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복 정공 시장(愚伏 鄭公 諡狀)
선생의 휘는 경세(經世), 자는 경임(景任), 성은 정씨(鄭氏)이며 호는 우복(愚伏)이니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9대조 택(澤)이 상주 통판(尙州通判)을 지내고 한 아들을 남겨 자손들이 거기에서 대대로 살았다.
고조는 번(蕃), 증조는 계함(繼咸), 조부는 은성(銀成), 아버지는 여관(汝寬)이다. 모두 벼슬하지 않았으나 유아(儒雅)한 것으로 저명하였다.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이니 강양군 요(江陽君瑤)의 후예로 학생공(學生公) 가(軻)의 딸이다.
선생은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계해년(1563, 명종 18) 9월 14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보다 월등히 영리하여 8세에 《소학(小學)》을 배워 이미 문리를 터득하였다. 이때부터 글을 짓기도 하였는데 글귀마다 사람들을 경탄케 하니, 선배들이 ‘구구절절이 꽃송이 같다.’고 칭찬하였다.
얼마 있다 속학(俗學) 이외에 힘쓸 만한 곳이 있음을 알았는데, 때마침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부임하였다. 선생이 예를 갖추어 가 뵙고 수학(受學)을 청하니, 문충공이 한 번 보고 특이함에 감탄하고 학문하는 방법을 일러 주니, 가슴에 새겨 게을리 하지 않았다.
16세에 두 향시(鄕試 : 생원 초시,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22세에 진사과(進士科)에 2등으로 합격, 24세에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합격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의 별칭)에 들어갔다가 한림(翰林 : 예문관 검열)에 추천되었다.
상이 일찍이 위항(委巷 : 누추한 거리)의 뜻을 물었는데, 모든 강관(講官)이 응대하는 자가 없자 선생이 단궁(檀弓 《예기(禮記)》의 편명)을 인용하여 풀이하니, 상이 놀라운 표정으로 칭찬하였다. 선생이 물러간 뒤에 상이 ‘정모(鄭某)는 누구의 아들인가?’ 라고 물었다.
기축년(1589, 선조 22)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교리ㆍ수찬을 임명할 때 제1차 선거 기록)에 들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니, 대개 특선된 것이었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삼망(三望)이 갖추어지지 않아 남상(南牀)에 충원하지 않았었는데 상이 파격적으로 특별히 선생을 정자(正字)로 삼으니 당시에 그것을 영화롭게 여겼다.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니 상이 다시 특별한 예우를 내렸다. 겨울에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났는데, 선생이 일찍이 역적 집의 아들을 추천하여 한림이 된 일이 있으므로 대질 심문받고 얼마 뒤 용서되어 귀가하였다. 경인년(1590, 선조 23)에 부친상을 당하자 너무 슬퍼하여 수척해져서 절명 직전까지 갔었다.
임진년(1592, 선조 25)에 왜적이 침입하니 선생이 동지들과 향병(鄕兵)을 모집하고, 복병을 설치하여 적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갑자기 적의 대군을 만나 화살에 맞아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이부인(李夫人)과 동생은 다 적에게 살해되었다.
조정(朝廷)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한 것을 가상히 여겨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승진시키니 선생이 상소하여 간절히 사양하였다. 그리고는 양호(兩湖 전라도 충청도)로 달려가 군사와 군량을 모아 한결같이 적을 토벌하여 복수할 것을 급무로 삼았다.
계사년(1593, 선조 26)에 상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하여금 선생에게 조정에 부임할 것을 돈유(敦諭)하게 하였으나 또 굳이 사양하였다. 탈상하고 예조 좌랑을 거쳐 병조 좌랑에서 수찬(修撰)에 임명되어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 사은하였다.
정언(正言)에 잠시 옮겼다가 수찬에 다시 제수되었다. 당시 큰 난리를 겪은 뒤라 나라의 우환이 극심하였다. 선생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옛날에 큰일을 한 임금들이 근본으로 삼은 계책은 배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이 마음이 배움으로 해서 밝아진다는 것을 아신다면 마땅히 이 마음은 배우지 않으면 어두워진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마음이 밝으면 빛나서 사물의 이치를 환히 알고 어두우면 시비가 흐려져 변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갓 강론하여 밝히는 것만 힘쓰고, 공경심을 갖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본원의 이치를 함양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경청(警聽)하였다. 계속해서 《주역(周易)》을 강론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이 책이 실로 성학(聖學)의 정종(正宗)이지만 그 뜻이 심오하여 쉽게 알 수 없습니다. 《춘추(春秋)》는 적을 치는 대의를 밝혔으니, 지금 난리를 평정하는 시기를 당하여 강구하기엔 가장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정전(程傳)과 본의(本義)의 차이점에 대해 물으니 아뢰기를, “복희(伏羲)의 선천학(先天學)이 소자(邵子 송(宋)의 유학자 소옹(邵雍)의 존칭)에 이르러 남김없이 천명되었으므로 주자(朱子)는 실로 소자의 역(易)을 존숭하였습니다. 본의의 해석은 오로지 점치는 것을 위주로 하여 괘효(卦爻)마다 반드시 상점(象占)의 분별을 치밀히 했고, 정전은 의리(義理)를 밝히는 것을 힘썼습니다. 이것이 그 차이점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음양이 승강(升降)하고 선악과 길흉의 보응 관계를 물으니 아뢰기를,
“양이 높고 음이 낮은 것은 불변의 분수이고, 음이 올라가고 양이 내려가는 것은 기(氣)의 교류입니다. 그러나 불변은 비(否 : 막힘의 뜻이 있는 괘명)가 되고, 미제(未濟 : 이루지 못함의 뜻이 있는 괘명)가 되지만, 교류는 태(泰 : 형통함의 뜻이 있는 괘명)가 되고 기제(旣濟 : 이룸의 뜻이 있는 괘명)가 됩니다. 상도 모름지기 윗자리에 거하여 아래와 친해야만 위아래가 사귀어 정치가 잘되는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양을 축적함이 많아지면 군자에까지 이를 수 있고 음을 축적함이 많아지면 사람을 버리고 귀신에게로 가게 되니, 군자와 소인의 구분이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습니다. 대개 양은 생육(生育)을 주관하고 음은 살육(殺戮)을 주관하니 조화(造化)의 상대적인 체계가 서로 없을 수 없습니다만 그 종류에 숙특(淑慝 선악)의 구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주역》을 지으매 상대적인 것이 없을 수 없어 이미 건순(健順)과 인의(仁義)의 등속으로 밝혔고, 소장(消長 음기는 소멸하고 양기는 생장함)의 사이와 숙특의 구분에 있어서는 소(消)ㆍ특(慝)은 억누르고 장(長)ㆍ숙(淑)은 북돋우는 뜻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길흉의 실마리도 그 동류로써 응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시초점 치는 법[揲蓍之法]을 물으니 선생이 내시에게 나뭇가지를 꺾어 오도록 하고, 손에 집히는 대로 설시하여 손가락 사이에 끼기를 술술 하되 그것을 잡고 놓거나 많고 적게 하는 수효를 다 명에 앞서 척척 맞추매 상이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선생이 아뢰기를,
“이것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심오한 것은 아닙니다.”
하고, 계속해서 그렇게 되는 까닭을 부연 설명하니 상이 크게 가상히 여겨 은사하는 것이 잦았다.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매양 강연(講筵)에서 물러 나와서 말하기를, “참으로 시강(侍講)의 인재이다.” 고 감탄하였다.
을미년(1595, 선조28)에 겸사서(兼司書)ㆍ겸지제교(兼知製敎)가 되었다. 당시에 선조가 정무에 권태를 느껴 광해군이 섭정하니, 선생이 동료와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힘껏 간쟁하매 전적(典籍)으로 전직되었다. 얼마 후 직강(直講)에 승진했다가 얼마 뒤 다시 수찬에 제수되었다. 교리(校理)가 되고 겸문학(兼文學)이 되었다. 상차(上箚)하여 뜻을 굳건히 하고 스스로 힘쓸 것을 청하니 상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또 휴가를 청해 성묘하였다. 상이 그 상소한 글뜻이 매우 간절한 것을 사랑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1통을 베껴 올리게 했다. 조정에 복귀하여 경연(經筵)에 자주 납시기를 청했다. 전랑(銓郞 이조의 낭관(郞官))이 되어서는 인재 선발이 공정하였다.
이윽고 명을 받고 어사가 되어 영남 변방을 순찰하고 돌아오자, 상이 《주역》 강론이 끝나지 않았다고 이조(吏曹)에서 옥당(玉堂)에 다시 임명하여 경연의 일에만 전력하게 했다. 얼마 뒤 다시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임명되어 교서관(校書館)과 승문원(承文院)의 교리(校理)를 겸직하였다.
정유년(1597, 선조 30)에 체찰사 종사(體察使從事)를 겸하고는 본직을 사임하고 적을 치는 데 전심하겠다고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검상(檢詳)에 옮기고, 사인(舍人)에 승진하고, 교리와 필선(弼善)을 겸직하였다. 당시 왜적이 재침하려는 기세가 있자 차자를 올려 도성을 수리하여 사수할 방침을 정하자고 청하였다.
사인 직을 환수하고 장령(掌令)으로 옮겼다. 다시 영서(嶺西 대관령 서쪽의 강원도 지방)를 순찰하고 복명하여 분의장군(奮義將軍)에 임명되었다. 사예(司藝)에 임명되고, 다시 교리에 임명되고, 또 영서 지방에 가서 군량 운반을 독려하였다.
돌아와 사간(司諫)에 임명되고 이윽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급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좌승지(左承旨)에까지 이르렀고, 그사이에 명장(明將)의 군영에 사신 가기도 했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공석이 되자 상이 선생을 직접 임명하며 이르기를,
“경의 재주와 국량이 이 직임에 적합하다.”
하였다.
당시 영남이 새로 전쟁의 상처를 받았는데, 선생이 안으로 상처를 위무하고 밖으로 군무를 응원하니 위엄과 사랑이 모두 드러났다. 당시 여론이 바야흐로, 문충공을 공박하고 선생까지 몰아붙이니 선생이 자주 사임하기를 상소하여 갈렸다.
후에 청송 부사(靑松府使)ㆍ영해 부사(寧海府使)ㆍ좌승지ㆍ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잠시 영해에 부임했다가 바로 돌아왔을 뿐 나머지는 다 취임하지 않았다. 동지들과 의약을 갖춰 놓고 고을의 병자들을 구제하면서명도 선생(明道先生)의 말을 취하여 존애원(存愛院)이라 명명하였다.
임인년(1602, 선조 35)에 소명을 받고 교정청 당상(校正廳堂上)이 되었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귀향하였다. 이에 앞서, 정인홍(鄭仁弘)이 향병(鄕兵)을 조직했는데 왜적이 물러간 뒤에도 해산시키지 않아 직분에 맞지 않는다는 소문이 크게 났었다.
