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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대감 이항복의 유적지를 찾아서~~~

야촌(1) 2009. 7. 26. 16:51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9) 오성대감 이항복의 유적지를 찾아서(上) 

 

<떡잎부터 유별났던 국난타개 영웅>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일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삶을 제대로 평가하여 역사적 지위를 올바르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일처럼 의미 있는 일이 있을 것인가. 조선 중기 명종 11년인 1556년에 태어나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63세로 서거했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백척간두에 서있던 나라를 구하고 학문과 문장 및 탁월한 경륜으로 나라를 중흥시킨 위인이다.

 평가해준 후학이나 후배들이 있었기에 실행했던 일에서 크게 부족함이 없는 역사적 평가를 받아 후세에 길이 큰 이름을 전하는 몇 안되는 인물 중의 한 분이다.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 있는 화산서원.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635년 창건된 서원으로 고종 시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으로 헐렸다가 1971년 복원됐다. /사진작가 황헌만

이른바 조선 4대 문장가 중의 한 분인 계곡 장유(張維·1587~1638)는 대제학에 우의정이라는 높은 지위에 오른 분으로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의 서문을 썼는데, 그 글에서 하늘이 백사공을 태어나게 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어려운 국난을 해결할 수 있는 뛰어난 인물을 내어서 책임을 맡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고 그의 위대함을 설명해주었다.

 

장유는 또 다른 글 ‘오성부원군이공행장(鰲城府院君李公行狀)’이라는 장문의 이항복 일대기에서 “공은 나라를 유지케 하였고 은혜와 혜택은 백성들에게 미쳤으며 맑고 깨끗하기는 빙옥(氷玉)과 같았고 높은 산악처럼 무거웠으니 국가의 주석(柱石)이자 사류(士流)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었다”라는 높은 찬사를 바쳤다.

 

4대 문장가의 또 다른 한 분으로 대제학에 영의정이라는 고관을 역임한 상촌 신흠(申欽·1566~1628)은 이항복과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인품과 능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장유보다는 훨씬 선배이면서 이항복에게는 10년 후배인 그는 ‘오성부원군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는 글에서, 백사가 63세로 세상을 떠나자 귀양지인 함경도 북청에서 선산이 있는 경기도 포천에 장사를 지낼 때까지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지위의 고하를 묻지 않고 모두 찾아와 울고 절하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장사를 지낼 때에는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군·관·민이 모두 찾아와 통곡하면서 제물과 제문을 바치는 사람이 끊일 줄을 몰랐다고 하였다. 위대한 위인의 죽음에 애도의 행렬이 이어졌는데, 그의 높은 인품을 방증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백사 이항복의 일생

경주이씨로 참찬(參贊)이라는 고관에 오른 이몽량(李夢亮)과 전주최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백사는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자라면서는 해학에도 뛰어나 만인의 귀염을 받았음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더구나 20세 전후하여 5세 연하의 당대의 위인 한음 이덕형(李德馨·1561~1613)과의 친교를 통해서 ‘오성과 한음’의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오성과 한음은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하여 같은 조정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승승장구로 벼슬이 올랐지만, 두 사람의 넉넉한 아량과 국량 때문에 서로 간에 경쟁관계임을 잊고 세상을 뜨는 날까지 한치의 어긋남 없이 대제학에 이조판서와 영의정에 오르는 고관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면서 국가의 난국을 해결하는 데 동심협력하여 지혜를 짜내 임진왜란과 광해군의 폭정을 극복해내는 경륜을 발휘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역사에 전해주고 있다. 백사는 9세에 아버지를, 16세에는 어머니를 잃는 불행을 당한다.

 

갑자기 고아가 된 백사는 실의에 빠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큰 뜻을 이루려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백사는 태어날 때부터 일반적인 출생과는 달랐다고 한다. 태어나 며칠 동안을 젖도 빨지 않고 울지도 않았는데 점쟁이가 듣고는 반드시 정승이 될 사람이라고 미리 점을 쳤다는 것이다.

