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弘益)과 경세(經世)의 실용적 비서실장 이제현 <2>
1.가요를 통해 백성과 소통의 통로 마련
몽고 통치 당시 식민지배 감시자였던 다루가치들의 횡포는 극심했다. 다루가치(達魯花赤)는 원나라가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설치한 민정사찰 담당자였다. 특히 그의 정보원들의 약탈이 더 심했다.
이는 마치 일제 식민통치시대 고등계 형사의 조선 끄나풀이의 악행이 더 심했던 것과 너무나 흡사했다.
그들은 같은 고려 민초의 피를 팔아 원나라 다루가치에게 충성을 보이며 자신의 지위와 재물도 확보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이제현은 절대 꿈을 잃지 않고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 고려를 자주적 독립국가로 만들고자 임금과 함께 무단히도 애를 썼다.
그는 현실의 문제점을 회피하지 않고, 그대로 정책에 반영하여 이를 성공시킴으로써 백성과 고려 왕실 전부가 자부심을 갖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는 권문세가와 부원배, 왕실, 불교 승려의 심각한 저항에 부딪혔다.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오직 비서실장의 책무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권력 투쟁에 자신의 주군인 임금이 희생될 판이었다. 그래서 그는 적극 정치투쟁에는 가담하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임금과 백성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것에 만전을 기했다.
이제현은 민초(民草)의 소망을 바탕으로 정책을 의제(議題)한 발전된 역사적 사례들을 경험적으로 발굴하고 연구했다. 그러면서도 부원배들이 주장한 몽고풍속 도입 등 인기영합적 정책은 적극 차단해 고려의 정신을 지켜 나갔다.
그는 고려 왕실의 성공이 곧 고려 민초(民草)들의 이익이라는 점을 확산시키면서, 참담한 식민지 지배에서도 나라 전체에 긍정적 희망을 가질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고려 지배층이 모두 합심하여 통합된 의지로 혼란에 빠진 몽고에 전략적으로 대항할 것을 역설했다.
그는 자주성을 가진 고려 임금을 중심으로 전체 백성이 자신감을 가지고 나라와 민족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도록 만드는 것을 일생일대의 보람으로 생각했다.
이를 위해 이제현은 소악부 11수를 남겼다. 소악부란 요즘으로 치면 구전(口傳)으로 떠돌아다니던 민초들의 노래를 한시(漢詩)로 옮긴 것을 말한다. 민심의 흐름을 노래한 대중들이 부르던 가락에 깊은 감명을 받은 이제현은 ‘소악부 9수'와 ‘후소악부 2수'를 발췌하여 이를 한시(漢詩)로 번역해 후세에 고려 정신으로 남긴 것이다.
그리고 이를 무신정권이 끼친 해악을 극복하는 것과, 나라의 자주성을 지키고 키워 나가는 것에 슬며시 접목했다. 이 중에서 특히 ‘사리화(沙里花)'라는 노래는 21세기 서민의 관점에서도 주목을 끈다.
黃雀何方來去飛(황작하방래거비) 참새야 어디를 오가며 나느냐,
一年農事不曾知(일년농사부증지) 일 년 농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鰥翁獨自耕耘了(환옹독자경운료) 늙은 홀아비 홀로 갈고 맸는데,
耗盡田中禾黍爲(모진전중화서위) 들의 벼며 기장을 다 없애다니.
소악부 11수 중 하나인 ‘사리화'는 고된 부역과 가렴잡세, 권력자들의 약탈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의 한이 뭉친 민초(民草)들의 저항의 노래였다. 여기서 당시의 사회 부조리를 비판한 노래를 기록하고 널리 알리려는 이제현의 정의와 애휼(愛恤)의 품성을 깊이 찾아볼 수 있다.
2.문학을 통한 지식외교에도 큰 업적 남겨
한편 이제현은 원나라의 이름난 문인들,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의 지도층 인사들과 지식으로 교류하고, 고려의 자주성을 인식시켜 나갔다. 지식을 통한 실리외교를 펼친 것이다. 충선왕이 귀양 갔을 때 원나라 조정에 논리적인 탄원서를 보내 고려 왕권의 자존심을 알렸다.
또한 이제현 사후 450여 년이 지나, 박람강기(博覽强記)하여 동서고금의 책을 두루 읽고 체계적으로 연구한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1778년(정조2)에 중국을 여행하면서 청나라 여러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돌아와, 중국 전역에 퍼져 있는 이제현의 놀라운 행적을 <청비록(淸脾錄)>에 이렇게 남기며 스스로 감탄했다.