선생이 비유하여 이공 귀(李公貴)에게 말하니 이공이 그것을 인용하여 정인홍을 논박하였기 때문에 인홍이 선생에게 크게 원한을 품었다가 이에 이르러 대사헌(大司憲)이 되자 터무니없는 말로써 선생을 탄핵하였다. 선생이 이로부터 세상에 뜻이 없어 우복산(愚伏山) 속에 집을 짓고 책을 벗삼아 연구하며 사색하였다. 간혹 산수 사이에 노닐며 시를 읊으니 대부분 담박하고 한적한 정취가 담긴 시였다.
정미년(1607, 선조 40)에 대구 부사(大邱府使)에 임명되었는데 치적이 진실하고 허식이 없는 것으로 칭송을 받았다.
무신년(1608, 선조 41)에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하여 구언(求言)하니 선생이 이에 응해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대요는,
“백성을 구휼하는 실지는 민력을 쉬게 하고 생활을 풍후하게 해 주는 데 있고 이 두 가지의 근본은 또 근검 절약에 있습니다.”
하고 또,
“궁문이 엄정하지 못해 벼슬길의 혼탁함이 선왕의 말년에 이르러 극심해졌으니 바르게 시작하는 날에 마땅히 염려하여 개혁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즉위한 처음에 대신이 전상(銓相 이조판서)을 주의(注擬 후보자 세 사람을 정해 임금에게 올림)했는데 의중의 인물이 들지 않자 명하여 더하게하고 또 들지 않자 또 명하여 더하게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의 성명이 든 뒤에야 비로소 즐거이 결재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처음을 삼가야 할 시기에 이미 이러한 수단을 쓰니 뒷날의 걱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옛 역사를 널리 보아 공사(公私)의 분별과 치란의 원인을 익히 살펴 알 것인데 어찌 인척이나 사닐(私昵 사사로이 친애하는 신하)이 성덕(聖德)에 누됨을 모르시겠습니까. 새로 왕위에 올라 갑자기 의심스럽고 불안한 변고를 당해 드디어 신임하는 사람을 널리 배치하여 급하고 어려운 시기에 쓰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또 큰 잘못이라고 하겠습니다. 천지가 광대하여 한이 없고 임금이 존귀하여 짝이 없는 것은 다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정의 백관이 누가 전하의 사체(四體)가 아니며, 삼군(三軍) 백성이 누가 전하의 자식이 아니겠습니까.
일시 동인(一視同仁 평등하게 보아 똑같이 사랑함)하여 그들의 마음을 얻는다면 누가 전하를 위해 신명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몇몇 친신(親信)하는 사람에게 맡기려 하신다면 전하의 소유가 또한 좁아지고 세력 또한 외로워지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천하의 만 가지 교화가 어느 하나도 임금의 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서(虞書 《서경(書經)》의 편명)에서 이른바 ‘정밀하고 한결같아 중도를 잡는다.’는 것이고, 공자가 이른바 ‘뜻을 정성스럽게, 마음을 바르게 하며 사욕을 극복하고 예법을 회복한다.’는 것이고, 자사(子思)와 맹자가 이른바 ‘선에 밝고 자신을 성실하게 한다.’는 것이니 이렇듯 사람들에게 힘써야 할 방법을 보여줌이 간절할 뿐만이 아닌데, 전하께서 금일에 스스로 안일해서 되겠으며 덕을 공경하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하니, 광해군이 진노하여 그 상소를 불사르게 하고 선왕을 모독하는 말이 있다고 국문(鞫問)하려 하자, 대신 이항복(李恒福) 등이 구명하여 관직이 삭탈되기만 했는데 얼마 뒤에 서서(西叙 : 서반직에 서용함)되었다.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사신이 되어 중국에 갔다. 이전에 사신들이 모두 흑색의 반령(盤領)을 입었는데 선생이, 반령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흑색은 재계할 때 입는 옷이라 큰 의례를 축하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하고는 명 나라 예부(禮部)에 공문을 보내 조복(朝服)으로 바꾸어 《대명집례(大明集禮)》를 준수하기를 청하였다. 또 병부(兵部)에 청하여 연례적으로 수입해 오는 화약의 양을 증가시켰다.
광해군이 크게 기뻐하여 어명으로 가자[加資 : 자급(資級), 즉 품계(品階)를 올려 주는 것]하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제수하였다. 선생이 여러 번 사양하니 송서(送西 : 서반 소속의 중추부로 보내는 일)하였다. 이윽고 외직을 구하여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임명되고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승진하였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 오현(五賢 : 김굉필ㆍ이언적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황을 말함)을 문묘하고 배향하는데 정인홍이 글을 올려 회재(晦齋 : 이언적)와 퇴계를 비방하매, 선생이 그를 미워하여 분개하며 증오하는 말을 자주 문자로 나타내니, 인홍이 매우 화내어 자기 사람을 사주하여 선생을 공박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 4)에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선생이 연루되어심문을 받았다. 광해군이 사람을 보내 선생의 가택을 수색하여 문서를 압수해다가 보니 임금을 언급한 곳에서는 반드시 상평(上平 : 글을 쓸 때 존칭어를 행을 바꿔 앞의 행과 나란하게 쓰는 것)하였다. 광해군이 측근에게 이르기를, “공경스럽고 삼감이 이와 같으면서 어찌 역적에 붙을 사람이 있겠는가.”하였다.
이때 선생의 맏아들 심(杺)이 15세였는데 함께 체포되었다. 광해군이 직접 심문하기를, “네 아비가 네게 무엇으로 가르쳤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다만 충효(忠孝) 두 자로써 가르쳤습니다.” 하매, 광해군이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얼마 안 되어 석방되었다.
처음에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형인 임해군(臨海君)이 폐질이 있어 형을 제치고 동생을 세운다고 명 나라에 보고하였다. 후에 상이 명장(明將)을 접대할 때 임해군이 거가(車駕)를 수행하려고 하매 선생이 온당치 못하니 허락하지 말도록 계청(啓請)하였다.
이에 이르러 광해군이 임해군을 죽이고, 선생이 기미(幾微)에 밝아 미리 잘 판단한 공이 있다고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진급시키니 상소하여 재삼 사양했으나 불허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하였다.
술객 이의신(李懿信)이 상소하여 도읍을 옮기자고 청하였다.선생이 명을 받고 건의하기를,
“나라의 영원한 국운을 하늘에 기원하는 것이나 사람이 편안히 장수(長壽)를 누리는 것 등은 다 덕을 닦고 성품을 기르는 데 있을 뿐이니 어찌 지리가 간여할 수 있겠습니까?” 하매, 일이 드디어 취소되었다.
당시 조정이 더욱 어지러워 선생이 힘껏 외직을 구하니 강릉 부사(江陵府使)에 제수하였다. 그곳 풍속이 순박하고 주민들이 성실한 것을 사랑하여 먼저 그들을 예의로써 교화하니 백성들이 잘 따랐다.
을묘년(1615, 광해군 7)에 또 남에게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광해군이 이미 사실 무근임을 잘 알면서도 고의로 석방하지 않고 재물을 바쳐 속죄하기를 바라니 문인들은위소(魏邵)의 고사를 행하려 하였고, 또 자제들에게 원통함을 소송하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이 다 통렬히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군자는 덕으로 사람을 사랑한다. 하물며 죽고 사는 것이 다 명에 있거늘 어찌 인력으로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더욱 성현의 책을 가져다가 연구하며 즐거워하여 우환을 잊었다. 병진년(1616, 광해군 8) 겨울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추방되었다.
계해년(1623, 광해군 15)에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하고 바로 선생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하므로 소명을 받고 들어가 사은하니 상이 매우 극진하게 위로하여 주었다. 입대(入對)하여, 반정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해 과거를 특설하자는 논의를 백지화하기를 청하고, 또 내수사(內需司)를 폐지하여 왕은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을 보이자고 청하니, 상이 어떤 것은 들어주고 어떤 것은 들어주지 않았다.
재변이 있자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덕이 숭고해지고 학업이 진전됨은 항상 진실을 축적하고 오래 노력하는 데에서 가능합니다. 교화가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됨은 단시일에 갑자기 기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덕을 닦고 뜻을 굳건히 하는 데에 게으름이 없을 것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편당 짓는 옛 악습이 항상 잔존하여 동인(同寅 신하된 신분으로 다 같이 외경함)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고, 정선(征繕 조세를 거둬들여 군기를 수선함)의 큰 계책이 확정되지 않아 진격할 기약이 막연합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현인을 구하고 계책을 정하는 것에 나태함이 없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가까운 경기 지방에서도 간사한 자들이 법을 악용하고, 엄숙한 궁문인데도 여자들의 청탁이 통행하니 비록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억누른다고 하여도 때로 총애를 열어 주는 조짐이 있고, 간언(諫言)을 물 흐르듯이 따른다 해도 간혹 준엄한 비답을 내립니다.
이것은 다른 날은 논할 것도 없이 전하의 마음이 이미 몇 달의 간격에도 순일하지 못한 것입니다. 옛현인이 이른바 ‘희세의 대공은 세우기 쉬워도 지극히 미세한 본심은 보전하기 어렵고, 중국에서 오랑캐를 쫓아내긴 쉬워도 한 몸의 사욕은 억제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니 매우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금일은 진실로 전하께서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기회이니 놓쳐서는 안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굳게 정하여 비상히 노력하고, 덕을 굳게 잡아 변치 말며, 자기의 사사로써 공도(公道)를 방해하지 말며, 안일로써 태만함이 싹트게 하지 말며, 빠른 효과를 재촉하지 말며, 지순(持循 항상 잊지 않고 준행함)하여 그치지 않으면 자연히 성덕(聖德)이 날로 새로와지고 치화(治化)가 날로 융성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내가 외람되이 왕위에 오른 뒤로 내 잘못을 말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 차자의 글을 보매 부지불식간에 존경하여 감복하게 된다.”
하였다.
옛적에는 옥당 장관(玉堂長官 : 홍문관 부제학)이 당번하여 시강하는 관례가 없었다.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정모는 책을 많이 읽고 덕을 기른 사람이니 자주 접견하소서.”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르고 또 따로 음식을 하사하였다.
