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민공(剛愍公) 이완(李莞) 묘역 답사기
강민공(剛愍公) 이완(李莞)의 묘역은 아래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다싶이 경기도 용인시 고기동 산 20번지 1호에 있다. 이곳은 고기초등학교가 있는 손기부락의 서쪽 산속 손골(上蓀谷)로 넘어가는 산길 옆에 위치 한다. 지금은 영덕 - 양재간 자동자 전용도로 건설로 인하여 공의 묘역이 속해있는 덕수이씨 종중산이 잘리어 나간체 한창 공사중이다 .
▲강민공 이완 정려각剛愍公李莞旌閭閣)
당초에는 덕수이씨 강민공파 종손댁(이재억씨 작고) 집 앞에 있던 것을 2003년도에 이곳 선산으로 옮긴 것
이다.
▲정려각의 편액
[원문]
忠臣 贈資憲大夫 兵曹判書兼 知義禁府事行嘉善大夫義州府尹 義州鎭兵馬僉節制使 贈諡剛愍公李莞之閭 崇禎紀元再甲周立 上之十八年春重修 癸未年 秋 築造.(충신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행 가선대부 의주부윤 의주진 병마 첨절제사 증 시 강민공 이완지 려 숭정기원 재 갑주 립 상지 십팔 년 춘 중수 계미년 추 축조)
[국역]
충신 이완에게 증직으로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내린다. 실제 벼슬인 가선대부 의주 부윤 의주 진 병마첨절제사에게 시호를 강민이라 하고, 정려를 내리노라!
명나라 의종황제 기원 후 두 번째 갑년에 세우니 상지18년 봄에 중수하고 계미년 가을에 축조하다.
(숭정기원 1628년 戊辰, 명나라 말대 의종황제의 연호, 이 정려는 청나라 지배시절에 세워졌다)
▲시호(諡號) 강민(剛愍)의 뜻!의(義)를 지켜 굴(屈)하지 않음이 剛이요. 백성들로 하여금 슬픔을 금치
못하게 하였으니 민(愍)이라 한다.
▲향토유적 이완묘 이정표
바로 이 이정표 맞은편이 이공의 후손 이재정씨의 집인데 주변이 모두 전원주택 단지이며 이곳 산길을 따라
서쪽으로 산을 넘으면 동천리 상손곡(上蓀谷) 부락이고 화살표 방향으로 150m산길을 따라 가면 곧바로 공
의 묘소에 다다른다.
▲아래에서 위를 쳐다본 전경이다.
우선 공의 가계(家系)를 살펴보면 강민 공은 덕수이씨 시조 돈수공의 12대손이 되며, 조부는 정(貞>秉節校尉)이며 父는 희신(羲臣) 으로 아우 요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을 둔 4형제분 중 맏이로 충무공(忠武公) 순신舜臣)이 강민공의 둘째 숙부가 되신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공의 아버지 형제분들의 함자가 모두 고대 중국 전설상의 성군들 이름자라는 것이다. 父는 羲 :복희씨, 삼촌들은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을 뜻하였으며 신하 신자를 넣으니 모두 성군의 신하들이란 뜻이 된다.
▲묘소 앞에 세워진 게시판
어느 성씨, 어느 종중이나 자신의 조상을 높이기에 급급하여 모두들 좋은 내용이나 과장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해서 만 부득 여기에는 국사대사전을 기본으로 하여 싣고, 기타 공개적으로 게시되어 있는 인터넷 자료를 바탕으로 사실에 가까운 내용만으로 간추려 올린다.
일찌기 명나라 장수중에 모문룡(毛文龍)이란 놈이 있었다. 당시의 조선은 인조대왕이 이끄는 조정의 정책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들어선 친명배금(親明排金) 주의자들이었고, 그렇다고 후금과 싸워 이길 군사력도 국력도 없었다.
이때 청 태조 누루하치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요하(遼河) 이동을 유린하니 자연 명나라는 만주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앞서 모문룡으로 인해 골치를 앓던 광해군은 모문룡의 일당을 철산 앞바다에 있는 가도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자연 그곳으로 청나라에 함락된 요동일대의 중국인들과 군사들이 가도로 밀려들었고 그 수효가 10만에 달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하나의 작은 섬을 거점으로 명나라나 모문룡은 되지도 안을 요동수복을 계획하였다. 그 가도도 우리조선의 영토였는데 한 술 더 떠 육지로 올라와 둔전을 설치하는가 하면 철산, 용천, 의주 등지로 횡행하며 식량을 구걸하고 응하지 않으면 관아를 습격하거나 민가를 약탈 하는 사건이 빈번했다.