「조선사람으로서 중국 땅 전역을 두루 돌아다닌 사람으로는 익재 이제현 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 정조의 문체반정에 어긋나는 것으로 지목되어 금서가 된 <열하일기>를 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도 다음과 같이 이제현의 문학적 관점을 극히 숭상했다.
「우리나라 시인들이 사물을 표현할 때는 모두가 남의 글에서 빌려 쓸 뿐이었는데, 정말 눈으로 보고 발로 밟을 수 있었던 이로는 다만 익재 이제현 만한 사람이 없다. 비록 내가 옛날 사람보다는 낫다고 하지만, 익재에 비한다면 참말 부족한 바가 많다.」
이제현이 살았던 고려 말은 원나라 약탈과 왜구의 침탈이 극심하여 온 나라 살림이 피탈되고, 민족의 자주성이 무너지던 암울한 시기였으며, 권문세족과 지배층들의 부정부패로 민초(民草)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남을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당시 백성들의 사상과 분노, 지향과 염원을 정책과 문화로 수용하고 이를 시대정신으로 소중하게 담아 역사로 남기려 했던 진정한 혁신적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아픈 현실을 기록해 기득권 부패 집단에게 지속적으로 경종을 울렸다.
이 같은 그의 사상은 지배층에 대한 냉혹한 증오심과 백성들에 대한 뜨거운 동정심으로 일관되고 있으며, 단순한 주자성리학에만 빠진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아니라, 인간적 창조성을 가득 담은 홍익철학(弘益哲學)이 담긴 주자학이었다.
3.올곧은 권력은 신음하는 백성의 참상에 같이 분노해야
이제현은 당시 최고 귀족으로서 엄청난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도탄에 빠진 나라와 민초(民草)를 건지기 위해 고려 왕실과 고려 백성을 짓밟은 자들과 서슴없이 충돌하면서 그들을 비판했다.
신음하는 백성들의 참상을 보고 분노한 이제현은 학문과 문학에 그치지 않고, 현실 정치에 기초한 실용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당시 부원배 등 저항세력을 민심(輿論)으로 견제하고자 노력했다.
1962년에 국보 제110호로 지정된 그의 영정은 당대 최고의 원나라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렸다. 또한 그 초상화에는 그 당시 가장 존경받던 학자 탕병룡(湯炳龍)이 찬(讚)을 썼다.
「산천 정기를 타고나서 유학에 달통하며, 충성을 마음에 두고 정사를 공정히 한다.」
국제 권력 관계에서 원나라 상국(上國)의 최고 지식인이 식민지 학자이자 관료를 상대로 유독 충성(忠誠)과 공정(公正)을 언급한 것은 지금으로서도 실로 엄청난 파격이며, 상당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몸은 해동(海東)에 있으나, 이름은 세계에 넘치며, 도덕의 으뜸이요 문장의 조종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은 그의 비문에 스승이자 대학자였던 이제현을 이렇게 적었다. 고려 이제현의 사상과 학문은 애제자 이색을 통하여 조선 초기 유학과 통치철학에 큰 획을 그으며 고스란히 이어졌다. 정도전·조준 등과 달리 권력의 패자의 편에 섰던 이색은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이제현을 양심적 지식인으로 이해했다.
이색은 신돈(辛旽, ?~1371)의 개혁정치에 처음에는 적극 동참했다. 토지와 더불어 가장 문제가 많았던 교육과 과거제도의 개혁을 담당했고, 정치부패의 본산이었던 정방(政房)을 자신의 주도로 폐지했다.
또한 그는 대사성이 되어 당대의 정의와 충절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더불어 정주성리(程朱性理)의 학문을 부흥시키고, 유학적 인재를 길러냈다. 그러면서 교화(敎化)가 바로 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후 이색은 우왕(禑王, 고려 32대 임금, 1365~1389)의 사부(師傅)가 되어 이성계 일파의 ‘위장된 개혁'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이에 적극 반대했다. 그리고 ‘위화도 회군'을 군령을 위반하고 왕의 명령을 거역한 반역행위로 간주했다.
결국 그는 정도전 등의 상소로 여러 곳에 유배되었고, 끝까지 고려 충절을 고집함으로써 계속 투옥되었다. 그와 교유한 김구용·정몽주·이숭인·변안렬 등도 모두 이성계 일파와 정도전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들은 모두 이제현의 충절과 의리로 뭉친 정신적 제자들이었다. 1395년 이성계가 이색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지만 끝내 사양했다.
