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한국의전통문화

조선백자(朝鮮白瓷)

야촌(1) 2010. 2. 4. 02:59

■ 조선백자(朝鮮白瓷)

 

↑백자 국화무늬 주병,/시대 : 조선19세기, /높이 : 32cm

 

↑國寶 제93호 백자철화포도문호(白磁鐵畵葡萄文壺)

 

[시대]  조선시대

[문화재지정일]  1962. 12. 20

[소정처]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유자 및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유백색(乳白色)의 온아(溫雅)한 유약(釉藥) 밑에 철채(鐵彩)로 포도덩굴을 매우 활발하고 세련된 솜씨로 그려 놓았다. 포도덩굴의 잎과 줄기의 생생한 붓끝의 놀림, 포도덩굴에서 희롱하는 원숭이의 표현 등이 예사로운 솜씨가 아니다.

철화사기(鐵畵沙器)는 정부의 사옹원(司甕院)이 해마다 감조관(監造官)을 임명하여, 그가 도화서(圖畵署)의 화가(畵家)들을 거느리고 분원(分院)(사옹원(司甕院)의 분원이라는 뜻)에 나가서 어용사기(御用沙器)나 실용사기(實用沙器)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도록 했으므로, 도공(陶工)들이 그린 공예 장식적인 그림이 아니라 전문화가들의 회화적인 작품이었다.

몸체에 그린 이런 회화적인 그림과는 달리, 항아리의 주둥이 언저리에는 방간(方間)의 철채문대(鐵彩文帶)를 돌려서 이 병의 조형 효과를 정돈해 주고 있다. 또한 전아(典雅)한 항아리의 곡선이나 철사(鐵砂)의 발색(發色) 등도 매우 효과적이어서, 조선자기(朝鮮磁器) 중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귀족적 취미의 가작(佳作)이다.

현재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수준의 작품은 사옹원(司甕院) 직계 가마의 생산품으로 짐작되며, 따라서 이 포도 그림도 틀림없이 어느 저명한 도화서(圖畵署) 재적화가(在籍畵家)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國寶 제166호 백자철화매죽문대호(白磁鐵畵梅竹文大壺)

 

[시대]  조선시대

[문화재지정일]  1974. 07. 09

[소장처]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유자 및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주둥이 부분이 부서져 수리했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안으로 구부러지고, 배가 불룩하며, 굽으로 갈수록 차차 좁아진다. 문양(文樣)은 주둥이에 당초절지(唐草折枝)의 변형을 그리고, 어깨에는 연판문대(蓮瓣文帶)를 그려 놓았다.

 

몸체에는 대와 매화를 화원(畵員)의 활달한 솜씨로 그리고, 굽에는 물결문대(文帶)를 표시해 놓았다.

대는 몰골법(沒骨法)을 썼으며, 매화는 등걸을 두어 번 휘어 돌려 나무 가장자리만 힘차게 휘어 돌아간 굴곡과, 나무등걸의 양감(量感)을 나타내기 위하여 같은 방향으로 짧은 사선(斜線)을 긋고, 호초점(胡椒點)과 흡사한 점을 찍어 놓았다.

태토(胎土)는 회백색이며, 표면의 정리가 세련되어 있다. 식은테가 없는 담청색(淡靑色)을 띤 유백조(乳白調)의 안정된 백자유(白磁釉)로 시유(施釉)되어 매우 전아(典雅)한 품위를 풍기고 있다.

 

 

↑國寶 제176호 청화백자 홍치명 송죽문호(靑華白磁<弘治銘>松竹文壺)

 

[시대] 조선시대

[문화재지정일] 1974. 07. 09

[소장처] 서울 중구 필동3가 26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유자 및 관리자] 동국대학교

 

약간 내경(內傾)한 듯한 주둥이가 나직하고, 어깨는 풍만하며, 몸통 아랫도리가 잘록하다.

바닥이 다시 퍼진 형태로, 조선(朝鮮) 초기 항아리의 전형적인 보기이다.

주둥이에는 연당초문(蓮唐草文)이, 어깨에서부터 몸통 아랫도리에 걸쳐 송죽문(松竹文)이 능숙한 원례화풍(院禮畵風)으로 그려져 있고, 바닥 뒷면에 선 하나를 그어 문양(文樣)을 마무리하였다.

 

유약(釉藥)은 담청(淡靑)을 약간 머금은 뽀얀 백자유(白磁釉)가 시유(施釉)되어 있고, 기면(器面)의 정리도 매우 세련되어 있다.

 

원래 전남(全南) 구례군(求禮郡) 화엄사(華嚴寺)에 전해져 오던 명품인데, 2번이나 도난당했던 것을 찾아 동국대학교박물관(東國大學校博物館)에 옮겨 놓았다.


주둥이 가장자리의 안쪽 측면에 '홍치이년(弘治二年)'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었는데, 도난 때 깨어져 '홍치(弘治)' 2자만 남았던 것을 수리 복원하면서 '이년(二年)'을 다시 첨가하였다.

