치가요 외교관, 그리고 정부 대변인, 임금의 비서실장, 당대의 국제적인 비즈니스 CEO, 문화계 거목, 동아시아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이제현은 실용적인 유교를 정도(正道)로 믿고 이단을 배척하였다.
그리고 노력하지 않는, 무실(務實)이 아닌 무실(無實)을 가장 부정한 행위로 단정했다. 그는 학문을 하는 요령으로 “효경과 사서(四書)를 배워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道)를 익히고, 다음으로 육경(六經, 詩·書·禮·樂·易·春秋)을 배워 학문하는 생활을 온몸에 익혀 명덕(明德)을 갖추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이를 정치와 경제에 접목하여 죽을 때까지 실천했다.
그는 국가 경제의 중요성을 논하며, 최승로(崔承老)의 시무28조(時務二十八條)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를 받아들여 실천한 고려 초 성종(成宗)의 업적을 왕도정치의 한 모범으로 제시하였다.
◈최치원· 설총· 안향 이후 밝은 학문의 슬기 계승
1436년에 세종(18년)은 드디어 부왕 태종의 조정 전횡 목적의 육조직계제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권력을 분점 하는 ‘의정부서사제'를 재도입했다. 세종 시대의 권력구조 및 정치상황이 이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유교 성리정치가 진전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같은 해 5월 12일(정축)에 성균관 생원(生員) 김일자 등이 이제현·이색·권근을 문묘에 배향하기를 상소했다. 이 세 사람은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까지 가장 돈독한 사제지간이자 유교 성학(聖學)의 대표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단 한 번도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올곧은 정치와 관료, 그리고 대학자와 문학가로서 시대와 역사에 충실했다. 그 날 김일자(金日孜) 등이 올린 상소는 비록 윤허되지 아니하였지만, 고려충신으로 조선 초기까지 기피인물이었던 익재 이제현(1287~1367)이 본격적으로 학문적 사회를 선도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조선 초 젊은 지식인들은 당시 이제현을 학문과 도덕적 지도자로 인식하여,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안향(安珦) 이후 맥이 끊어진 밝은 학문의 슬기를 계승한 인물로 추앙했다.
고려 유학은 최치원· 설총· 안향 이후 세속의 교화가 무너지고 풍속이 퇴폐하였다. 그런데 성인의 도학이 막히고 유학이 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이때 익재(益齋) 문충공 이제현(李齊賢)이 나타나 훌륭하고 뛰어난 자질과 정대고명(正大高明)한 학문으로 원나라 등 당시 글로벌 인재들과 교유하여 성명(性命)의 이치를 열었다.
이러한 관점은 상소를 올린 성균관 유생들을 필두로 한 조선 초기 젊은 지식인들이 가졌던 공통된 인식이었다. 조선 초 지식인들은 이제현의 글은 문장이 되고 행함은 도덕이 되어 고문(古文)의 학(學)을 창도했다고 생각했다.
지금 21세기 창조적 가치실용 시대에 진정 우리가 희망하는 ‘먼저 변하며 알뜰하고 유능한 정부'를 만드는 미래지향적 올곧은 관점은 창조적 가치실용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2008년 1월 14일 신년기자회견에서 새로운 정부는 내각을 중심으로 일을 해나갈 계획이며 청와대는 조정기능에 한정지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새 정부는 내각중심으로 일하고, 총리는 독자역할을 맡아 자원외교 등 국가경쟁력 차원의 성장과제에 주력할 방침이다.
앞으로 국무총리는 세계를 다니며, 대통령을 보좌하는 역할에 그칠 것이 아니라 총리 자체적으로 독자적인 역할을 갖고 다양한 일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대통령비서실장의 역할 변화와 그의 능력과 역량 활용이다.
최근 새 정부는 앞으로 아무리 좋은 정책도 국민 반대하면 추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화합 속의 변화', '변화는 정부부터 시작‘, '알뜰하고 유능한 정부‘를 가장 중요한 국정 과제로 밝혔다.
그래서 이제 내각이 독자 역할로 특성화된 업무를 추진하게 되면, 대통령비서실은 가장 중요한 조정 및 평가, 그리고 정책 유도기관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다.
이제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통령의 국정을 보좌하기 위해 경제부처와 교육부 등 정부 각 부처를 직접 챙겨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청와대 업무 장악력과 기능은 확대해 나가야 한다.
앞으로 새 정부가 추진할 주요 정책의 핵심 키워드는 ‘민생과 직결되는 경제 살리기'와 ‘제대로 대접 받는 외교력 강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비서실장은 경제·교육·외교 분야 등에서 기존 틀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정책들을 대통령 정책키워드에 맞도록 ‘바꾸고, 버리고, 새롭게' 하여 정책 효율성과 적합성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하여 청와대 조직을 작고 효율적인 것으로 바꾸고, 대통령 비서실 본래의 기능과 한계를 말 그대로 대통령의 참모 조직으로 전환시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참모란 항상 그늘에 숨어 대통령과 내각 사이의 조정·연락 역할을 하며, 정책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비서실이 요란하면 정상적 시스템은 왜곡된다는 것이 호가호위(狐假虎威)의 역사적 교훈이다.
◈비서실 호가호위(狐假虎威)의 역사적 경계
이제현은 원나라의 부당한 처사에서 임금을 고려의 자존심으로 보좌했던 진정한 비서이자 정차 동반자였다. 그는 암울했던 몽고 지배 하의 부정부패한 고려의 정치·사회적 상황에서 유비와 제갈공명, 손권과 주유, 고국천태왕과 을파소, 세종대왕과 황희, 월왕(越王) 구천과 명신(名臣) 범여 등에 비견되는 진정한 비서이자 정책 동반자였다.