 

영의정을 지낸 고관인 권철(權轍)은 이항복의 이웃집 노인이었다. 앞으로 국가의 기둥이 될 인물임을 알아차린 권정승은 아들 권율(權慄)에게 사위를 삼도록 권하여 백사는 19세에 권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권율이 누구인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이룩한 충장공 권율 장군이 아닌가. 백사와 권장군이 살던 곳은 당시 서울의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의 필운대(弼雲臺) 아래에 있던 곳이다. 지금은 종로구 필운동 88번지로 배화여고의 교정으로 포함된 지역이다.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 소재하는 필운대(서울 문화재 자료9호) <사진 : 나홀로테마여행>

 

골목대장이던 백사는 도원수이자 문무에 능한 권율의 사위가 되면서 더욱 공부에 힘쓰고 노력하여 선조 13년인 1580년에 25세로 알성시 병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이 해에 이덕형도 20세로 을과 1인으로 급제하여 함께 벼슬을 시작했다.

 

다음 해에는 한림학사가 되고, 28세에는 율곡 이이(李珥)의 추천으로 이덕형과 함께 호당에 들어가 독서하고 또 홍문관인 옥당의 벼슬아치로 천거받았다.



율곡의 뛰어난 안목



사람은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그 잘남과 똑똑함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발신(發身)할 길이 없다.

백사 같은 뛰어난 인물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어떻게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율곡은 백사보다 20세 위의 대선배로 그때 대제학의 자리에 있었다.

 

율곡은 대제학으로 있으면서 7인의 당대 인물들을 추천하여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영광을 안게 하였으니 7인 모두가 뒷날 고관대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도 큰 역할을 하는 위인들이 되었다.

뒷날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沈喜壽), 대사헌을 지낸 홍이상(洪履祥), 좌의정에 오른 정창연(鄭昌衍),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병조참판에 오른 이정립(李廷立), 참찬(參贊)에 이른 오억령(吳億齡)이 그들이다.

 

이항복· 이덕형· 이정립은 동방급제로

이른바 경진(庚辰)년의 동방이어서 ‘경진3인’이라고 일컬었으니, 요즘 말로는 ‘삼총사’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율곡처럼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기에 백사나 한음은 발탁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 벼슬을 지내며 경륜을 쌓던 백사는 35세인 선조 23년에 마침내 당상관인 동부승지에 올라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시종신(侍從臣)이 되었다. 37세인 선조 25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도승지로서 임금을 모시고 임진강을 무사히 건넌 공을 인정받아 이조참판에 오르고 오성군의 군봉을 받았다. 바로 이어서 평양에 도착하자 형조판서에 오르고 병조판서로 옮겨 왜군 격퇴의 지휘봉을 쥐게 되었다.

 

40세에는 이조판서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높은 지위에 올랐다. 전란 동안에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군권(軍權)을 잡고 적군을 물리치는 최대의 지혜를 발휘하였고 다정한 친구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 군대의 원병을 요구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병조판서라는 직책에 있으면서, 명나라에 들어가 명나라 황제를 설득하여 지원병이 들어오는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망한 나라가 중흥의 길이 열린 것은 바로 백사의 이런 경륜과 지혜에서 나왔다.


임진왜란 중에 이보다 더 어려운 난국은 중국의 정응태(丁應泰)라는 사람이 조선을 무고하여 조선이 명을 침범한다는 거짓 보고를 올린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에서 조선을 적국으로 여긴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선조 31년 마침내 우의정이라는 정승에 오른 이항복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필마단기로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설득하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혀내 끝내 명과 조선이 틈을 메우고 친한 이웃이 되어 왜군을 물리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영의정에 오르고 왜군을 물리쳐 나라를 구해낸 공로가 인정되어 호성일등공신이 되어 오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래서 백사 이항복은 ‘오성대감’이라는 명칭으로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가다.


나라를 중흥시킨 뛰어난 호성공신은 세월이 변하자 역적을 추천했다는 누명을 쓰고 낯설고 물선 먼 북청땅으로 귀양길에 오른다. 파란만장의 선조가 붕어하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외교적 역량은 우수했으나 내치에는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말았다.

 

당파싸움이 치열해지면서 광해군은 이복형제를 죽이고 어머니 왕비를 폐비하는 큰 난리를 일으킨다. 이에 격분한 노대신 이항복은 굴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쓴 항거에 나섰다. 이항복을 참수하라는 상소가 나오고, 끝내는 탈관삭직되어 망우리로 옮겨 은거했으나 유배명령을 받고 북청으로 떠나야 했다.