하루는 《논어(論語)》를 강론하면서 선유(先儒)가 재여(宰予 공자 제자)가 낮잠 잔 것을 자포자기라고 평한 데에 이르자 상이 이르기를,
“낮잠 자는 것을 가지고 어찌 자포자기라고까지 하겠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게으른 뜻이 한번 생기면 그것이 바로 자포자기이다.’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재여는 공자의 십대제자의 한 분인데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이 주자(朱子)에게 ‘정자는 그렇듯 근엄했는데 여러 제자들이 많이 근엄하지 못한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고 물으매, 주자가 ‘정자는 스스로 근엄한 것이고 여러 제자들은 스스로 근엄하지 못한 것이니 정자가 어찌할 것인가?’ 했습니다. 이로 보면 학자는 모름지기 자기가 노력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비록 성인과 함께 거처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다 그렇다고 수긍하고, 이어서 남인(南人) 가운데 등용할 만한 인재를 물으니, 선생이 아뢰기를,
“장현광(張顯光)ㆍ유진(柳袗)이 다 쓸 만합니다.”
하였다.
이윽고 원자사부(元子師傅)를 겸직하였다. 당시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가 바야흐로 폐세자 지(廢世子 祬 : 광해군의 세자)가 탈출을 기도한 죄를 논의하는데, 선생의 의논이 대사헌 이공 귀(李公貴)와 맞지 않았다. 이공이 상 앞에서 선생을 직접 공박하니 선생이 극력 체직(遞職)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불허하고 반령(盤領 깃이 둥근 옷)과 표리(表裏 옷의 겉감과 안감)를 하사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직하였다.
광해군 때에 허균(許筠)ㆍ이이첨(李爾瞻) 등이 아첨하느라고 존호를 올리니 광해군이 혼자만 받는 것을 꺼려 아울러 선묘(宣廟)에게도 미루어 올리고 다시 조(祖)라고 존칭해 선조(宣祖)라 하였다. 이에 이르러 정신(廷臣)이 바야흐로 선묘의 존호를 삭제할 것을 논의하매, 선생은 조(祖) 자까지 삭제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주장은, “선묘가 비록 외침을 당했으나 곧 바로 수복했으니 이미 망한 나라를 다시 건설해 시조가 된 임금과는 다르다.
더구나 공이 있으면 조(祖)가 되고 덕이 있으면 종(宗)이 되어 당초에는 우열의 차별이 없었으니 더욱 이것은 취하고 저것은 버려서 함부로 했다는 비난을 사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앞서 상이 사묘(私廟)에 친히 제사하려고 하는데 예관(禮官)이 축문의 칭호를 어찌할까 곤란해 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상께서는 선묘(宣廟)의 친손자로서 왕통을 계승한 것이지 선묘를 아버지로 한 것은 아니니 비록 사친(私親)을 아버지라고 칭해도 두 아버지가 될 혐의가 없다. 아버지[考]라고 칭하고 현고(顯考)라고 하지 말며 아들[子]이라고 칭하고 효자(孝子 부모 제사 때 아들의 자칭)라고 하지 않음이 마땅하다.”
하였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과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의논도 이와 같았으므로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윽고 또 차자를 올려 여덟 조목을 진술하니
‘큰 뜻을 세울 것’,
‘성인의 학문을 힘쓸 것’,
‘종통(宗統)을 중히 여길것,
‘효도와 공경을 다할 것’,
‘간쟁(諫爭)을 받아들일 것’,
‘보고 듣는 것을 공경히 할 것’,
‘궁궐을 엄숙히 할 것’, ‘민심을 진정시킬 것’ 등이었다.
그중에 종통(宗統)을 논한것은 대략,
“남의 양자로 들어가면 그 사람의 아들이 되기 때문에 양부모를 부모라고 하며 상을 당하면 3년 동안 재최(齊衰 : 조금 굵은 생베로 지어 아래 가를 좁게 접어서 꿰맨 상복)를 입고, 생부모를 백부 또는 숙부라고 하여 상을 당하면 부장기(不杖期 : 재최만 입고 상장(喪杖)을 짚지 않은, 1년 동안만 입는 복)를 입으니, 이는 참으로 소중함을 이어받은 의의가 매우 큰 것인 데다가 사물에는 근본이 둘이 있을 수 없고 집안에는 존장이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왕(帝王)이 왕통을 계승함은 종묘사직의 중함을 이어받아 억조 신민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 그 의의의 중대함은 사대부 집안보다 만배나 더하기 때문에 옛적 제왕이 비정통으로 왕위를 계승하고서 사친(私親 : 임금의 생부)을 존봉한 임금들은 대부분 당시에 비난받고 후세에 비방을 당했습니다.
송 영종(宋英宗)은 사마광(司馬光)ㆍ범진(范鎭)ㆍ여공저(呂公著) 등 여러 현신의 도움으로 상법(常法)에 의거하고 정도를 지켜 드디어 복왕(濮王 : 영종(英宗)의 생부)을 황백부(皇伯父)라고 칭했으니 예법에 맞게 한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우리 선묘(宣廟 : 선조)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 선조의 생부)을 높일 때 영종의 고사를 따라 행했으니 이야말로 백왕(百王)의 밝은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일의 경우는 이것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으니, 전하는 선묘의 손자로서 소목(昭穆)을 바꿀 수 없고 조녜(祖禰 : 조부의 사당ㆍ아버지의 사당)를 어지럽힐 수 없기 때문에 다만 조부라고 할 수 있어도 고(考)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이미 선묘를 조부라고 하고 손자라고 자칭했으니 생부를 고라고 하고 아들이라고 자칭해도 예법에 어긋나는 거리낌은 없습니다.
지금 논의가 이미 결정되었으나 어찌 후일에 정자(程子)가 염려한 것처럼 반드시, 은총을 탐해 공고히 하려고 교묘하게 꾸며대어 기만하려는 자가 없겠습니까. 변변치 못한 저의 소견이지만 밝으신 임금님을 위해 미리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호패(號牌)와 선혜청(宣惠廳)의 편리 여부에 대해서 논의하였는데, 선생의 의론은 대략,
“항상, 선혜청(宣惠廳) 사목(事目)이 까다로와 협잡이 끼어들기가 쉬우니 오래도록 시행할 수는 없다고 말해 왔습니다.
또 신(臣)이 맡고 있는 상주(尙州) 고을을 들어 논해 보겠습니다. 대동법(大同法)으로 밭 1결(結)에서 거둬들이는 것을 통계하면 미두(米豆)와 인포(人布)ㆍ쇄마가(刷馬價 : 쇄마는 지방에 배치하였던 관용(官用)의 말) 등 여러 가지가 1년에 면포(綿布) 2필 남짓에 불과한데, 지금 선혜청에서 3필을 거두어 들인다면 보통 해마다 거두어들이는 것보다 3분의 1을 더 거두는 것입니다.
외방의 백성들이 조정에서 백성을 이롭게 하는 정책을 강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날마다 그 혜택을 바라다가 뜻밖에 3분의 1을 더 거두어들이라는 영이 있게 되면 반드시 경악하여 소란스러울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우선 천천히 잘 강구해서 시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호패법은 반드시 시행해야 할 좋은 법이나 다만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미처 휴식도 못하고 갑자기 이 영이 내림을 들으면 혹 새나 물고기처럼 놀라 흩어질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잘 타이르고 온당하게 일을 처리하면 시행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병농(兵農)을 분리해야 하는 문제도 논자들이 잘 아는 일이나 반드시 병사들의 의식(衣食)을 풍족히 해주고 그 처자들의 뒷바라지를 넉넉히 해 준 뒤에야 전투하는 일에만 전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력으로는 다 갖출 수 없으므로 국력으로 가능한 한도 내에서 병사를 뽑는다면 병사가 적어 쓰기에 부족할 것이니 이것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오직 급보(給保 실역(實役)하는 정병(丁兵)에게 몇 사람의 보조 인원을 딸려 주는 것) 한 가지가 전대부터 통행되던 제도이나 역시 유명 무실합니다.
빠지는 대로 보충하지 못해 임진왜란 이후 더욱 없어져 버렸고, 군사 교련법은 아예 들은 바가 없으니 우리나라 무력이 강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착실히 행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호패법을 시행하여 누락된 장정들을 많이 찾아내어 부족한 병력(兵力)을 보충한 뒤에야 이것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딸의 혼사로 휴가를 청해 귀향하니 상이 경상도에 명하여 혼례 물품을 지급하매 사양했으나 불허하였다. 《대학(大學)》을 수강하려는데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이 정모(鄭某)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상이 그 말대로 했다.
조정에 귀한한 뒤 흰 무지개가 뜨는 변고가 있으매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천도(天道)는 틀림이 없어 무의미한 변고는 생기지 않으니, 아마도 깊고 깊은 궁중의, 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에서 경외하는 마음이 다소 해이되고 안일한 마음이 자라난 것을 사람들은 혹시 모를지라도 하늘이 이미 강림하여 살펴 안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사람이 ‘한 번의 착한 생각이 상서로운 별이나 구름을 나타나게 하고, 한 번의 악한 생각이 세찬 바람과 천둥치는 비를 몰아온다.’고 하였으니, 이로 추측하건대 한 가닥 생각이 착하지 못하면 한 가닥 생각으로 흰 무지개가 뜨며, 한 가지 일이 착하지 못하면 한 가지 일로 흰 무지개가 뜨는 것입니다.
비록 하늘에 경고하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아도 항상 두려워해야 하는데, 하물며 지금 그런 현상이 있음이겠습니까. 부디 전하께서는 자신에 돌이켜 깊이 반성하여 속마음이나 겉태도나, 미세한 일이나 현저한 일이나 항상 덕성(德性)이 주장하게 하고 물욕(物慾)이 동하게 하지 마소서, 그리하면 천지의 화창한 기운이 어찌 그와 상응하는 현상으로써 응하지 않겠습니까.
또 어찌 음기가 성한 것을 근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내 자신을 반성하니 부끄러움이 많다. 하늘의 견책이 마땅하게 여겨진다. 차자의 말을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내수사 별제(內需司別提) 양덕윤(梁德允)이 사형죄를 지었는데 상이 단지 곤장이나 치라고 하매, 선생이 또 그 불가함을 논하기를, “대개 중형이나 경형에 처하는 것은 그 죄상이 중한가 경한가를 살핀 뒤에 결정하는 것이니, 마치 저울로 물건을 달 때 균형이 잡힌 뒤에 그치는 것과 같습니다. 법의 운용은 법관에게 있으니 아무리 임금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하여 경죄를 중형에 처하고 중죄를 경형에 처할 수는 없습니다.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 ‘임금이란 잘못이 없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고 했으니 이런 뒤에야 남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한낱 죄인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잘못이 없는 위치에 스스로 서려고 하지 않으시어 사의(私意)로써 잘못되게 하시며 집안과 나라를 바로잡는 도(道)가 지공무사한 데서 나오게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갑자년 설날에 또 무지개 변고(變告)가 있었으므로 다시 차자를 올리기를,
“무지개가 요사한 기운으로 태양을 갑자기 범하는 것은 한 번도 두려워할 일인데, 하물며 두세 번이겠습니까. 더군다나 연월일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시기이겠습니까. 이것은 아마도 예측 불허의 재앙이 보이지 않는 속에 잠복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늘이 이런 현상으로 상을 크게 경계시키려고 하는 것인가 합니다.
