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훈대부 장수현감 정헌공 묘갈명 병서(22世)
(通訓大夫 長水縣監 靜軒公 墓碣銘 幷序)
이재인『李在仁, 1418년(태종 18) ~ 미상』
송사 기우만 찬(松沙 奇宇萬 撰)
이씨댁의 준수한 선비 규환(圭桓). 규식(圭植). 약우(若雨)등 세 사람이 나란히 나를 찾아 와서「현감공(縣監公)의 이름은 재인(在仁)이고, 호(號)는 정헌(靜軒)이니, 우리 이씨가 남쪽으로 내려온 조상이요.
연전(年前-몇해전)에 그대에게 유사(遺事)를 써 달라고, 괴롭힌 일이 있는데, 비문을 지어서, 비에 각(刻)하려 하니마땅히 글을 잘하는 사람을 구해야 하겠는데, 지금 형편 같아서는 견봉「甄逢 : 당(唐)나라 제(濟)의 아들로 자기 아버지 제(濟)의이름을 국사에 남기기 위하여, 서울에 가서 친구 원직(元稙)을 통하여 대문장가인 한퇴지(韓退之)에게 서신을 보내어 글을 받았다.
그리하여 부자(父子)가 다 유명해 젔다. 같은 사람 되기를 바라는 것도 어렵고, 또 하인과 말로 멀리 여행하는 것도 때가 아니요. 비석은 이미 다듬었으니, 일을 멈출수도 없고, 하니 또 그대를 괴롭히니 유사는 못하시여도 비문은 그만둘수가 없는 일이요」하였다.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삼가 살피건데 경주이씨는 신라의 좌명공신(佐命功臣) 알평(謁平)이 그의 시조다.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이 또한 신라의 명신이었으며, 열헌(悅軒) 핵(翮)이 고려 때의 평리(評理)로서 증직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正二品)다.
동암(東菴) 진(瑱)이 검교정승(檢校政丞-명예직) 으로서 임해군(臨海君)을 봉하고 시호(諡號)는 문정(文定)이다. 바로 익제선생(益齋先生) 제현(齊賢)의 조부(祖父)와 아버지다.
익재(益齋)는 도덕과 사업(事業 : 학문과 도덕이 높은 사람이 조정에 서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려서 좋은 방향으로, 지도하는것을 말함)과 문장이 당시에 으뜸으로서 일곱 조정을 내려 섬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니 곧 공(公)에게 5대조가된다.
태학사 (太學士) 달존(達尊)은 호가 운와(雲窩)이고, 덕림(德林)은 군수(郡守)를 지냈는데, 증직(贈職)이 사간[司諫-사간원(司諫院)의 종삼품(從三品)]이고, 신(伸)은 안무사(按撫使)를 지냈고, 군수((郡守) 계번(繼蕃)은 증직이 참판(參判-從二品)이다. 공(公)에게 차례로 고조(高祖), 증조(曾祖), 조부(祖父),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 숙부인[淑夫人 : 외명부(外命婦)의 정삼품(正三品)]은 무송윤씨(茂松尹氏)니, 현감(縣監) 상(常)의 따님이다. 공(公)이 영락무술[永樂戊戌 : 1418년 태종 18)]。에 출생하였다.
재주가 뛰어나고 학식이 넓어서 일찌기 장수현감(長水縣監)이 되었는데, 정치와 교화가 군내에 넘쳐 흘렀다. 떠나고 난 뒤에는 모두 사모하여 비를 세워 덕을 길였다. 김점필재(金佔畢齋)에 따라 도의를 강론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 : 1498년(연산군 4) 음력 7월,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등이 김점필재를 처음 부터 마땅찮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의 제자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이 사록(史錄)에다 김점필재의「의제(義帝-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었는데 그것을 보고, 연산군을 욕한 것이라고 무고(誣告)하여 김 점필재의 관을 쪼개어 시체를 베고, 김 탁영(金 濯纓)을 장살(杖殺-사형방법 중 하나로, 때려 죽이는 것을 말한다)하고, 김 한원당(金 寒暄堂) 굉필(宏弼)등을 귀양보낸 사화(士禍)가 있은 뒤로는 남쪽으로 내려와 무령(武靈 : 오늘날 전남 영광군)에 숨어서 백산(白山)의 남쪽에 정사(精舍)를 하나 짓고, 꽃을 가꾸고 죽(竹-다나무)을 심어서 일생을 마쳤으니 다시는 세상에 뜻이 없었다.