 

 

↑國寶 제219호 청화백자매죽문호(靑華白磁梅竹文壺)

 

[시대] 조선시대

[문화재지정일] 1984. 08. 06

[소장처] 서울 용산구 한남동 748-18

[소유자 및 관리자] 이건희 / 관리자 : 리움미술관

 

약간 내경(內傾)된 직립식(直立式) 주둥이에 어깨는 팽배하고, 아랫도리가 잘록하게 좁아졌다가, 다시 약간 퍼지듯이 바닥에 이르러 동체(胴體)의 선(線)이 마치 s자형(字形)을 이루고 있는 항아리이다. 문양은 밝은 청화안료(靑華顔料)를 써서 주둥이에 화문(花紋)과 「◎」문을 서로 돌아가며 그렸고, 어깨와 아랫도리에는 화려한 연판문대(蓮瓣文帶)를 돌렸다.

 

동부(胴部)에는 사실적이면서도 희화적(戱畵的)인 수법으로 매화(梅花)와 대나무 절지(折枝)를 꽉 차게 주문양(主文樣)으로 그렸다. 대나무 잎과 줄기를 쌍구체(雙鉤體)의 세선(細線)으로 섬세하게 포개어 그린 다음 설채(設彩) 하여 구륵진채법(鉤勒眞彩法)으로 그려 놓았다.

 

기벽(器壁)은 두껍고 묵중하며, 유색(釉色)은 광택이 있는 담청색(淡靑色)의 백자유(白磁釉)가 곱게 시유(施釉)되어 있고, 굽다리에는 가는 모래받침으로 번조(燔造)한 흔적이 있다. 중국(中國) 명(明) 나라의 청화백자(靑花白磁)가 조선조(朝鮮朝)에 도입되는 과정을 잘 보여 주는, 15세기 중엽의 초기 청화백자호(靑華白磁壺)로서, 당당한 기형(器形)과 문양 등 유례가 없는 가품(佳品)이다.

 

경기도(京畿道) 광주(廣州) 일대(一帶}의 도마리(道馬里),·무갑리(武甲里) 등 요(窯)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와 비슷한 청화백자매죽문호(靑花白磁梅竹文壺) 상반부(上半部) 파편(破片)이 1976년 종로구(鐘路區) 관철동(貫鐵洞)에서 출토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國寶 제263호 청화백자산수화조문대호(靑華白磁山水花鳥文大壺)

 

[시대] 조선시대

[문화재지정일] 1991. 01. 25

[소장처] 서울 중구 장충동 89-1

[소유자 및 관리자] 우학문화재단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백자 항아리로, 크기는 높이 54.8㎝, 아라리 지름 19.2㎝, 밑 지름 18㎝이다.

아가리 부분은 수직으로 낮게 있으며, 부드럽게 팽창하여 어깨부에서 팽배되었다가 서서히 좁아진 후, 몸통 아랫부분에서 약간 벌어져 바닥면에 이른다.


항아리의 양감이 풍부하고 아랫부분이 좁아서 보기에 준수하며, 몸통 가운데에 위·아래를 따로 만들어 붙인 흔적이 있다.
몸통 윗부분의 4곳에 푸른색 안료로 4개의 반원를 연결시켜 만든 마름모 형태의 꽃 창을 큼직하게 그린 다음, 그 속에 산수문과 화조석문을 교대로 그려 넣었다.

 

각각의 꽃 창 안에 도안화된 ‘富’자를 넣어 사다리꼴로 연결시켜 놓았으며, 꽃 창 사이의 위·아래 4곳에도 역시 도안화된 ‘수(壽)’자와, ‘강(疆)’자가 들어있는 원이 있다. 유약은 투명하고 광택이 좋은 백자유로 전면에 고르게 칠해졌고, 표면의 색조는 엷은 회백색이다.

형태가 아름답고 푸른색의 청화 안료로 그린 사실적인 문양들이 우수하고 다양하여, 이 무렵 대표적인 백자 항아리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國寶 제294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靑華白磁鐵砂辰砂菊花文甁)

 

[시대] 조선시대

[문화재지정일] 1997. 01. 01

[소장처]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소유자 및 관리자] 전성우

 

하나의 작품에 진사(辰砂)· 철사(鐵砂)· 청화(靑華)를 함께 곁들여서 장식한 한국 도자기는 이것 외에는 거의 예가 없다.
온화한 백자 바탕에 투명한 유약을 약간 두껍게 씌워서 전신에 온건한 유열(釉裂)이 있으며, 색감도 부드럽게 조화되어 있다.

 

이러한 종류의 조선시대 병 가운데에서는 최고의 작품이며, 간명소직(簡明素直)하게 끊어낸 병 입의 마무리와 가늘고 긴 병 목의 비례도 보기 좋다. 병의 앞 뒤 양면에 회화적으로 구성된 국란봉접(菊蘭蜂蝶) 무늬를 돋을무늬로 나타내고, 그 돋을무늬의 국화는 진사로, 국화 줄기와 잎은 철사로, 난초는 청화로, 벌과 나비는 철사 또는 진사로 채색했으며, 그 발색(發色)효과도 매우 순조롭다.

 

굽다리에만 내화토(耐火土)가 약간 묻었을 뿐 전신이 완전하게 보존된 전세품(傳世品)으로, 개성(開城)지방에서 온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유태(釉胎)의 질과 빈틈없는 조형의 격조 등으로 미루어 보아 광주관요산(廣州官窯産)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1996년 11월 28일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에 의해 보물 제241호에서 국보 제294호로 등급이 조정되었다.

 

자료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