문하에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스승 이제현의 가치실용, 의리와 충절의 유학정신을 학문과 정치에 담아 조선에 남겼다. 바로 ‘충절·공정·도덕'의 관료의 3대 표상이었다.
4.비서실장은 조언자로서 문화와 지식을 겸비해야
이제현은 기울어져 가는 고려왕조를 자주적인 정신, 창조적 문화, 끈질긴 위국정열(爲國情熱), 군주를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과 충절(忠節), 공정(公正)과 도덕적 신념(信念) 등으로 일으켜 세우고자 국가혁신을 제안하고 추진했다.
그래서 평생을 올곧은 비서실장, 정치가, 관료, 외교관, 지식인, 문학자, 임금의 대변인으로 살았다.
또한 그는 실용적 유학의 관점에서 성리학 발전을 정치에 접목했다. 충목왕 때는 사회개혁안을 수립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교화를 정치개혁에 접목하려고 시도했다.
문학에 있어서는 도(道)와 문(文)을 본말(本末)의 관계로 파악하여 이들을 같은 선상에 두면서도 도(道)의 전달에 상대적인 비중을 높여 성학(聖學)의 홍익사회를 추구하는 정치적 수단을 발휘했다. 그는 항상 지식과 권력적 겸손을 아래와 같이 실천했다.
「내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아치 노릇을 하였으나 스스로 사면(辭免)하고 우졸(愚拙)함을 지키면서 호(號)를 역옹( 翁, 낙옹이라고도 함)으로 한 것은 큰 재목감이 못되니 오직 장수(長壽)할 수 있기만 바라는 뜻이다. 」
어느 날 충선왕이 이제현에게 “지금 경서(經書)에 밝고 덕행(德行)을 수양하는 선비는 매우 적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이제현은 엄정한 상벌에 의한 창조적 인재양성을 맨 먼저 꼽았다.
「거칠고 어두운 세상을 다스려 바로 잡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학교를 일으켜서 인재를 양성해야 합니다. 박사를 임명하여 육부(六部)의 학생을 가르치고, 비단과 명주를 상으로 내려 이를 권장하면서도, 창고의 곡식을 나누어 주어서 이들을 절실히 공부하게 해야 합니다.」
한편 이제현은 자신의 주군(主君)이 개인적 사정으로 임금의 관점을 망각하고 국정을 망치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그러한 단적인 예가 있다. 충선왕은 오래 머물고 있던 원나라를 떠날 때 매우 사랑한 여인을 잊지 못해 연꽃을 하나 꺾어 주고 후일을 기약하며 이별했다.
그러나 임금이 밤낮으로 연정(戀情)을 이기지 못하자 비서실장 임무에 충실했던 이제현은 그 여인의 정황을 살피러 갔다. 그러자 그 여인도 여전히 누(樓) 안에서 너무 충선왕을 그리워한 나머지 음식도 먹지 먹하고 말도 잘하지 못하는 지경에 처해 있었다.
「보내 주신 연꽃이 처음에는 곱디곱게 붉더니, 가지를 떠난 지 이제 얼마 되지 않아 파리함이 나와 서로 같구나.」
그 여인은 이제현을 보자 억지로 붓을 잡고 이렇게 절귀(絶句) 한 수를 써 주면서 자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충선왕에게 전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이제현은 여인의 사정을 외면했다. 만약 그대로 전달하면 충선왕은 도저히 국정을 바로 보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제현은 돌아 와 바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여자가 술집에 들어가서 젊은 사내와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어서, 만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자 충선왕은 매우 원망하여 땅에 침을 내뱉었다. 하지만 얼마간 세월이 흐른 뒤 충선왕이 마음을 다잡고 정사(政事)에 몰두하자, 나라에 큰 경사가 있는 날에 이제현은 머리를 조아리고 잔을 올리며 뜰아래 엎드렸다. 그리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갑자기 이제현의 이런 모습에 놀란 임금이 그 까닭을 근심스럽게 물었다. 이때 그는 지난 그 여인의 애달픈 시를 올리고, 그때 일을 소상하게 말하니 임금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만약 그때 이 시를 보았다면 나는 죽을힘을 다해 다시 그곳을 찾아 갔을 것이다. 경이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말을 바꾸어 한 짓이니 진실로 충성스럽고 간절한 마음이다”라며 그 자리에서 바로 용서했다. 이처럼 비서실장의 올곧은 역할 수행으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순식간에 뒤바뀐 사례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나타났다.