광해군은 후금의 보복이 두려워 모문룡에게 요민(遼民)들을 산동지역으로 이주시키라고 요청 했지만 그는 이를 묵살했고 광해군은 그들의 식량과 군수물자 제공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니 자연 모문룡은 광해군에게 이를 갈게 되었고 훗날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반정공신들은 모문룡의 힘을 빌어 명나라 조정에 반정의 정당성을 승인 받게 하였으니 일약 조선의 은인이 되고 말았고 이때부터 모문룡의 행패는 극에 달했다.
자연 눈엣 가시인 그들을 축출하라는 청나라의 경고를 무시하고 끝끝내 친명정책을 고수하고 후금과 친선교린을 배척한 조선을 치기시작 하는데 그것이 훗날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인 것이다.
◈강민공 이완에 대한기록
자(字)는 열보(悅甫) 본관은 덕수(德水) 통제사 순신(舜臣)의 조카이다. 20세에 순신을 도와 싸움에 공을 세웠고 노량(露梁)해전에서 순신이 적탄에 맞으매 시신을 안아 선실에 눕히고 장군의 서거를 밝히지 않고 전쟁을 독려하여 드디어 적을 몰아내고 전승(戰勝)을 기하였다. 1599년(선조 32) 무과(武科)에 급제 하고 인조조 초에 수사(水使)가 되어 군사를 몰아 이천(利川)에서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에 올랐다.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어 모문룡(毛文龍)의 군사들이 촌가에 나가 해를 끼침이 심하므로 공이 분함을 참지 못하여 곤봉(棍棒)으로 때린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켜 위계 한계급의 강등을 받았으며 이로부터 모문룡과의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정묘호란(丁卯胡亂)때에 청군(靑軍)이 의주를 포위함에 적과 싸우다가 부상 당하여 승산이 없으므로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종제(從弟:사촌아우) 신(藎)과 더불어 불에 뛰어 들어가 죽었다.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추증하고 정문(旌門)을 세워 충의(忠義)를 표하였다. <인조실록. 조선인명록>
▲의주부윤 강민공 이완의 묘.
▲묘표(墓表)
嘉善大夫 義州府尹 贈 兵曺判書 李莞之墓 貞夫人 坡平尹氏 祔左
(가선대부 의주부윤 증 병조판서 이완지묘. 정부인 파평윤씨 부좌)
▲강민공 묘비 석
嘉善大夫 義州府尹 贈 兵曹判書 德水李公 諱 莞之墓 貞夫人坡平尹氏 祔左
▲산신제 상석(山神祭床石)
이 산신제 상석은 대부분 산소의 오른쪽 윗부분에 따로 설치하는데, 조상의 산소에 제사를 드릴 때 먼저 산신제를
올려 산을 다스리는 산신 즉, 토지신께 산소의 안녕을 비는 곳이다. 그 산신제 축문의 내용이 집안마다 다소의 차
이가 있겠지만 간략하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전문생략---敢昭告于 土地之神 恭修歲事偶 今爲 O O代祖考 某官某公 之墓 惟時保佑 實賴神休 謹以 淸酌
脯醯 祗薦于神 尙饗。
▲강민공 이완 묘소의 끈겨진 혈장 산 모습
이 공사 현장은 영덕 - 양재간 고속도로의 공사현장으로 저 터널은 <낙생터널>이라 명명되어 표기되어 있다.
용인 땅의 지명을 낙생이라 한 것도 못 마땅한데 더우기 산소의 용미로 부터 불과 20여m 위에서 산줄기가 동
강나 아픈 마음을 금출 수 없었다.
▲공사현장 모습(영덕 - 양재간 고속화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 산을 내려오며 생각하다.
나라의 변경을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장수의 본분인데 그것도 내나라 내 땅에서 내 백성들을 핍박하고 재물을 빼앗는 걸 징벌했다 하여 그를 강등시켜 벌해야 한다면 그 누가 목숨을 바처 나라를 지키랴! 아무리 명나라의 눈치를 봐야 한다지만, 그때는 이미 기울어 버린 명나라요. 모문룡 일당은 일개 화적패에 지나지 않는 오만 방자한 무부요.
난민에 불과한데 어쩌자고 충신을 벌 하였던가? 인조대왕과 그 조정대신들은 그저 권력 유지에만 급급한 나머지 공을 적당히 다른 곳으로 전직을 시켜 둘러대면 될 일을 이렇듯, 충신을 욕보였으니 ...조선이란나라는 그런 나라였구나. 그 되지못한 명나라는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은혜를 베풀었던가?
임란 때도 원군을 보내 와서는 군량을 우리가 모조리 댔고 제대로 싸우지도 안았으며 그 행패가 지독했다고 서애 유성룡의 서애집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런 때문에 왜군을 처 부순 건 우리조선군이요. 이순신 장군이었지 결코 명나라 군사가 아니었다.