생각건대 금일에야 백성들이 도탄에서 벗어났으나 이미 극도로 피폐해 있으니, 비유하면 중병환자의 원기가 점점 쇠진하여 한 가닥 숨만이 깔딱깔딱 겨우 남은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바로 자리에다 편안히 눕히고 맛난 음식으로 보양시켜야만 할 것이나 그가 보통 사람과 같게 되기를 바란다면 오랜 세월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인데, 하물며 그에게 충격을 주어 그 마음을 요동시키고 그를 괴롭혀서 그 기운을 탈진시킨다면 그가 급사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학정을 겪은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만났으나 은택이 다 미치기도 전에 그들의 힘부터 탕진시키니, 선정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선정이 베풀어지지 않으면 원망이 빨리 돌아오는 법인 바, 하늘의 현상이 정상이 아닌 것이 어찌 여기에 연유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지난 병진년 정월에 여러 번 이런 변고가 있어 한 달에 팔구 번 뿐만이 아니어서 하늘의 경계(警戒)하심이 재삼 간곡했는데, 그때는 위아래가 하늘의 현상에 어두웠기에 마침내 하늘의 버림을 받았으니, 이로 본다면 천명의 틀림없음이 더욱 확실합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이미 외경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또 간곡하신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또 반드시 백성을 측은하게 여기는 어진 정치를 하시어 행사에 드러난 뒤에야 외경하는 마음이 실지로 베풀어짐이 있을 것이며 간곡하신 말씀이 말로만 그치게 되지 않을 것이니, 그래야만 위로 하늘의 마음에 보답함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니, 선생이 상에게 아뢰어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합칭)의 모든 관리들로 궁중을 숙위하게 하고, 또 강화도로 피난하는 것이 좋은 계책이 아님을 논하였다. 상은 공주로 파천하고, 선생은 왕명을 받들어 영남 지방을 순찰하며 글을 올려, 패주한 장군을 용서하지 말 것과 또 한강을 파수할 것을 청하였다.
얼마 뒤 반란군이 토평되어 상이 환도하고 선생도 영남에서 올라와 복명하며 사임을 청했으나 불허하였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선생을 만나 말하기를,
“왕자 공『珙 :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仁城君)』이 역적의 자백에서 관련되어 나오니 일찌감치 처단하지 않을 수 없소.” 하므로, 선생이 말하기를,
“성세(聖世)에 어찌 차마 골육지친을 불안에 떨도록 하겠소.”
하였으나, 양사(兩司 사헌부ㆍ사간원)가 마침내 의논하여 처리하기를 청하였다.
선생만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여 이귀에게 크게 욕설을 듣고 드디어 글을 올려 사임을 청하였는데 그 글에 대략 아뢰기를, “이귀가 인성군을 처단하려고 하는 것은 진실로 종묘사직을 염려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예로부터 ‘의심스럽다’는 한마디는 참소하는 사람들이 상용하는 말인데 사건의 변동은 무궁하여 항상 뜻밖에 일어나니, 만일 뒷날에 난처한 일이 생기거나 혹 일관되게 인성군을 보전하지 못하면 금일에 여러 신하들이 자세하고 완벽하게 멀리 변란에 대처하려는 뜻이 도리어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인 바 상의 덕을 손상시킴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 있어서는 다만 자기 진심을 다해야 하고 진심을 어기며 맹종하여 구차히 남들과 동조해서 시대에 영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이귀가 너무 지나치다 하고, 또 이르기를,
“옥당의 장관이 임금을 잘못이 없는 위치로 인도하려고 하니 그 뜻이 또한 훌륭하지 아니한가.”
하자, 이귀가 차자를 올려 매우 강경하게 공박하므로 선생이 드디어 교외로 나가 귀향(歸鄕)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충직함을 내 가상히 여긴 지 오래다. 이귀가 비록 뭐라고 하나 내 어찌 듣겠는가. 조정에서도 반드시 이귀가 잘못이고 경이 옳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인성군의 생사가 조정의 신하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만 모두들 그가 죽게 되지 않았으면 한 것은 진심으로 전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찌 거기에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있겠습니까. 비록 이귀가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대단하지만 또한 반드시 보전한다고 말을 하니 그 마음도 그러할 것입니다. 어찌 자기를 미루어 남을 헤아리지 않고 남도 자기와 같을 것이라고 하여 공을 세웠다고 남을 의심하겠습니까.
옛사람의 말에 ‘부귀는 얻기 쉬우나 명예와 절의는 지키기 어렵다.’ 하였으니, 신이 만일 얼굴을 들고 조정에 다시 들어가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평생의 노력이 다 헛될 것이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더욱 극진히 위문하고 또 입시하라고 두 번이나 명했으나 다 따르지 않고 더욱 강력히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대사헌(大司憲)에 임명하니 연달아 글을 올려 간곡하게 사양하기를, “일찍이 듣자오니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사대부의 사양과 받음, 출세와 은거는 자기 일신상의 일일 뿐만이 아니라 자기 처신의 잘잘못이 풍속의 성쇠에 관계되므로 더욱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신이 일찍이 이 말로 광해군 시대에서 살펴보아 증험한 적이 있습니다.
광해군은 자기가 좋아하여 물러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비록 물의를 빚더라도 사퇴함을 불허하고, 그의 신하된 자들도 총애를 탐하여 마음 편히 여겨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사내가 앞장서매 열 사내가 모방하여 보고 듣는 동안 익숙해지고 점점 전염되고 습관되어 마침내 염치가 깡그리 없어지는 데 이르며 이욕(利欲)이 하늘에 닿아 국가가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조정이 청명하고 관리들이 서로 양보하여 한 사람도 부끄러움을 잊고 함부로 나서는 자가 없는데 전하께서는 신으로 하여금 한 사내를 만드시어 부끄러움을 모르는 습관을 열게 하려고 하십니까. 아, 전하께서 신을 대하심이 이렇듯 박하실 수 있습니까.
공자(孔子)가 ‘삼군(三軍)의 대장은 사로잡을 수 있어도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 하였는데, 신은 이 직책에 끝까지 감히 취임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부득이하여 비로소 사임을 윤허하매 즉시 영남으로 귀향하였다.
연이어 부제학ㆍ도승지에 임명하고 엄중한 교지(敎旨)로 재촉하여 부르므로 드디어 조정에 복귀하였다. 상이 바로 접견하여 위문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왕명의 출납에 성실해야 하는 것이 승정원의 직분이니, 송(宋) 나라 이항(李沆)은 임금의 명령에 불가함이 있으면 처리하지 않고 즉시 봉하여 올려 보내면서 ‘신 항은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으니 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군신간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신은 감히 이항으로써 본을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숙연히 얼굴빛을 바꾸었다. 선생이 경연(經筵)에 재임한 2년 동안 정성과 마음을 다해 조용히 깨우치어 인도하는 데 좋은 점을 진술하고 나쁜 점을 바로잡는 것을 근본으로 하니, 상도 그 계옥(啓沃 흉금을 털어놓고 성의껏 인도함)한 공로를 생각하여 비록 이미 딴 직책을 맡았어도 선생에게 경연에 입시하여 토론하게 하였다.
드디어 한 자급을 올려 주며 ‘아무가 일찍이 《논어(論語)》를 강의하는데 마음을 다하여 논란하더라.’ 하였다. 선생이 취소하여 줄 것을 청하고, 또 ‘일을 공경히 하며 믿음 있게 한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뽑아내어 올리면서 아뢰기를,
“신은 여기에서 한마디 올리고자 합니다. 공자의 말씀에 ‘큰 나라를 다스리는 데 일을 공경히 하며 믿음 있게 하고, 씀씀이를 절약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백성을 동원할 때는 시기에 맞게 한다.’ 하였으니,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요점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중간에 공경이라는 한마디는 다섯 조목의 근본이 됩니다.
생각건대 상이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철저하게 힘을 쓰지 않는 곳이 있거나 시행하고 호령하는 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삼가지 못함이 있으면 그것이 곧 공경치 못함이니, 꼭 방자히 자기 멋대로 하는 것만이 공경치 못함이 아닌 것입니다.
바라건대 마음을 순수히 하여 공력을 쌓고 그 극도에까지 미루어 나가시어 상의 은택에 흠뻑 젖는 전국의 신민(臣民)들로 하여금 전하의 전학(典學 항상 학문에 종사함)의 공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게 되었음을 알게 하신다면 경연의 말석에 있는 신으로서도 영광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아름답게 여겨 장려하였다.
이의길(李義吉)이 상소하여 인조의 생부를 추존하자고 청하매 선생이 눌러두고 올리지 않았다. 또 뇌우(雷雨)의 변고를 인하여 아뢰기를,
“자애로운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역정을 냄은 그 아들의 공경심과 효성을 일으키고 잘못이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효도를 다하면 부친이 반드시 기뻐할 것이니 이로써 추측컨대 하늘의 뜻이 진실로 목적하신 바가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더욱 그 공경심을 돈독히 하여 삼가고 또 삼가서 정무에 임하여 일을 처리할 때나 호령을 발하는 사이에도 감히 털끝 만큼이라도 방심하여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해이됨이 없게 하시어 수성(修省 자기의 몸을 반성하여 수양함)의 근본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11월에 세 번이나 아뢰어 사임을 청했으나 불허하고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겸직시켰다. 소현세자(昭顯世子) 관례(冠禮)의 거행을 앞에 두고는 선생이 예식 절차를 그려서 올렸다. 관례를 마치고 임금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진급시키며 하교하기를, “경이 원자(元子)를 가르침은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난 것이니 내 찬탄한지 오래다.” 하였다.
선생의 맏아들이 검열(檢閱)을 지내다 요절하매, 상소하여 돌아가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했으나 상이 노고를 염려하여 불허하고, 대사헌(大司憲)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하였다. 또 성묘하기 위해 휴가를 청하여 귀향하였다. 연이어 대사헌ㆍ참찬(參贊)ㆍ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임명했으나 다 사양하였다.
조정에 돌아오자 또 대사헌에 임명하매, 여러 궁가(宮家 왕자ㆍ왕녀의 집)에서 모리(牟利)하거나 사대부가 청탁하는 것을 엄금할 것을 청하고, 또 내수사(內需司) 노비의 면세를 명한 것을 취소하라고 청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 4)에 인헌왕후(仁獻王后)가 별세하니 상이 삼년상을 행하려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상께서는 적통이 아닌데 들어와 왕통을 계승했으니 그 사실의 중대함이 어찌 사대부가 양자로 들어가되 생부모에게도 정을 펼 수 있는 것과 같겠습니까. 마땅히 능원군(綾原君 : 인조 동생)으로 상례를 주관하게 하고, 모든 상례 기구가 국장(國葬)과 비슷한 것은 쓰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하였다.