 

63세의 노 정승이던 백사, 북청으로 가는 길에 눈물을 뿌리며 읊었던 시조는 지금의 우리 가슴도 슬프게 해준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원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의롭고 바른 말 한다고 늙은 재상을 귀양보내던 그 악인들, 63세의 노인 백사는 1618년 1월18일 회양의 철령을 넘으면서 피눈물이 솟아나는 시조를 읊었다. 그해 2월6일 유배지 북청에 도착한 백사는 뛰어난 시 한 수를 읊었으니, 그 마지막 구절이 너무나 답답한 심정이다.


‘겹겹이 싸인 산들이 정말로 호걸을 가두려는데(군山定欲囚豪傑)/ 고개 돌려 일천봉우리 바라보니 갈 길을 막는구려(回望千峯鎖去程)’라고 읊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막혔으면 그런 시를 지었으랴.



유배지에 도착한 후 3개월째인 1618년 5월13일 새벽닭이 울어 동이 틀 무렵에 백사는 63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평생 동안 그의 은혜를 입었고, 금남군(錦南君)이자 충무공의 시호를 받았던 유명한 장군 정충신(鄭忠信)이 백사를 수행했는데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는 포천으로 6월 17일 출발하여 7월 12일 도착했다.

 

8월 4일 소식을 들은 남녀노소가 달려와 울음으로 장사를 지냈다. 일세의 영웅 백사 이항복은 그때 이래 지금까지 포천에 고이 잠들고 계신다.

〈박석무|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산과 들에 온갖 꽃이 만발하는 봄날, 우리는 백사선생의 14대 종손(宗孫)인 이상욱(李相旭)씨와 함께 경기도 포천의 백사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당시의 포천군은 백사의 선향(先鄕)이자 고향이다.
 
조부 때부터 은거했던 곳으로 조부모와 부모님의 산소가 있는 곳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자주 찾아가던 곳이었고, 뒷날 세상을 뜨자 유언에 따라 자신도 부모님 묘소 가까운 곳에 묻힌 곳이다. 뿐만 아니라 고을의 선비들이 백사의 학덕(學德)을 잊지 못해 사당을 지어 신주를 모시고, 서원을 세워 학문과 덕행을 강(講)하던 화산서원(花山書院)이 자리한 곳이다.
 
 

▲백사 이항복의 신도비

 

경기 포천시 가산면(加山面) 방축리 산16의 1에 우리가 도착한 때는 정오가 가까워 올 무렵이었다. 바로 그곳이 현재의 화산서원이 있는 곳이다. 애초 1631년에 서원을 세워 1635년에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숙종 1년인 1675년에야 나라로부터 ‘화산’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국가적 서원으로 유지되어왔으나, 대원군 시절에 철폐되었다. 해방 후 유림들의 성의로 다시 세워 백사의 영정과 신주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고 있는 가장 정확한 유적지 구실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금남군 정충신장군도 배향되었으나 지금은 백사 한 분의 위패만 모시고 있다고 한다.



 묘소 곁의 신도비 보존 허술해


신실(神室)인 인덕전(仁德殿)과 서원인 화산서원에는 백사의 또 다른 호인 필운(弼雲)과 동강(東岡)을 따서 필운재와 동강재를 동서재(東西齋)로 건립하여 선비들의 강학장소가 되기에 넉넉했다.

 

비록 지금이야 글소리 멈춘지 오래이고 쓸쓸하고 처량하게 인적이 끊인 장소이지만, 한창 유학이 성대하던 시절에는 그곳 일대의 사림들이 운집하여 백사의 경륜과 학덕을 강하던 명소였음이 분명하다. 서원 양쪽 언덕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진달래꽃을 뒤로하며 종손의 안내에 따라 서원에서 멀지 않은 금현리의 백사선생 묘소를 찾았다.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푯말은 초라하게 서있으나, 도(道)에서 유지·보존하는 묘소라기에는 너무나 쓸쓸하다. 멀리서 뻗어 내려온 산자락의 끝부분, 넓은 들판을 바라보는 서남향의 방향으로 백사와 그의 부인 권씨의 묘소는 쌍분으로 고즈넉이 누워있다.

