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운리
▲ 영창대군 묘 후경.
●영창대군(永昌大君)
1601(선조 34)~1614(광해군 6)
조선 제14대왕 선조의 적자(嫡子). 이름은 의(㼁). 어머니는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광해군의 이복동생이다.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은 적장자가 아닐 뿐더러 명(明)의 책봉도 받지 못했다는 명분상의 약점이 있었다.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유영경(柳永慶) 등의 척신과 소북(小北) 세력이 세자의 개봉(改封)을 건의했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임종 전에 유영경·한흥인(韓興寅)·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 등 7대신에게 영창대군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정권(大北政權)은 임해군(臨海君)을 살해하고 유영경 등을 파면시켰으며, 왕권을 위협하는 첫 번째 인물로 영창대군을 지목했다.
1613년(광해군 5) 강변칠우(江邊七友)의 은상(銀商)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이이첨은 박응서(朴應犀) 등을 사주하여 강변칠우들이 은을 모아 김제남을 영입하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고변하게 했다. 이 일로 김제남은 사사(賜死)되고 7대신들도 처벌당했으며,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 안치되었다.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곽재우(郭再祐) 등이 혈육 간의 정분과 연소함을 들어 '전은'(全恩)의 논리를 폈으나, 대북세력의 다수는 '토역'(討逆)의 논리를 내세워 죽일 것을 주장했다. 결국 이항복 등이 유배를 당하고, 그는 이듬해 대북정권의 명령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살해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출처>다음 백과사전)
'■ 보학 > 선현들의 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조순 선생 묘. (0) | 2009.10.01 |
---|---|
권균(權鈞) 선생 묘역 (0) | 2009.10.01 |
강민공(剛愍公) 이완(李莞) 묘역(이순신 장군의 조카) (0) | 2009.09.14 |
김면장군 묘(金沔將軍 墓) (0) | 2009.08.30 |
송암 김면(松庵 金沔)의 나무 덧널. (0) | 2009.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