동료와 함께 매우 강력히 주장했으나 상이 일년상(一年喪)으로 내리기만 하고 나머지는 다 듣지 않았다. 주장이 시행되지 않았다고 사직하였는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또 상례 6조목을 올리고 아울러, 사견을 버리고 공론을 따를 것과 사심을 억제하고 정도를 찾아야 한다는 설을 진술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차자의 글을 보매 예학(禮學)을 전문한 것을 알기에 충분하다. 내 일찍이 학문한 적이 없어 지금 예송(禮訟 예법의 논쟁)을 당해 마치 담벼락에 얼굴을 대하고 있는 듯 깜깜하여 후회막급이다.”
하였다.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이 선생의 차자 가운데 어설픈 한 조목을 들어 자기도 차자를 올려 선생을 공박하니 선생이 드디어 자책하였다. 이윽고 대사헌ㆍ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다 사양하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직하였다.
조사(詔使) 강왈광(姜曰廣)ㆍ왕몽윤(王夢尹) 등이 오자 선생이 찬례(贊禮)로서 행동거지가 예에 딱 맞으니 보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또 대사헌에 임명되어 수천 단어의 글을 올렸는데, 정성이란 한마디를 요체로 하였다. 이윽고 호군(護軍)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거듭 대사헌ㆍ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또 차남의 상사를 당해 돌아가 장례를 치르기를 청하니 장례 물품을 내어 주도록 명하였다. 길을 떠나 청주(淸州)에 이르러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놀라 급히 서울로 올라가자 영남에서 의병을 모집하라는 명을 받았다. 의병 모집관에게 격문을 돌려 차례로 진군하게 했는데 얼마 안 있어 강화 조약이 성립되었다.
왕명을 받아 군대를 해산하고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거둥 때에 임시로 머무는 곳)로 복명하고는 상을 호종하여 환도하였다. 차자를 올려 시무(時務)를 진술하기를, “예부터 임금으로서 비상한 사변을 당한 이는 반드시 비상한 각오를 세운 뒤에야 쇠운을 만회하고 난리를 평정할 수 있으므로 마침내 비상한 업적을 세우게 됩니다. 각오를 세우지 않고 구습을 따라 나태하여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끝내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난리가 많으면 나라를 흥하게 하고 근심이 크면 밝은 지혜를 열어 준다.’ 하였습니다. 지금이 바로 전하께서 환난 가운데 사시는 것이니 진실로 밤낮없이 절치부심하며 분발하여 ‘강화도에서의 수치(羞恥)를 씻어야 한다. 위협으로 맺은 동맹의 치욕을 잊을 수 없다.
늑대와 양이 같이 강화한 것을 어찌 믿고 안심할 수 있는가.’ 하시면서 자나 깨나 수치를 씻는 데에 뜻을 두고 털끝만큼의 안일한 마음이나 세월을 허송하려는 마음이 그 사이에 끼어들게 하지 않으면, 비록 군대를 이끌고 적국 깊숙히 진격하여 오랑캐의 소굴을 소탕하고 점령하지는 못한다 해도 뒷날 적들이 침입하더라도 대비가 되어 있어 전날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처럼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위 문공(衛文公 중국 춘추 시대 위 나라의 임금)이 조읍(漕邑)에 임시로 거처하고서부터 정치를 잘해 말년에는 병거가 3백 량이고 말이 3천 마리나 되는 부국을 이루어 적국이 감히 다시 침입하지 못하였습니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백성을 증가시키며 재물을 모으고 학예와 도의를 가르쳐서 마침내 적국 오(吳)를 멸망시키는 공을 세워 그 치욕을 씻었습니다.
이 어떤 정신이며 어떤 기백이겠습니까. 문공이 거친 베옷과 거친 비단으로 만든 왕관을 쓴 것이나 구천이 와신상담하며 겨울에 얼음을 안고 여름에 숯불을 쥔 사실들을 보면 두 임금은 각고 면려하는 마음이 한 번도 해이된 적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지난날의 일을 얘기해 보았자 소용없지만 오히려 의뢰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몸을 굽혀 치욕을 참은 것이 어찌 작게 굽히고 크게 펼 것을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니겠으며, 잠깐 욕보시고 오래 영화스러울 것을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지금 이때에 부지런히 노력하여 잠자거나 식사할 겨를도 없이 스스로 강해질 계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군신(君臣) 상하가 서로 함께 망하고야 말 것이고 요행히 망하지 않는다 해도 그 굴욕의 극심함이 장차 금일의 열 배는 될 것입니다.
그러면 천하 후세에서 다 전하에게, 편안함을 탐해 구차히 산 임금이라고 할 것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 각오를 굳게 세우시어 마치 높은 장대 끝에 서 있는 듯, 태풍 부는 바다에서 물 새는 배를 탄 듯이 생각하시고, 눈앞의 작은 편안함을 탐하여 뒷날의 우환을 잊지 마시며 문장의 세세한 조목이나 따져 원대한 염려를 소홀히 하지 마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임금이 이미 치욕을 당했으니 종묘사직이 장차 폐허가 될 것이므로 높은 신하ㆍ낮은 신하 할 것 없이 분주하게 노력하여 허둥지둥 바삐 마치 불을 끌 때처럼,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할 때처럼 해도 오히려 망하는 것을 구원하지 못할까 염려스러운 일인데, 어떻게 한 때의 기풍이 해이되고 태만해져 대체로 평일과 다름없어 오랑캐의 사신이 불난 집에 깃든 제비나 참새가 화가 미칠 것도 모른 채 안심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야유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아, 통탄스럽습니다. 생각건대 하늘이 장차 우리나라를 멸하려고 먼저 정신을 빼앗은 것입니까. 어찌 그리 현명하다 하는 사람도 우둔해지지 않은 이가 없습니까. 신은 듣자오니, 천하의 모든 일이 임금의 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보니 전하께서 덕을 닦고 시정 방침을 세우는 것이 해가 갈수록 게을러져 비록 큰 난리를 새로 겪어 갖은 고생을 맛보시고도, 벌벌 떨며 위기의식을 갖기를 성탕(成湯 은(殷)의 시조)처럼 하거나, 난리를 뜨끔히 여기어 후환(後患)을 삼가기를 주(周)의 성왕(成王)처럼 하거나, 마음가짐을 깊숙하고 성실하게 하기를 위 문공(衛文公)처럼 하거나 하지 못하시고 계십니다.
명령을 발하는 사이에도 전날의 습관을 그대로 따라 조금도 고통을 씹으며 분발하고 고치어 새로 시작하려는 의욕이 없는 것 같아 천하의 큰 근본의 소재가 확립되지 못한 것 같으니, 만조 백관(滿朝百官)이 나태하고 모든 사무가 마비 상태에 빠져나날이 위태로와 망하려 하는 판국으로 치닫는 이유를 알 만합니다. 가만히 짐작컨대 전하께서 후금(後金)과의 맹약을 털끝만큼은 믿어 적들이 어쩌다 침입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어찌 천려 일실(千慮一朱)이 아니겠습니까. 왕회(王恢 한(漢) 나라 장군. 서역 정벌에 공을 세움)는 연(燕) 출신인데 오랑캐의 일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의 말에 ‘흉노(匈奴)는 맹약(盟約)해 놓고 몇 해 안가 곧 다시 배신한다.’ 했습니다.
그 밖에 진(晉)ㆍ송(宋) 나라의 실패한 사적은 더욱 분명하니 경계할 만합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국토 회복의 큰 계책을 방해하고 변방을 수비하는 불변의 규칙을 파괴하는 것은 다 맹약을 맺자는 사람들의 말 때문이다.’ 했으니, 대개 인심이 그것을 믿어 자치 능력이 쇠퇴하기 때문입니다.
송 태조(宋太祖)는 내탕금(內帑金)을 풀어 군량을 사게 하면서 ‘이것으로 오랑캐들의 머리와 바꾸도록 하라.’ 했습니다. 그 당시 거란(契丹)이 창궐하고 나랏일이 위급한 상황은 금일보다 천만 배나 못하였지만 그렇게 쉽게 자기 소유를 희사하여 군용에 보태었는데, 근일에 베푸는 것은 오히려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전하께서 편안을 탐해 고식적으로 지내려는 생각이 은미한 가운데 날로달로 불어나서 마침내 스스로 노력할 여지가 없어지면 그로 인하여 나라가 망한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아, 지난 일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동방 예의의 나라요 당당한 제후국의 임금으로서 머리를 굽히고 오랑캐와 강제 맹약을 맺어 이 오랑캐들에게 시종 만족감을 주었으니 이미 씻기 어려운 수치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오랑캐의 끝없는 욕심은 채우기 어렵고 틈은 쉽게 벌어지니 어느 날 저녁 안심하고 잠을 잘 때 그들이 또 들이닥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옛글에 ‘치욕이 있어야 분발할 줄 알고 분발할 줄 알아야 스스로 노력할 수 있고 스스로 노력한 뒤에야 정무를 집행하고 국가를 보전한다.’ 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회계(會稽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패전하고 굴욕적인 맹약을 맺은 곳)의 치욕을 잊지 마시고 와신상담의 뜻을 늦추지 마시어 비상한 각오를 세워서 오래오래 가는 정성을 견지하소서. 그러면 설욕할 날이 없을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금일의 상태는 사람의 계책과 사력(事力)으로는 결코 다시 회복시킬 가망이 없고 바라는 것은 오직 천도(天道)가 순한 이를 돕고 덕이 있는 이를 도와주는 것이니, 바라건대 지금부터라도 호령을 발하고 일을 할 때 반드시 먼저 스스로 ‘이것이 하늘의 마음에 합치(合致)되는가 않는가.’를 생각한 뒤에 합치되면 행하고 합치되지 않으면 그만두소서. 일마다 이렇게 하고 날마다 이렇게 하면, 높이 위에 계시면서도 날마다 이것을 감시하는 하늘이 어찌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가만히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또 언론의 길을 넓히고, 종묘제례악을 그만두고, 내수사(內需司)와연해(沿海)의 어염(魚鹽)을 혁파하고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에 보태고, 흥경원(興慶園 인조 생부 원종의 추존되기 전의 묘 이름)을 천천히 몇 해 기다려 옮겨서 오로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며 분발하여, 각고면려할 것을 결심하기를 청하니, 상이 손수 비답하기를,
“여러 번 지당한 논의를 진술하여 나의 잘못을 바로잡고 모자람을 채워 주니 당연히 가슴에 새겨 잊지 아니하여 경의 지성(至誠)에 부응(副應)하겠다.” 하였다. 얼마 후 대사헌ㆍ부제학에 재임명되었다.