그리고 그는 정치·행정·외교·지식·교육·문화 등의 가치와 인간관계의 소통의 중요성을 고려 주자학의 개척자 백이정(白?正, 1247~1323)에게서 배워 이것을 고스란히 제자였던 이색(李穡, 1328~1396)에게 전수했다.
그래서 설총·최치원·안향에 뿌리를 둔 한국적 성리학의 기조가 담긴 이제현의 시(詩)·서(書)의 혜택이 조선에 양양하게 넘치도록 했고, 조선의 학문과 문학이 그로부터 시작되어 독창적인 이(理)와 기(氣)의 철학과 성리학의 실천체계가 혜강 최한기(1803~1875)의 경장사상(更張思想)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19세기 말 중국과 일본에 전 지식인들이 주목했던 혜강 최한기의 사회개혁 사상인 통민(通民)과 운화(運化)의 정치 경장론과 경제 진흥관은 사회개혁과 혁신사상으로 확장되어 신분차별, 인재등용, 과거제도, 농업 및 산업 진흥의 새로운 대동사회(大同社會)의 가치실용 사상에 근거했다.
그래서 고려 말 익재 이제현과 조선 중기 다산 정약용의 실용사상에 기초한 혜강 최한기는 <인정(仁政)>에서 청렴과 탐욕은 각자의 본성에서 나온 것으로 빈부귀천과는 상관이 없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힘써 일을 성취하는 것은 탐욕스러운 자가 할 수 있고 청렴한 자는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욕(利慾)은 악이 아니며 본성의 정당한 것이다”라고 실용의 현실적 가치를 강조했다.
◈이욕(利慾)은 본성의 정당한 가치라는 현실적 실용 인식
그러나 이제현은 청렴을 모든 성학(聖學)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 모든 것보다 자신의 주군(主君)인 임금을 모시는데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진력했다.
충선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연경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바로 달려가 자신의 주군(主君) 충선왕을 동 시대 세계 최고의 지식인 그룹에 합류케 하여 비공식 지식외교를 주도해 나갔다.
원(元)나라 연경에서 그는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원명선·요수·염복·조맹부·우집·탕병룡 등의 중원의 인재들과 어울리며 몽고의 압박을 순화시켰으며, 고려 자주방안을 강구하여 이를 후에 제자 이색을 통하여 공민왕에게 전달해 자주권을 회복했다.
그는 충선왕이 토번에 유배되자 원(元) 조정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뒤에 심왕(瀋王) 고(暠)의 고려 왕위 계승을 위한 오역사건으로 충숙왕이 잡혀가자 연경에 가서 이를 해명했으나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귀국해 지방에 칩거했다. 또한 충혜왕이 원(元)에 잡혀갔을 때는 글을 올려 사면을 청했다.
이와 같이 충선왕이 아들에게 고려왕위를 물려주고 조카 고(暠)에게 심왕위(瀋王位)를 물려준 후 공민왕이 즉위할 때까지 원(元)정권에 의한 고려 왕위의 폐위, 복위가 반복될 때마다 일선에서 고려의 왕위 보전을 위해 맨 앞에서 충성을 다했다.
그래서 이제현은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의 외교관으로 고려 정부의 뛰어난 특사 역할을 다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원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수많은 시와 글을 남겨 동아시아에 고려문화를 유행시킨 다재다능한 관료였다.
그러나 그는 당대 최고의 귀족이자 권력과 지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민초(民草)들의 신음에 귀를 기울였고, 그래서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백성들이 부르던 사리화, 거사련, 처용가 등의 노래를 기록으로 남겼다.
◈민초(民草)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그는 악랄했던 원(元)나라 밀정인 다루가치들이 전횡을 일삼던 고려 말의 혼란기를 고려의 유학적 실용정신으로 극복하고자 ‘정치-외교-문화'를 한데 묶어 사회통합과 국가개혁을 주도했던 창조족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민초(民草)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평생을 살았던 현실적인 관료이자 문화지식인이었다.
그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주목 받는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원나라에 있으면서도 늘 고려를 그리워해서 ‘송도팔경' 따위 시를 지어 고려의 산수를 널리 알리기도 했다.
그는 충선왕이 티베트로 유배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그러나 충성을 맹세를 한 그는 주군(主君)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비통함 속에서도 용기를 내고 신념을 다졌다.
그는 항상 기울어가는 나라를 걱정하며 자신의 주군(主君) 충선왕이 유배가자 “미리 막지 못한 환란 부끄럽도다. 나라 운명 붙드노라 머리만 세었어라”의 <황토점>, “예로부터 사나운 탐욕 어질고 지혜로운 이를 가려 버리는가”의 <비간의 묘>, 그리고 <명이의 노래>, <예양교> 등에서 고려의 비통함을 문학하여 자주의식을 드높였다.
나중에 오해가 풀려 충선왕이 돌아오자 권력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교외까지 나아가 주군을 맞아들였다. 충선왕의 유배가 모함에 의한 것이라는 익재의 신념은 3년이 지난 뒤 충선왕이 귀환함으로써 밝혀졌다. 그 사이 다른 신하와 관료들은 모두 변절하고 배신으로 돌아섰다.
[출처]
<혁신의창>2008/02/16/11:50 // 홍익(弘益)과 경세(經世)의 실용담
'■ 기타 > 칼 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익(弘益)과 경세(經世)의 실용적 비서실장 이제현 <3> (0) | 2010.02.25 |
---|---|
홍익(弘益)과 경세(經世)의 실용적 비서실장 이제현 <2> (0) | 2010.02.25 |
(김前대통령서거) 北조문단, 김형오 국회의장과 예정없는 면담 (0) | 2009.08.22 |
영혼이 살아있는 기업. (0) | 2009.06.02 |
이명박의 정치보복이 노무현을 죽였다. (0) | 2009.0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