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세거지 변천사.
오문(吾門)의 정묘보(丁卯譜'1987년)에 의하면,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오늘날 북측의 행정 지명으로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촌(옛 지명 황해도 금천군 지금리)에 대대로 분묘(墳墓)를 썼던 사실이 나타나 있다. 이것으로 미뤄, 일찍이 15世 열헌공(悅軒公) 무렵부터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믿어진다.
그러다가 17세 규(樛)의 증손(曾孫), 석(碩)이 여말(麗末)에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전남 나주(羅州)로 이거(移居)한 뒤부터, 일부 그곳에 자리 잡았던 것을 비롯해서 대체로 23세, 절(節)의 대(代) 이래로 경기도 안성(安城), 경북 예천(醴泉), 안동(安東)·상주(尙州), 경주(慶州), 전남 함평(咸平) 등지에 나뉘어 살았던것 같다.
17세 관(琯)의 자손들은 21세 인로(仁老)가 단종 손위(端宗遜位) 때에 전북 임실(任實)의 두곡리(杜谷里)로 살았던 이후 임실(任實)에 많이 살았다고 믿어진다.
관(琯)의 동생 제현(齊賢)의 자손들 중, 18세 서종(瑞種)의 후계(後系)가 21세 지회(之會)의 자손에서 경북 경산 자인과 안동 일직. 의성읍 및 의성군 신평면, 그리고 충북 제천 등으로 이거 하였고, 판윤공 지대(之帶)의 대에 경주(慶州)에, 23세 성지(成枝)의 대에 제천(堤川)에 각 각 정착하여 살게 되었고, 18세 달존(達尊)의 후계는 안성(安城)의 죽산(竹山), 청원(淸原), 진천(鎭川), 완주(完州)의 고산(高山), 영일(迎日)의 흥해(興海), 상주(尙州)의 함창(咸昌) 등지에 산거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달존의 2세 미(美)가 태종조에 제주(濟州)로 유배된 이후 일부가 제주(濟州)에 터를 굳혀 오늘날 천여 명이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제현(齊賢)의 셋째 아들 창로(彰路)의 후계(後系)는, 21세 문(聞)이 경북 영일(迎日)의 흥해(興海)로 낙향하였고, 20세 종지(種地)가 단종조 갑술년(甲戌年)에 지금의 함경남도 이원(利原)으로 유배되었으므로 이 무렵부터 이들 지역에 나뉘어 살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한편 17세 천(蒨)의 자손들이 22세 만선(萬善), 만원(萬元)의 대에 의성(義城)·대구(大邱)·산청(山淸)·철산(鐵山)에, 23세 간(簡)· 시영(時迎)의 대에 안동(安東)· 선산(善山)·청도(淸道)·순천(順天) 등지에 정착했던 사실이 '정묘보(丁卯譜)'에 보이며, 천(蒨)의 동생 매(邁)의 자손들은 18세 경원(敬元) 이래로 4대에 걸쳐 용인(龍仁)·봉산(鳳山)·상주(尙州) 등지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17세 과(薖)의 자손들은 안동(安東)· 양양(襄陽) 등지에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과(薖)의 동생 수(蓚)의 자손들은 수(蓚)가 여말(麗末)에 평북 곽산(郭山) 땅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 머물러 살았던 이후에 곽산(郭山)에 세거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5세 수(蓚)의 자손들은 20세 구산(龜山) 이래로 경주(慶州)에 살았고, 17세 손보(孫寶)의 자손들은 21세 득산(得山) 이래로 의성(義城)에 살았다고 믿어진다.
오늘날 자손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대표적 집성촌은 전남 영암군(靈岩郡) 영암읍(靈岩邑) 망호리(望湖里)이다. 이곳에 경주 이씨(慶州李氏)가 처음으로 자리잡은 것은 400여년 전, '제현(齊賢)의 9세손인 호암공 반기(湖巖公 磻琦)가 정미사화(丁未士禍)를 피해 이 마을로 오게 되면서부터이다. 현재 이 마을 1백여 가구가 경주이씨(慶州李氏) 자손들이다.
편집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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