 

묘소에서 오른쪽으로 10여m에는 후부인인 오씨의 묘소가 따로 있다. 묘소 앞에서 머리 숙여 묵념을 올린 우리 일행은 주변을 돌아보면서, 세상에서 전해지는 대로 이곳이 그렇게 유명한 명당인가를 둘러보았으나, 우리네의 안목으로 그걸 어떻게 알 길이 있겠는가.


그곳이 참으로 명당이 아니라면 경주이씨 백사공파의 후손들이 그렇게 훌륭함을 자랑할 수 있었으랴. 명당이라는 풍수설을 믿지 않더라도, 착함을 쌓은 집안에는 큰 여경(餘慶)이 있다는 고경(古經)의 말대로 백사의 높은 공덕 때문인지, 백사 이후의 경주이씨 문중은 조선 굴지의 명가(名家)였음은 세상에서 두루 인정받고 있다.

 

문중에서 제공한 ‘상신록(相臣錄)’에 의하면 백사 자신이 영의정에 대제학으로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고, 증손자인 세필(世弼)과 세귀(世龜)는 당대의 명인으로 좌찬성과 영의정에 각각 증직되었다. 세귀의 아들인 광좌(光佐)는 대제학과 영의정에 올라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고, 세필의 아들 태좌(台佐)는 좌의정에 올라 문정(文定)의 시호를 받았다.

 

태좌의 아들 종성(宗城)은 역시 영의정에 올라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다. 후손인 이경일(李敬一)도 좌의정에 이르러 효정(孝定)의 시호를 받았으며, 한말의 고종 때의 유원(裕元)은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로 또다시 영의정에 올라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다.

 

이유원의 후손이 대한민국 초대 부대통령인 성재 이시영이었으니 거명하지 못한 이조참판, 이조판서 등 셀 수 없이 많은 후손들이 태어나 조선시대 명문 중의 명문으로 꼽히는 가문이 되었다.


그러한 가문을 일으켰고, 임진왜란과 광해군 시절의 국가적 어려움에 한 치의 굴절 없이 정의롭고 정정당당한 처신으로 정치가의 하는 일이 무엇이고, 학자나 문장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장 훌륭하게 보여준 백사의 묘소가 너무나 쓸쓸했다.

 

당대의 대제학에 영의정을 지낸 상촌 신흠이 글을 짓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선정(先正)인 학자로 칭송받는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글씨를 쓰고, 우의정으로 병자호란의 강화도 함락에 순절한 천하의 충신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 청음 김상헌의 형)의 전서(篆書)에 중국 황제가 선물한 운석(雲石 : 운남성에서 나오는 옥석(玉石))으로 세워진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400년에 가까운 세월이지만 너무 좋은 돌의 질 때문인지 글자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게 된 보물 중 보물이었다. 그런 국보급의 빗돌이 비각 하나 없이 풍우에 시달리면서 노천에 방치되어 있다니 해도 너무한 일이 아닌가 싶었다. 문화재 당국은 무엇을 하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경기도 포천에 있는 백사 이항복의 묘소. 부인 권씨와 쌍분으로 모셔져 있다.

  <사진작가 황헌만>

 

묘소를 둘러보면서 희대의 큰 정치가이자 학자이며 문인이던 위인의 묘소가 너무 허술하게 보존되는가 여겨서 마음이 편치 못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사직공원 뒷길로 들어가 필운동의 배화여대를 찾았다.

 

암벽에 ‘필운대(弼雲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있고, 후손으로 마지막 영의정이던 이유원(李裕元)이 선조의 옛집을 찾은 감회를 적은 시가 또 암벽에 새겨 있었다. 처가이던 권율장군의 집과 나란히 있었다는 전설만 전하고, 학교 부지로 편입된 필운대는 그저 무너질 듯한 암벽만 말없이 버티고 있을 뿐 옛일을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탁월한 정치가이자 뛰어난 외교관

광해군실록인 왕조실록 128권, 광해군 10년 5월13일자의 기사를 보자. “전 영의정 오성부원군 이항복이 유배된 곳(함경도 북청)에서 세상을 떠났다. 항복은 호걸스럽고 시원한 성품에 넓은 아량과 풍도(風度)가 있었다. 젊어서는 이덕형과 나란히 이름을 날렸으며 문학(文學)으로 두 분이 함께 진출하여 현달했다.