그러니 명나라는 적당히 왜군의 퇴로를 열어 주려했고, 강화를 맺으려 했던 것을 이순신은 한사코 아니 된다며 침략해온 죄를 물으려 했던 것이다. 그 명나라가 의종 때 망할 때, 까지도 이 땅의 특산물과 조공을 받아 갔으며 나랏일에 사사 건건 간섭한 나라다.
그 명나라가 이미 망해버린 훗날에도 이 땅의 친명배금(親明排金) 사대주의자들은 오로지 명나라만 주문 외듯, 그리워했고 각종 문물과 산업을 새롭게 일으키는 청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돌아서서는 오랑캐라 눈을 흘겨가며 저주 하였다.
그러니 병자호란에 항복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고생을 하면서도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을 배워 돌아와 나라를 새롭게 부흥시킬 절호의 기회 마져 꺾어버린 나라 조선국.... 아비와 신하들이 부동이 되어 세자를 독살시킨 이 나라 양잠, 관개, 수리, 농법, 유통 등 다양한 분야에 걸처 고치고 개혁해서 백성이 잘 먹고 잘사는 정책을 펴자는 게 죄란 말인가?
그리만 했다면 백성들의 삶이 한층 부유해지고 나라는 튼튼해 졋을 것인데 ....그리되면 기득권들의 실권이 무너지게 되고 권력을 잃게 되니 신하들은 그래서 그런 것이고 인조는 아들에게 왕위의 위협을 느꼈다니 ..그래서 죽인 거라니 ~ 어이가 없다.
말로는 그랬다 한다, 어찌 유학(儒學)의 나라에서 오랑캐의 습속을 따르겠는가? 실로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요. 망하지 안을래야 안을수 없는 집단들이었다. 그렇게 나라를 망처 놓고 여자들이 모두 청나라에 잡혀가 노리개로 짋밟혔다가 강화되어 돌아오게 되니 그때 뭐라 했던가? 뭐라 더러운 화냥년이라구?
갈 곳이 없어 망연자실한 수 천명 여인네들 ... 급기야 왕명으로 환향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벼슬을 떼겠노라 하니 그때서야 마지못해 집안에 들였다는데 이게 도대체 인간들의 나라였더냐?.
혹자는 만약에 당신 집안에 깡패가 들어와 당신의 아내와 딸을 유린 할 적에, 당신은 도망을 갔거나 주먹 한번 써 보지도 못하고 벌벌 떨다가 주저앉아 버리고서는 기껏 더럽혀진 여자라 해서 내쫒을 것인가? 아니, 당신이 죽어야 마땅하고 당신이 내쫒겨야 하늘의 올바른 이치일 것이다.
그래 가정이든 나라든 외침을 막는 것은 사내의 몫이고 집안에서 살림하고 애 낳는 것은 여자의 몫이다. 그 중대한 남과의 싸움에서 기껏 지고서는 여자들한테 그 화풀이를 했다니... 니덜이 그러구서도 선비냐? 자신의 며느리, 딸, 아내가 그럼 제서방 제 아비를 의지하지 누굴 의지 한단 말인가?.
저들은 청나라 군사가 몰려올 때, 나가 싸우지도 않았단다, 고작 종놈들이나 등 떠밀어 내보내고 도망가기 급급했고 더러 나갔어도 도포입고 종이를 들고 나간 놈이 허다했다니 소가 웃을 일이다. 훗날에도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등의 실학자들이 혹독한 박해를 받고 오로지 국가는 왕과 몇몇 권력자를 위해서 존재했던 나라 조선... 왜 국민이 좀 잘 살면 안 되는 건지 그 이유를 묻고 싶다.
그저 오로지 선비랍시고 거드름이나 피고, 생업에는 하나도 쓸데가 없는 성리학이나 주절대고 무관이나 기능인을 천하게 여기며 거기다가, 걸핏하면 모질게 벌을 주거나 죽여 없에기 일쑤요. 조정 벼슬아치 들이란게 모조리 파당이나 만들어서는 허구한 날 제사는 어찌 지내야 하구. 상복은 어찌 입어야 허며 친상에는 3년 동안 시묘를 살아야 합네. 했으니 ~ 이러고서도 안 망해?
내 역시 제사를 모시는 사람이지만 그건 아니다. 아 ~ 맞구나 ... 옳았구나 ~ 광해군이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교묘한 외교정책으로 나라를 보전하려 했던 그 깊은 뜻이 과연 옳았다는 사실에 거듭 탄식을 금할 수 없어 공의 묘소에 다시 한번 읍하고 내려 와야만 했다. <출처 : 주막집 ㅣ 글쓴이 : 江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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