후배를 양성하여 성공시키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삼았다. 수학한 사람중에서 대사헌(大司憲-從二品) 유인(有仁-둘째 동생)과 남학사(南學士) 주(趎)는 명망과 행실이 가장 뛰어났었다. 종손(從孫) 재사당 원(再思當 黿)은 또한 공에게 수학하고 김 점필재(金佔畢齋) 문하에서 학업을 마친 사람이기 때문에 화를 같이 당했다.
뒤에 승선(承宣-조선 초의 승지를 말함) 으로 공(公)을 명소(命召-조선시대 왕이 나라의 중요한 일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해 의정대신 이하의 중신들을 은밀히 부르고자 발급한 증명패이다) 하였으나 공은 나아가지 않았다. 은둔의 뜻을 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문충공의 영정(影幀-익재공의 화상을 말함)을 당에다 걸어 놓고, 추모 하였다.
그로 인하여 그집을 서원으로 만들어서 자기 자신도 맑게하고 남도 맑게 해준 사람이 많았다.
천수(天壽)를 다하여 하세하였다. 졸년월일은 전하여 지지 않고 있다. 조정에서 장례를 도와 주라는 명이 내렸다. 그의 행의를 가상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후세 사람들이 그가 살던집을 화초정(花草亭). 관개정(冠蓋亭)등으로 명명하였다.
그 뜻은 대개 꽃과 같고, 풀과 같아서 공의 손때 묻은것은 무엇이던지 사모하여 살아 있거나 돌아가서 없거나 간에 선비들이 찾아와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게다. 묘소는 그 고을 하남물(河南勿) 곤좌에 있다.
숙인은(淑人-조선 시대에, 정삼품 당하관의 아내에게 내리던 외명부의 품계)여주진씨(麗州陳氏) 참의(參議) 온(蘊)의 따님이다. 4남을 두었으니 장남(長男) 공준(公準)은 사마(司馬-생원진사시)이고, 차자(次子) 공형(公衡)은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正五品)을 지냈고, 세째 공권(公權)은 사정[司正-오위(五衛)에 둔 정칠품(正七品)] 을 지냈고, 넷째 공신(公信)은 부사(府使-從三品)를 지냈다.
따님은 감찰[監察-사헌부(司憲府)에 두었던 정육품(正六品)]봉인(奉寅)에게 출가 하였다.
아! 공이 천산(天山)에 들어가서 그림자를 감추고, 자취를 멸하였으니 비록 그 시대의 사화(士禍)가 험악하여 동류(同類)가 짝이되어 떼를지어 조정에 서지 못하였다. 그러나 십세(十世)를 내려가도록 자손에게 안전한 터전을 이루어 주었고, 공(公)도 메벼밥, 생선국 등으로 생활을 했다.
중종(中宗) 때도 거센 물결(을사사화를 말함)이 미치지 않았다. 뒤에 왜적(한일합방)의 말굽소리가 이어 닿고 발자취가 접하여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을것을 강요 당했는데, 더욱 그 근방이 심했는데도(近方-근처)의관을 갖춘 유가의 수십호(數十戶)만이 오히려 성현의 글을 읽고, 의리를 담론할수 있었던 것은 공의 선견지명에 의한것이 아니겠는가?
자손들 중에서 문학과 행실과 효도와 정렬이 보첩 기록에 끊어지지 않아서 남부지방의 명족이 되었다.
아! 성하기도 하구나 명에 가로되
높고 또 높도다. 익재선생이여!
백세(百世)의 뒤까지도 스승 되도다.