무진년(1628, 인조 6)에 대사헌으로 유효립(柳孝立)의 반역 사건 심문에 참여하고 인하여 인성군 공(仁城君珙)을 용서치 말고 법대로 처리하기를 청하였다. 참찬(參輦)에 임명되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직하였다. 얼마 뒤 다시 부제학에 임명되고 겸직은 그대로 지녔다.
선생이 ‘들어가서는 도덕을 이야기하고 나가서는 형벌을 다루는 것이 온당치 못한 일이다.’ 하고, 드디어 지의금부사를 사임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명령을 내린 것이 대부분 불합리하니, 생각건대 편안하고 한가한 곳에 깊숙히 거하여 존양(存養 본심을 보존하고 본성을 육성함)이 깊고 두텁지 못해 그러한가 합니다. 마땅히 자주 유신(儒臣)을 접견하여 덕성을 함량하는 공부를 돕게 하소서.” 하였다.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진급하였다. 정부에서 적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돌아온 사람들을 오랑캐에게 송환하려고 하니, 선생이 차자를 올려 그 불가함을 진술하기를,
“‘백성의 부모가 되어 적군이 침략해 온 날에 보호해 주지 못하고서 급기야 목숨을 걸고 탈출해 돌아온 사람들을 또 오는 족족 붙잡아 돌려보낸다는 것은 천리(天理)나 인정으로나 차마 못할 일이다.’ 하셨으니, 지금 마땅히 먼저 이난(李灤)을 참수하여 그가 중간에서 함부로 승낙한 죄를 바로잡고 답서를 고쳐 짓되 명백하고 통절하게 하소서. 그러면 그로 인하여 그들의 부당한 요구가 다소 변경될 것입니다.
신이 어제 변방의 신하가 급히 보고한 것을 보니, 적들이 구련성(九連城)에 주둔하여 강물이 얼면 동쪽으로 진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땅히 이런 장계(狀啓)들을 한데 엮어 동지사(冬至使 해마다 동지에 중국에 보내던 사신) 편에 부쳐 아뢰고, 아울러 산해관(山海關)ㆍ영원위(寧遠衛 중국 요동에 있던 군사 기지) 등을 대비하게 했다가 적들이 동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엿보아 바로 그 소굴을 공격하게 하면 이것이 명 나라 군대가 대승할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니 적들 또한 형세가 불리하여 뜻대로 침략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반정(反正)하신 초기에 정신을 가다듬고 정치를 도모하시므로 안팎이 눈을 씻고서 지금까지 기대해 왔으나 정치의 효과는 찾아볼 수 없으니, 당초에 정신을 가다듬고 하시던 그 뜻이 과연 성실한 마음에서 나왔다면 오늘날 밖에 나타난 징험이 이렇듯 보잘것없겠습니까. 말을 하는 것이 마음에도 없는 것인 데다 일을 실시하는 것도 다 그 말과 같지 않아서 표리가 부동하고 앞뒤가 서로 틀리니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도리가 하늘과 합치되지 못했습니다.
이러하면 사람에게 신용을 얻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하늘의 신용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의 덕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전하께서 6년 동안 걱정하며 애태우셨지만 아직까지 백성들이 안주하는 효과가 없고 도리어 흙산이 무너지듯 하는 판국이니 지금 백성들의 안식처를 마련해 주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중용(中庸)》의 요체인 성(誠)의 의미에 대해서 진실로 이미 밝게 알아 의심이 없으십니다. 정자(程子)가 ‘읽지 않았을 때도 그저 그런 사람이고 읽고 난 뒤에도 그저 그런 사람은 안 읽은 것과 같다.’ 하였으니, 전하께서 우려하실 일입니다.”
하였다. 당시 상이 바야흐로 《서전(書傳)》을 수강 중이라 선생이 왕명을 받들어 혼천의(渾天儀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기구)를 만들어 올렸다. 기사년(1629, 인조 7) 봄에 변방의 신하가 ‘모문룡(毛文龍 명 나라 장군)이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급히 보고하매, 정부에서 중신(重臣)을 보내어 분쟁을 해결하려고 하므로 선생이 차자를 올려 그 불가함을 진술하고, 다시 재이(災異)가 있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동중서(董仲舒 : 중국 전한의 유학자)의 말에 ‘하늘이 임금을 사랑하여, 원래 극도로 무도한 세상이 아니면 하늘은 다 붙잡아 주어 안전하도록 하려 한다.’ 하였고, 호씨(胡氏)도 ‘하늘의 경고를 명심해 힘쓰면 비록 괴이한 현상이 있으나 재앙이 응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하늘이 임금을 사랑하시는 마음을 깊이 체득하고 더욱 평일의 경외하는 도리를 다하여 강건한 덕이 날마다 심중에 쌓이게 하며 맑고 밝은 정치가 나날이 외부에 시행되게 하소서. 그러면 일시의 요사한 기운이 밝은 태양 아래 구름이나 안개가 걷히듯 저절로 사라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반드시 도래하여 실패를 볼 것이니, 하늘이 사랑해 주시는 것 또한 어찌 자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얼마 후 휴가를 청해 고향에 돌아갔다가 4월에 조정에 복귀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보좌와 인도함을 힘입어 때로 분노와 사욕이 발동해도 잘 억제했는데, 경이 떠나가고 오래지 않아 내 마음이 황폐해졌다.”
하였다.
세자(世子)의 명령을 받고구사(九思)와 구용(九容)을 병풍에 써서 올렸다. 5월에 대사헌에 재임명되었는데 갑자기 중풍 증세가 있으므로 상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여러 번 사임을 청하여 해임되었다가 바로 우참찬(右參贊)ㆍ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다.
휴가를 청해 영천(榮川)의 초수정(椒水井)에서 목욕하고 이어 천천히 나아가 상주 고향에 돌아가서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상이 융숭한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고 이조 판서에 임명하자, 다시 상소하여 사임하니 온정이 넘치는 교지를 내려 재촉하여 부르매 부득이 들어가 사은하였다.
또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의 별칭)을 겸직시키매 힘써 사임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드디어 시사(時事)로써 자임하고 공정한 마음으로 안색을 엄정히 하여 과격하지도 맹종하지도 않았다. 인재를 잘 뽑아 쓰고 선비들의 여론을 조화시키고 과거(科擧)의 문체를 평이하고 성실히 하게 하여 괴벽(怪癖)하거나 난해(難解)한 말을 일체 못쓰게 하였다.
경오년(1630, 인조 8)에 지경연사(知經筵事)ㆍ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직하였다. 가도(椵島 평북 철산군에 있는 섬)에 주둔하고 있는 명 나라 장군 유흥치(劉興治)가 그 주장(主將) 진계성(陳繼盛)을 살해하니, 상이 군대를 일으켜 토벌할 것을 의논하매, 선생이 상소하여 그 불가함을 진술하기를,
“당초에 여론이 다 유흥치 무리가 반드시 자기 군대를 들어 후금에게 투항하여 명 나라를 배반할 것이니 의로운 군대를 일으켜 명 나라를 위해 반역 도배들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어전 회의 때 큰 계획이 즉시 확정되었는데, 소식을 들어 보니 그들이 후금에게 투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진계성(陳繼盛)이 후금과 내통했다고 모함하여 명 나라 조정에 보고했습니다.
유흥치가 멋대로 살해하고 함부로 모함한 죄는 참으로 토벌해 죽이지 않을 수 없으나 그가 후금과 밀통하여 반역을 도모한 실상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우선 천천히 명 나라의 지휘를 기다려 처리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 뒤 차자를 여러 번 올려 사의를 표하였으나 상이 온정이 넘치는 교서를 내려 불허하였다. 목릉(穆陵 선조대왕의 능)을 이장할 때 왕명을 받고 묘지문(墓誌文)을 개작하였다. 또 하지(賀至 동지를 축하하기 위해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의 예식을 임시로 그만두도록 청하였다.
당시 상이 첩녀(妾女)를 궁녀로 들인 소문이 있으므로 이명준(李命俊)이 상소하여 논박(論駁)하고, 비변사의 회계(回啓 : 임금의 하문을 심의하여 아룀)도 상의 뜻을 크게 거스르고 삼사(三司)와 승정원도 다 간쟁 하였으나 전부 소용이 없었다.
선생이 아뢰기를,
“이 일은 하잘것없는 것이니, 이것이 민간에서 와전된 소문이라면 전하께서는 보통의 기분으로 ‘그런 일 없다.’ 하시고, 만일에 사실이라면 전하께서는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즉시 고치겠다.’ 하시면 상의 가슴속은 아무런 일도 없을 것이고, 광명정대하며 시원하고 너그럽고 화평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인정과 의리가 통할 것입니다.
장사숙(張思叔 : 장역(張繹)은 일개 필부(匹夫)인데 종을 꾸짖으며 욕하다가 정자(程子)에게 ‘어찌 마음을 다잡아 성질을 굳게 참지 못하는가.’ 하고 나무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임금으로서 대신에게 응답하면서 이러한 말소리와 낯빛을 지으셔야 되겠습니까.
바라건대 이치를 살피고 사물에 응할 때에 마음을 비우시고, 억제하기 어렵고 쉽게 충동되는 경우에 힘을 쓰시어 분노하여 거역하는 감정을 구름이나 안개가 걷히듯 삭이소서. 그리고 지난번 일을 돌이켜 생각하시면 반드시 뉘우치는 마음을 누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의 감정이 드디어 풀리니 온 조정이 서로 경하하였다. 당시 성문(城門)에 비방하는 글을 써 붙인 사건이 있자, 선생이 드디어 당세에 미련이 없어져 휴가를 청해 귀향하고 복귀하지 않아 해임되었다. 한가히 살며 간혹 소명(召命)이 있어도 다 부임하지 않았다.
신미년(1631, 인조 9)에 상이 훈재(勳宰)의 의논을 따라 생부를 왕으로 추존할 것을 결심하니, 선생이 봉사(封事)를 올려 그 불가함을 역설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자기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은 무릎 위에 앉힐 듯이 하시고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은 연못 속에 빠뜨릴 듯이 하십니다. 이렇게 나가다간 아첨하는 자들은 날마다 득세하고 곧은 말 하는 사람은 얼씬도 못할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상의 교서(敎書)를 보니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이후의 나보다 나은 임금들도 다 추존을 하였으니 나만 어찌 그렇게 하지 못하겠는가.’ 하셨는데, 제갈량이 이른바 ‘망녕되이 스스로 못났다고 여겨 틀린 비유를 끌어대어 충간(忠諫)하는 길을 막는다.’고 한 것과 불행하게도 흡사합니다.” 하였는데, 회답이 없었다.