 

정철은 항상 상서로운 기린과 봉과 같은 사람이라고 칭했다. 임진왜란에 도승지로서 임금을 호종한 이유로 병조판서에 발탁되어 공로가 가장 컸었다. 평생 동안 세력가에게 머리 숙이는 글은 짓지 않았고, 집에 들어오는 선물이나 기증품은 받은 적이 없어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으나 집안이 가난하기가 가난한 선비 집안과 같았다.…”라고 사가(史家)는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이항복은 학문이 높고 뛰어난 문장가였다. 문학을 통해 현달했다는, 이른바 ‘문장치신(文章致身)’의 대표적인 정치가로 꼽히는 사람이 백사다. 완숙한 학문과 도학(道學)의 연마를 통해 높은 수준의 문장가에 이르고, 그런 문장을 바탕으로 나라에 충성심을 바쳐 높은 수준의 공업(功業)을 성취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학문에 조예가 깊으며 뛰어난 문장력으로 인격을 높이 갖추어 위태로운 국가에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한 큰 공이 있던 인물이야말로 국가적 시대적 위인으로 추앙할 수 있다. 백사 이항복, 한음 이덕형이 있고, 선배로는 서애 유성룡, 오리 이원익 등이 한 시대를 구제한 분들로 여기는 것이 역사적 평가다.

 

유성룡의 선배로는 사암 박순이 있고, 한음 이덕형 이후로는 정조 때의 번암 채제공 같은 영의정이 있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고 도량과 역량이 뛰어나 정치가로서의 시대적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인물이 그들이라는 것이다.

 

▲묘소 아래에 있는 백사의 영정. 사당

 

 당파를 초월한 애국자

백사는 당파를 벗어난 인물이다. 자신의 당이나 남의 당이 없다. 오직 그에게는 국가와 백성이 있을 뿐이었다. 문장과 학문이 우월하여 대제학을 지내고 정치적 역량과 도량이 뛰어나 정치인으로 가장 높은 영의정에 올랐다.

 

백사는 다섯 살이나 어린 한음 이덕형과 나란히 벼슬길에 올랐으나 이덕형이 훨씬 먼저 대제학(31세)에 오르고 정승의 지위도(38세) 먼저 올랐다. 그렇지만 백사는 경쟁의 대상이나 라이벌로 여겨 시기하거나 모함을 했던 적이 없다.

 

그런 것은 훨훨 뛰어넘는 높은 수준에 이른 정치가였다. 정치를 하려면 그런 도량이 있어야 한다. 물론 상대방인 한음도 그런 수준에 이르렀기에 그런 훌륭한 우정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사는 자기보다 5년 먼저 세상을 떠난 이덕형의 부음을 듣고 찾아가 시신을 염해주었고,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평생의 삶을 정확하게 평가해주었다.


뛰어난 문장에 인물을 공평하게 평가하는 안목이 있었기에, 율곡선생의 비문, 사암 박순의 행장, 이순신의 노량비문, 권율장군의 묘지명이 모두 백사의 손에서 나왔다. 도학자 회재 이언적의 문집발문과 묘지명도 그가 썼다. 나라를 건진 불후의 공업(功業)을 이룩한 정치가이면서 도학에 바탕을 둔 문장을 통해 일세의 위인들의 역사적 평가를 담당하는 지위에도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에 몸을 바치기로 마음을 먹은 그는 외교적 능력까지 발휘하여 명나라의 원병을 받아 왜적을 물리쳤다. 의리의 부당함에는 생명을 바쳐서라도 그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에 죽을 각오로 광해군의 폐비를 반대하다 북청까지 귀양가서 충성을 바치다가 객지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병조판서로 병권을 잡고, 대제학으로 문권을 잡았으며, 영의정으로 나라 정치를 통섭했던 ‘통재(通才)’이던 백사. 그래서 임진왜란을 평정한 호성공신의 일등 중의 일등이었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난 충신이라해서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백사의 애국심, 공평무사한 정치가로서의 깊고 넓은 도량,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을 바친 충성심, 뛰어난 문장과 학문, 이런 높은 공업은 이 나라 민족사상의 바탕이자 영원한 사표다. 더구나 그의 대쪽 같은 선비 정신과 청렴한 공직생활은 민족혼의 큰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박석무 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