5.국정지표 성공은 대통령 참모진에 따라 성패 갈리기도
이명박 정부'의 첫 대통령실장으로 유우익 서울대 교수가 지명됐다. 정부조직 개편이 되면 청와대 기능이 대폭 강화되기 때문에 대통령실장 자리는 총리 이상으로 막중한 역할과 권한을 갖게 된다.
그는 새 대통령 외곽 자문기구인 ‘국제전략연구원'의 원장을 맡으면서 10년 이상 대통령의 자문역을 해왔다. 또한 한반도 대운하와 남해안 개발공약을 주도했으며, 당내 경선과 본선에서 연설문을 작성한 경력을 바탕으로 지금 대통령 취임사도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대통령과 보좌진들은 서로 간에 코드와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수시로 사안의 핵심을 정리하고 상대의 마음을 설득하고 이해하며 공감하는 커뮤니케이션 역량이 필요하다.
대통령은 방대한 국정과 함께 다양한 국내외 현안들을 신뢰 확보와 경쟁력관리 차원에서 절묘한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 따라서 대통령은 보통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극도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대통령들은 능력과 자질에 관계없이 임기 중에 폭삭 늙은 모습으로 대통령직을 퇴임하게 된다.
그러나 국가경쟁력과 미래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대통령은 임기 동안 엄청난 정신적·육체적인 열정을 직무수행에 바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선진국과 강대국을 위한 국정수행 리더십과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해도 대통령 혼자서는 절대 모든 일을 도맡아 할 수 없다.
그래서 대통령은 선택과 집중 전략 차원에서 국민통합의 저력을 국가발전을 위한 성장 동력의 확대재생산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참모진들이 대통령이 통합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국정을 장악하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판단할 수 있도록 대통령의 국정수행을 보좌·지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나가야 한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국정이 흔들리지 않고 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위기대응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수행하는 비서의 기능이 중요하다. 따라서 21세기 성공적인 국정수행은 지원·조정·통합 체제의 핵심인 참모와 비서진에게 많이 달려 있다.
보통 미국 백악관 비서실장은 모든 시간 열정과 직언을 동시에 대통령에게 바친다고 한다. 이들의 실상을 자세히 알고 보면 더욱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데, 대체로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출근하여 하루 15시간 이상 백악관에 머무르면서 대통령의 국정을 보좌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비서실장들은 체력의 한계로 겨우 2년 정도의 임기를 끝으로 사임할 정도다. 가히 살인적인 업무량을 감내하며, 최선을 다해 대통령을 보좌하고 있는 것이다.
6. 대통령이 국정 흐름을 편견과 왜곡 없이 볼 수 있게
이와 같은 대통령 비서실장의 가장 중요한 관점은 대통령이 정국흐름과 나라안팎의 사정을 편견과 왜곡 없이 올곧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비선조직이 내각을 조정하고 군림해서는 대통령이 올바른 국정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지난 모든 정권의 공통된 문제점이었으나 지금까지 계속하여 치유되지 못했다.
따라서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솔직하고 정직한 귀와 입이 되어야 할 참모의 장이기 때문에, 때때로 대통령이 불편하고 신경질 낼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느끼고 판단한 것과 외부정보를 직언하고, 어떤 때는 서로 격론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
또한 비서실장은 국정을 수행하는 국정 최고 사령탑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근무의 기본원칙을 시간개념이 아닌 업무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시간에 관계없이 정위치하여 시급한 현안을 마무리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본책무이다.
이처럼 대통령을 모시는 권력 심장부에서 일하는 관료는 비서 이전에 역사적 사명감, 시대적 책임감, 민족적 국가관, 국민적 자긍심에 입각한 자기희생의 열정을 바쳐야 한다. 여기에 대통령이 정국흐름이나 나라안팎의 당면현안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않도록 참모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직언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
반면에 사상과 이념, 정치성향을 달리하는 국민과 집단에 대해서도 가능하면 포용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절대 여론을 무시하거나 언론을 적대적 관점에서 보는 시각을 차단해야 한다.
따라서 대통령비서실장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국정성공과 희망에 초점을 맞추어 청와대 참모진을 선발·구성하고, 국가 비전의 열정을 최대한 발휘하여 대통령이 국정을 보좌할 수 있도록 운용의 묘를 적극 살려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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