그것을 운와(雲窩)가 이어 받았으니
세세의 전한 유풍 알지니라.
五代를 지나서 공(公)의 대에 이르러
선조의 자취를 능히 잘 이었도다.
겨우 고을살이 하나를 하였지만
그 어진 정사는 봄직도 하였도다.
대현 문하에서 도를 강하니
그 공이 미쳐서 후학에 있도다.
초연하게 멀리 물러나
그림자도 감추고 자취도 숨겼으나
천산에 한마을 조용도 하여라.
꽃도 가꾸고 대나무도 심고
연잎으로 옷을 짓고, 혜초로 띠를띠어
끼친 의형(儀形) 보이듯도 하네.
일신은 미색하나 도는 형통하니
백세(百世)에 걸쳐서 꽃다움 있을세라.
하늘이 분명 보답이 있게되어
선조의 그 덕을 자손들이 이어받아
유관 쓴 선비와 유복입은 선비가 배출하니
그 혜택이 끊어지지 않도다.
하남(河南)의 묘소에
이 내몸 스스로 공경하여 꾸부리였네.
엇소! 받으시요. 생풀 한 다발을
그사람 깨끗하기 구슬과 같도다.
※「엇소!」이하는 이런 뜻이다.
시전 백구(白駒)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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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通訓大夫 長水縣監 靜軒公 墓碣銘 幷序
松沙 奇宇萬 撰
李之秀士圭桓,圭植,若雨。聯鞭過余曰。縣監公諱在仁。寔吾李南下祖。昔年煩公筆遣事。牲石之刻。宜求之作家。而見今艱虞甄逢。僕馬遠遊非時。旣伐石。事不可停。重煩於公。遺事寧寢。此不得闕。宇萬辭不獲。謹按慶州之李。以新羅佐命功臣謁平爲姓祖。蘇判居明。亦新羅名臣。悅軒翮高麗評理贈尙書左僕射東菴瑱檢校政丞臨海君諡文定。寔益齋先生齊賢祖若考。益齋德業文章。爲時冠冕。歷事七朝。諡文忠。卽公五世。太學士達尊號雲窩。郡守德林贈司諫。按撫使伸。郡守繼蕃贈參判。高曾祖禰。妣茂松尹氏。父縣監常。公生永樂戊戌(1418년 태종 18)。才俊識博。早 試長水縣監。治化溢境。去思有碑。從金佔畢講道義。戊午禍後。南遯武靈。築精舍白山之南。蒔花種竹。以畢其生。不復作當世意。成就後學爲己任。弟大憲有仁。南學士趎。名行尤卓然。從孫再思黿。亦受學於公。卒業畢門。同其禍。後以承宣召公。起不得薖軸之志。文忠影幀。置堂追慕。因以爲書院。自淑而淑於人者博矣。以天年終。年月不傳。朝家命庀喪葬。蓋嘉其行義也。後人名其居曰花草亭,冠蓋亭。蓋以若花若草。慕公手澤。而公在公亡。冠蓋相屬也。墓郡之河南坤坐。夫人驪州陳氏。參議蘊女。四男公準司馬,公衡佐郞,公權司正,公信府使。嗚呼。公色擧天山。息影滅跡。雖緣時禍蔑正。茅茹彙貞。而十世遺安。飯稻羹魚。中朝波浪不相及。及今蹄跡接武。薙緇剝膚。近沿尤然。而衣冠數 十家。猶能讀聖賢而談義理。未始非公先見之力也。嗣後文行孝烈。譜不絶書。菀然南土名族。吁盛矣。銘曰。
卓卓益齋。百世之師。承以雲窩。世風足知。五世而公。克繩祖武。薄試一縣。仁政足覩。賢門講道。功在後學。超然遐擧。息影避跡。天山一區。蒔花種竹。荷衣蕙帶。遺像可覿。身否道亨。百世芬馥。不食有報。孫承祖德。冠儒服儒。不斬其澤。河南之阡。過者必式。生芻一束。其人如玉。
자료 : 송사집(松沙集) > 松沙先生文集卷之二十六 >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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