6월에 후금(後金)의 기병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환을 무릅쓴 채 국난에 달려가 보은군에 이르렀는데 병이 더욱 중해져 전진하지 못하고 상소하여 심정을 진술하였다. 이뒤로 병세가 영영 호전 되지 않았다. 8월에 왕세자가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동궁의 관원을 보내 약과 음식을 가지고 문병하게 하고 상도 의원을 보내 진찰하게 하였다. 11월에 좌참찬에 제수되매 글을 올려 사임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신년(1632, 인조 10)에 선생이 나이를 들어 사임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금은 선왕 시대의 원로 대신이 사퇴할 때가 아니니, 내 간곡한 뜻을 받들어 몸조리하고 올라오라.”
하였다.
또 상소하여 본직과 겸직을 사임하기를 청하매 윤허하였다. 얼마 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6월에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승하했는데 선생은 병 때문에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고 상소하여 심정을 진술하였다. 대사헌에 임명되매 또 글을 올려 사임하였다.
계유년(1633, 인조 11) 6월 정축일에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임종을 맞이하여 집안사람에게 말하기를,
“남자는 부인의 손길 아래 죽지 않는 법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 장례는 반드시 예법대로 하라.”
하였다. 부고가 올라가니 상이 크게 애도하고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국법에 따라 조문하여 부의를 보냈으며,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추증하고, 특히 왕세자에게 거애(擧哀)하게 하였다. 8월 갑신일에 함창현(咸昌縣 : 현재 상주군의 읍) 검호(檢湖) 부근 언덕 묘향(卯向)에 안장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꿈을 꾸고 ‘새로 거처하는 곳에서 10리나 뻗쳐 연꽃이 피었더라.’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과연 좋은 곳에 영주하시게 되었으니 아, 예언이 적중한 것인가. 왕세자가 따로 부의(賻儀)하고 동궁(東宮)의 관원을 보내 제사 지내게 하며 겸하여 하관하는 것을 지켜보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정 빈객(鄭賓客 빈객은 세자를 가르치는 벼슬)은 평생 예를 좋아했으니 동궁 관원은 실례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장례일에 원근에서 참석한 사람이 4백여 명이었다.
을해년(1635, 인조 13)에 선비들이 선생을 도남서원(道南書院)에 배향하였다. 《우복문집(愚伏文集)》 10여 권이 있다.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초록하여 《주문작해(朱文酌海)》라고 명명한 책이 세상에 유포되고 있고, 《사문록(思問錄)》ㆍ《상례참고(喪禮參攷)》 등은 다 미완성 저서이다.
부인은 전의 이씨(全義李氏)니 부장(部將) 해(海)의 딸인데 후사(後嗣)가 없고, 후실 부인은 진보 이씨(眞寶李氏)니 학생 결(潔)의 딸이고 참판(參判) 우(堣)의 증손녀이며 퇴계 선생의 종손녀(從孫女)이다. 어질고 유순하며 정숙하고 명철하여 집안을 질서 정연하게 잘 다스렸다.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검열(檢閱)을 지낸 심(杺)이니 뛰어난 재주를 지녔고, 차남은 학(㰒)이니 뜻과 행실이 비범하였는데 다들 요절하였다. 두 딸은 생원 노석명(盧碩命)과 찬선(贊善) 송준길(宋浚吉)에게 시집갔다. 서자가 하나 있으니 만호(萬戶)를 지낸 역(櫟)이다.
검열은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도응(道應)이니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되어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를 지냈고, 딸은 참봉 조한수(趙漢叟)에게 시집갔다. 노석명은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사영(思永)이고 두 딸은 전익구(全益耈)와 이송래(李松來)에게 시집갔다.
송준길은 아들이 하난데 광식(光栻)이다. 참봉은 딸 둘이니 학생 나명좌(羅明佐)와 판서(判書) 민유중(閔維重)에게 시집갔다. 역은 아들 하나를 두었다. 나는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지 못하였으나 일찍이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이 말하기를, “우복은 본래 정직한 사람이다. 예학(禮學)에 통달한 점은 퇴계보다 나은 것 같다. 지금 세상에서 학문을 논할 만한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다.”
한 말씀을 들었으니, 선생의 품성과 학문을 이 말씀에 의하여 대략 알 수 있다.
또 일찍부터 찬선 송공 준길(宋公浚吉)과 교유하여, 그가수제자로 도통(道統)을 전수받은 것을 알기에 그가 선생을 높이고 칭송한 말을 믿어서 금세와 후세에 증명할 수 있다. 그가 행장에 쓰기를,
“선생은 키가 크고 이마가 넓으며 눈빛은 번쩍거렸다. 타고난 자질이 호쾌하고 시원하며 준걸스럽고 위대하며 맑고 엄하며 예의를 좋아하였다. 마음가짐은 충후함과 관대함을 위주하고 배움은 정밀히 생각함과 실천함을 근본으로 하셨다.
퇴계를 사숙하고 주자에게 소급하여 두 분을 상상하고 흠모하면서 모범으로 삼았다. 내적 수양이 두터워지매 모습은 저절로 광채를 발하여 바라보면 높고 깊어서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으나, 사람을 접견할 때에는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여 화기가 애애하니 그 기상을 듣고 덕성스러운 모습을 뵙는 사람들은 모르는 중에 심취(心醉)하고 정성으로 복종하였다. 선생이 어버이를 섬길 때 봉양하는 데는 그 효성을 다하고 거상하는 데는 그 슬퍼함을 다하였다.
항상 나라 원수를 못 갚고 한 하늘 아래 사는 것을 통분히 여겨 일본 계통의 모든 물건을 절대로 집 안에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사당에 참배하고 비록 채소나 현미도 없어 끼니를 잇지 못하더라도 제사 음식만은 반드시 갖추었다. 연로한 숙부가 있었으므로 생부와 같이 봉양하였고, 여동생 집이 가난하자 손발같이 사랑하여 도와주었다.
집안에 예의의 가르침이 성행하여 엄숙하고 안온한 것이 조정과 같았다. 선생이 고향에 있을 때 예의를 밝히고 교화를 높이며 풍속을 바로잡는 것을 힘썼다. 곤궁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기에 선비들과 백성들이 다 스승으로 섬기며 자기들 부형처럼 경애하였다.
중간에 소인이 득세하는 세상을 만나 은거하여 학업을 닦으며 당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성군이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고 성군과 현신이 잘 만나 당대 정치의 잘잘못을 논쟁하는 임무를 맡기니 10년 가까이 재임하였다. 선생이 이미 임금의 덕을 도와 육성할 것을 자기의 임무로 작정하고는 매양 나아가 응대할 양이면 미리 재계하고 마음을 정밀히 하며 정성을 모았다.
모든 당대 정치의 잘잘못, 백성들의 기쁨과 슬픔, 도의와 잇속,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천리와 인정, 왕도와 패도를 구별하면서 고금의 사적에 근거하고 경전과 역사서를 자유 자재로 구사하며 일에 따라 올바른길을 아뢰는 데 남김없이 다 쏟아 놓았다.
그 말이 온후하고 화평하며 자세하고 간곡하니, 당시 사람들이 범순부(范淳夫 순부(淳夫)는 송 나라의 현신 조우(祖禹))에 비겼다. 인조대왕도 겸허하게 경청하고 스승의 예로써 대하며 오직 하루라도 곁에 있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장릉(章陵 : 원종의 능호)의 논의(원종을 추존하는 문제)는 실로 천고(千古)의 변칙적인 예인데, 선생만이 의견을 고집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위로 임금의 뜻을 어기고 아래로 당시 재상과 서로 어그러져 비방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도 끝까지 후회하지 않았다.
평상시 엄연히 단정하게 앉아 홀로 명백 광대한 도의 근원을 관조하였다. 몸가짐이 겸손하여 절대로 자랑하는 기색이 없었고 글을 난해하게 짓거나 기교 부리는 것을 항상 경계하였다. 은혜와 원망, 시기하여 박해하는 일 따위는 아예 입에도 담지 않았다. 불행이 닥치건 행복이 닥치건 기쁘게 순리대로 처신하여 털끝만큼도 마음에 동요함이 없었다.
항상 자제들을 훈계하기를 ‘학자가 마음을 작정하는 근본은 마땅히 극진함으로 법을 삼아야 하고, 극진하지 못함으로 표준을 삼아서는 안 된다. 옛사람이 이른바 「어짊이 요(堯) 임금 같지 못하거나 효성이 순(舜) 임금 같지 못하거나 학문이 공자(孔子) 같지 못하면 다 자포자기이다.」 했는데, 이는 참으로 경계하여 반성해야 할 말이다.
외물이 아득하여 내게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으니, 세상에서 한 재주를 가지고 스스로 광고하는 자는 어찌 천박한 사내가 아니겠는가.’ 하고, 또 ‘사람은 모름지기 모른다, 못한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마침내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것이 없는 데에 도달할 수 있다.’ 하였다.
항상 세상에 인재가 없다고 탄식하며 ‘웃사람이 인재를 기르는 방법이 본래 올바른길이 없고, 아랫사람이 스스로 처신하는 방법도 비근한 데에 국한되어 있다. 시문(時文 과거에 쓰이던 문체)을 가지고 과거에 합격하면 스스로 「내가 할 일은 여기서 끝났다.」 하고는 다시 학문에 뜻을 두지 않는다.
그 때문에 조정에 들어가서는 인의 도덕의 말을 임금에게 아룀이 없고, 백성에게 임해서는 가르쳐 인도함이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니, 세상의 도의가 옛날 같지 않은 것을 어찌 괴이쩍게 여기리요.’ 하였다. 평생토록 주자의 글을 무척 좋아하여 항상 말하기를 ‘천고 이래로 어찌 이러한 문장이 있으리요. 나머지 문장으로 유명한 대가들이란 광대 따위와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
말년에 병으로 일상의 사물에서부터 자제들의 이름까지 잊어서 기억하지 못해도 주자의 글을 언급할 때는 상쾌한 정신으로 몇 줄을 인용하여 그 귀착되는 취지를 철저히 논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예기(禮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더러 새로운 학설로 옛 유학자와 이견을 내세우면 반드시 정색하고 준엄히 책망하기를 ‘주자께서 실천한 뒤에 말한 것이니 후학들은 마땅히 도타이 믿어 정밀히 연구나 할 일인데, 심지어 비슷하게 표절하여 붓과 혀를 놀려대니 어찌 오도(吾道 유교)의 죄인이 아니랴.’ 하였다.
선생은 본성이 맑고 깨끗하여 일체의 세상 맛에 담박(淡泊)하였고, 누가 선물이라도 보내면 바로 친척에게 나눠 주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 같아서이다.’ 하였다. 재상의 지위에 있은 지 40여 년이었으나 서울에는 집 한 채 없고 시골에는 밭 한 뙈기 없었다.
오직 산과 물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어 한번 마음에 맞는 곳을 만나면 곧 즐거워하여 돌아가는 것도 잊었다. 비록 사무가 바쁠 때라도 정신은 항상 고향의 물과 돌에 가 있었다. 이조 판서의 제수를 노쇠하고 병든 후에 받아 정력이 실상 미치지 못하였으나 한 가지 일도 감히 구차히 처리하지 않았다.
외사촌 동생과 매제가 있어 둘이 벼슬 청탁을 매우 간절히 하여도 선생은 끝까지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으시며 ‘두 사람은 다 모든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못 되거늘 어찌 사사로운 정으로써 조정의 명기(名器 명은 작위(爵位), 기는 수레와 의복으로 벼슬을 말함)를 가벼이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창석(蒼石 : 이준(李埈) 이공(李公)이 매양 선생이 지공무사(至公無私)하다고 감탄했다. 선생의 문장은 육경(六經)에서 나오고 성리학에 뿌리 박아 괴벽한 글이나 기이한 말을 구사하지 않았다. 더욱 상소와 차자를 잘 지었는데, 원만하고 후하며 바르고 고상하며 명백하고 간절하여 임금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논자들이 평가하기를 ‘근세에 대가라고 일컬어지는 몇몇이 있지만 선생에게 필적할 만한 이가 없다.’ 하였다. 시를 짓는 데 자세하고 적절하게 갈고 닦고 하여 남들이 형용하지 못하는 곳을 묘사해 내었다. 그러나 반드시 지어야 할 경우에나 지었고, 그렇게 즐겨 짓지는 않았다.
필법은 단정하고 무게가 있으며 조심성 있고 치밀하여 비록 보통의 편지일지라도 다 법도를 지켜 썼다. 선생은 천성이 겸손함을 좋아하여 사도(師道)로써 자처하지 않았는데 당시 학사와 대부 및 영남의 선비들이 학문과 예의를 강론하면서 다들 선생의 바른길을 본받아 행하였고, 선생의 가르침을 듣고 지향할 바를 안 사람들은 부지기수이다.
아, 선생의 학문과 재능은 옛사람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고 당시의 대우도 융숭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시운이 불행하여 재난이 끓이지 않았다. 정묘호란 이후 임금에게 아뢴 글에 나타난 것이 간곡하고 지성스럽게 되풀이되어 갈수록 더욱 간절해져서 거의 어렵고 위태로운 나라를 구원하고 국치를 씻을 뻔하였다.
수십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그 말씀이 정확하고 분명한 것이 어둠 속에서 촛불을 비추어 보고 거북점을 쳐서 아는 것과 같고, 증험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없다. 만일 지금처럼 태평한 세상에서 한 자리에 참석하시어 다행히 임금님의 마음에 맞았다면, 쇠운을 만회(輓回)하고 재건하는 데 어찌 보탬이 되지 않겠는가.
선생이 정묘호란 때에 이른바 ‘송 태조 때보다 천만 배나 극심하다.’고 한 것으로 또 지금(병자호란 이후)이 정묘호란 때보다 천만 배나 극심한 상황임을 알아, 통분히 여기고 분발하여 궐기해서, 독한 약이어야 중병이 낫듯이 그런 효과를 거둔다면 선생의 뜻과 행실이 앞서 일찍 이루어지건 뒤에 늦게 이루어지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벼슬하는 선비들이 서로서로 선생의 언론과 지시 가운데 만에 하나라도 스승삼아 사모하여, 반드시 선한 도리를 아뢰고 경계시키는 것을 충성으로 여기며 공연히 벼슬자리에 앉아 봉록만 축내는 것을 수치로 알고서, 임금의 덕을 날마다 위에서 높아지게 하고 백성의 생활을 나날이 아래에서 만족스럽게 만들어서 은연중에 참으로 퇴한 국운을 일으키고 난리를 평정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선생은 비록 갔어도 영혼은 불멸하니 저승에서나마 유감이 없을 것이다.
아, 이 어찌 쉽게 속인들하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리요.”하였다. 나의 선친도 난리 속에서 용기를 잃지 않으신 지조가 있었는데, 선생이 자기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여 자주 사람들에게 칭찬하였으니, 선생이 선하고 의로운 일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드러나지 않은 미담(美談)을 밝혀 널리 알리는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제 공의 시호를 청하는 글을 짓기를 청하매 끝까지 사양할 수 없었다. 더욱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대한 감회가 깊다.
이에 대략 찬선(贊善) 송공이 지은 행장(行狀)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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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복희(伏羲)의 선천학(先天學): 선천학이란 선천도(先天圖)에 의거한 역학(易學)이다. 지금 주역의 팔괘도(八卦圖)는 문왕(文王)의 후천도(後天圖)이다. 팔괘를 방위(方位)에 배정하는데, 후천도는 진(震)을 동, 태(泰)를 서, 이(離)를 남, 감(坎)을 북, 간(艮)을 동북, 건(乾)을 서북, 손(巽)을 동남, 곤(坤)을 서남에 배정한다.
선천도는 이를 동, 감을 서, 건을 남, 곤을 북, 진을 동북, 간을 서북, 태를 동남, 손을 서남에 배정한다. 이 선천도는 삼황 오제의 한 사람인 복희가 창조한 것으로 도가(道家)의 비법으로 전수되다가 소옹이 전수받아 상수(象數)에 의거하여 우주 만상의 생성 과정을 연역해 내는 선천상수학(先天象數學)을 확립하였다 한다. 《皇極經世書》
[주02] 명도 선생(明道先生)의 말 : 명도는 송(宋)의 유학자 정호(程顥)의 호. 정호가 “말단 관리라도 만물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쓴다면 사람들에게 반드시 이로움을 줄 것이다.[一命之士苟存心於愛物 於人 必有所濟]” 하였다. 《小學 嘉言》
[주03] 김직재(金直哉)의---연루되어: 김직재의 옥사는 1612년에 봉산 군수 신율(申慄)이 병조(兵曹)의 문서를 위조해 사용하다가 체포된 김경립(金景立)이란 자를 문초하던 중, 김경립이 김직재ㆍ김백함(金百緘) 부자(父子)가 군사를 모아 모반을 꾀한다고 발설했다.
왕은 이 보고를 받고 김직재 등을 국문했는데 이들은 고문에 못 이겨 이호민(李好閔) 등 네 사람과 함께 진릉군(晉陵君)을 받들어 반란을 일으켜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大北) 일파를 제거하려고 계획했다고 자백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직재 등은 모두 사형당하고 1백여 명의 소북파(小北派)가 처벌을 당했다.
이것은 대북파가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옥사였다. 그런데 관련자 중 유팽석(柳彭錫)이란 자가 거짓 자백하기를 “강음(江陰)의 산속 절에서 벽 너머로 두 중이 얘기하는 것을 들으니 ‘김직재가 합천 정인홍(鄭仁弘), 동래 정경세와 모의한 뒤에 거사한다.’고 했습니다.”
하니 광해군이, 정경세는 동래 정씨가 아닌데 웬말이냐고 묻자, 그는 “중의 말을 들었을 뿐이니 내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다. 광해군이 정인홍이 그럴 리 없다고 하고는 유독 선생만을 체포하라고 하여 연루되어 세 아들과 다섯 종들도 다 체포되었다. 《愚伏年譜》
[주04] 이의신(李懿信)이---청하였다: 1612년에 이의신이 임진왜란과 여러 차례의 역변(逆變)과 당쟁(黨爭) 등이 일어난 것은 서울의 지기(地氣)가 쇠퇴한 탓이므로 경기도 파주의 교하(交河)로 천도함이 좋다고 상소하여 왕의 동의를 얻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주05] 위소(魏邵)의 고사: 위소는 후한(後漢) 사람. 당시 태수(太守) 사필(史弼)이 무고를 당해 사형을 선고받자 위소가 동지와 함께 저택을 팔아 집권자에 뇌물을 바쳐서 사형을 면하게 한 일을 말한다. 《後漢書 卷64 史弼傳》
[주06] 정자(程子)가 염려한 것 : 송 영종(宋英宗)이 복안의왕(濮安懿王)의 아들로서 인종(仁宗)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복안의왕을 숭봉하여 천자(天子)의 대우를 하려 하여 이 때문에 조정의 논의가 분분하였는데, 정자가 반대 의견을 써서 올린 글 가운데 “간사한 자가 은총을 탐해 공고히 하려고 사리사욕을 위해 도의를 해치며 효도를 손상시켜서 폐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합니다.
…… 교묘한 말로 힘써 폐하를 기만하려고 합니다.” 하였는데 이 말은 인조가 생부를 추존하는 것은 불의이며 불효임을 말하고, 주장하는 무리도 흑심을 품었다는 것을 경고한 것이다. 《二程全書 卷45 代彭思永上英宗皇帝論濮王典禮疏》
[주07] 연해의---설치: 연해의 어염을 혁파하자는 것은 그 면세를 혁파하자는 것이다. 당시 여러 궁가에서 연해 어염을 차지하고 나라로부터 면세를 허가받아 이익을 독점하였기 때문에 이에 과세하여 군비에 보태자는 것이다. 또 둔전 운운은 갈밭[蘆田]에 둔전을 설치하자는 것이다. 《愚伏集 卷5 玉堂論時務箚》
[주08] 구사(九思): 군자(君子)는 아홉 가지 경우에 잘 생각해야 한다. 보는 데는 밝음을 생각하고, 듣는 데는 이해할 것을 생각하고, 안색은 온화할 것을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 말은 성실할 것을 생각하고, 일은 경건할 것을 생각하고, 의문은 물을 것을 생각하고, 분노에는 난처한 경우를 생각하고, 이득에는 의로운가를 생각한다. 《論語 季氏》
[주09] 구용(九容): 몸가짐에 대한 가르침. 군자는 발은 진중히 하고, 손은 공손히 하고, 눈은 단정히 하고, 입은 반듯이 하고, 목소리는 조용히 하고, 머리는 곧게 하고, 기색은 엄숙히 하고, 선 자세는 덕성스럽게 하고, 안색은 장엄히 한다. 《禮記 玉藻》
[주10] 수제자로---전수받은 것 : 주자(朱子)가 병이 위독할 때 심의(深衣)와 저서를 제자 면재(勉齋) 황간(黃榦)에게 주며 “내 도(道)의 부탁이 여기에 있다. 나는 이제 아무런 유감도 없다.” 한 데서 도통(道統)의 전수를 의미한다. 《朱子大全附錄 卷6 年譜副本庚申》
↑우복 정경세 묘(愚伏 鄭經世 墓)>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부곡리 27-3(부곡초등학교 뒤)
↑우복 정경세 신도비(愚伏 鄭經世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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