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정 “남북 경제합의 다 버렸다, 그게 무슨 실용이냐”
입력: 2008년 06월 12일 09:23:49
6·15 1차 남북정상회담이 어느덧 8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6·15는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지난해 10·4 2차 정상회담은 그 후속이 초라하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후 악화일로를 걷는 남북관계에 따른 결과다. 북·미 관계가 개선되는 추세와는 정반대여서 더욱 기이하게 보인다.
실제 지난 100일 동안 남북간 이미 합의된 내용 중 무엇 하나 제대로 지켜지고 진전된 게 없다.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명한 10·4 정상선언도 사문화되었다. 총리 회담을 통해 추가로 세부합의된 사항은 말할 것도 없다.
통일부는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에게 옥수수 5만t을 보내겠다고 했다가 북한으로부터 무시당했다.
당시 노 대통령을 수행한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을 만났다. 그의 퇴임 후 첫 인터뷰였다. 말은 조심스럽게 했지만, 그는 무척 실망하고 낙담한 표정이었다.
그는 “분명한 것은 현 정부가 남북관계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점”이라며 “남북 경제에 대한 합의 등을 버리면 그게 무슨 실용이냐”고 토로했다.
촛불집회에도 나가 보았다는 그는 “정부 정책이 ABR(Anything But Roh·노무현 정부와 반대라면 뭐든지 좋다) 아니냐”고 비판했다.
● 이명박 정부는 6·15 공동선언은 물론이고 10·4 정상회담도 사실상 부인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현 정부가 대북 관계에서도 실용주의적 접근을 한다고 하면, 오히려 10·4 공동선언과 총리회담의 합의사항을 이행해 나가는 것이 가장 실용적인 거죠. 10·4 선언은 남북관계발전법이 정한 바에 따라 국무회의 심의를 거치고 대통령이 공포함으로써 발효 절차를 다 밟은 선언입니다.
그래서 이건 정치적 의도에 따라 또는 정권적 차원에서 무시하거나, 반대할 수 없는 것이에요. 여·야가 합의해서 만든 법으로 발효된 선언이 무시된다면 앞으로 정부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겠습니까. 남북간에도 그렇고 국민에 대해서도 그렇고. 10·4 선언은 유엔이 지지했고 남북 겸임대사들의 모임인 ‘평양클럽’도 지지했어요.
국민의 80% 이상이 지지했던 10·4 선언을 통일부가 업무보고에서도 일절 얘기하지 않고 대통령도 이 선언을 이행하려는 의지를 표명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남북관계를 해결해 나가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대북 문제와 관련해 현 정부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있다고 보십니까.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구성되자마자 통일부를 폐지한다고 하는 기본방침을 듣고 앞날이 걱정스러웠습니다. 남북간에 그동안 쌓아온 결실들은 다 어디로 갈 것인지 우려했어요. 제가 재임 때 통일부 폐지 문제를 놓고 열심히 활동을 했던 것은 단지 부처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남북 정책이 무시되거나 실종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기 때문이에요. 나는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가 남북관계와 관련해 한 일이 있다면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에게 가능한 길이 있고,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보여준 것 아닙니까. 특히 지난 정부에서 남북관계발전법 규정에 따라 남북관계발전 기본 5개년 계획을 지난해 12월에 고시한 것은 대단한 발전입니다.
국민들에게 앞으로 5년간 우리가 이런 목표로 이렇게 간다고 발표했던 것이죠. 지금 그것도 다 실종 상태에 있어요. 또 안타까운 것은 총리회담 합의사항이에요. 국회 비준동의를 받으라고 해서 국회에 제출했는데 17대 국회가 끝나면서 자동 폐기됐습니다.”
● 장관 재직 시에 개최했던 2007년 10·4 정상회담의 결과물들은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지난해에 단천 광산을 포함해서 북쪽에 있는 광산 세 곳을 공동 개발하기로 하고 공동조사까지 완료했어요. 이건 우리한테 이득이 되는 겁니다. 특히 북은 아연광이 좋은데, 우리는 아연을 100% 남미에서 수입하고 있어요. 우리가 북의 아연광을 개발하면 경제성도 있고 상당한 혜택을 볼 수 있는 거죠. 이게 실용입니다.
우리나라 기업 발전에 대단한 기회를 줄 수 있는 거예요. 개성공단도 그렇습니다. 2단계가 825만㎡(250만평)인데 개성공단은 경공업 업계에 큰 희망을 줘요. 해주공업지구는 우리 중화학 공업에 기여할 것이고. 조선 산업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나라에는 배를 만들 자리가 없다는 것 아닙니까. 남포와 안변 두 군데에 조선산업단지를 만들기로 하고 현지조사까지 다 끝냈어요. 그런데 이런 논의가 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개성공단은 1단계는 잘 진행되고 있지만, 2단계 준비작업이 안 되고 있어요.
3통(통행·통신·통관) 문제 합의한 것도 진전이 안 되고. 인터넷 설치하는 것까지 다 합의했는 데도. 2007년 11월 1차 총리회담 때 마지막까지 가장 힘들었던 게 3통 문제 합의였어요. 한덕수 총리가 밤을 새우면서도 그것만큼은 꼭 해야 한다고 집요하게 했었죠.”
●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은 어떻습니까.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는 남북회담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파워포인트로 보고를 한 사안입니다. 북쪽에서도 파워포인트 보고를 듣고 우리가 작성한 문서를 보면서 공부가 많이 됐다고 했어요. 서해라는 지역은 남북 간에 우발적인 충돌이 가능한 곳이에요.
이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지금처럼 핫라인을 통해 서로 사전에 연락을 하고, 어떤 일이 생겼을 때 해결하기 위한 공동 노력을 하는 것도 중요해요. 하지만 지상처럼 완충지역을 만들고 우발적인 충돌이 없도록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런 시도를 한 게 바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였어요. 노 대통령이 고심해서 제안한 회심의 작품이었죠. 대통령의 의지를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실무회담 단장으로 백종천 안보실장이 갔던 것이고. 그런데 지금 너무 아까워요.”
● 통미봉남(通美封南) 상황까지 가는 것 아닙니까.
“북측이 통미봉남을 했다고 평가하진 않습니다. 북측은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상당한 기간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어요. 선거 때 ‘비핵·개방3000’을 내놨을 때도 구체적으로 이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북측의 입장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해요.
나는 어떤 형태로든 이른 시간 내에 남북 당국자가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명분을 양측에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명분이 어떤 명분이 됐건 받아들일 수 있는 명분을. 지난번 뉴욕 필 공연도 그렇고 쌀을 보내는 문제도 그렇고, 우리가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이 정도의 인도적인 지원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의 구체적 제안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요.”
● 남북관계에 훈풍을 불어넣을 명분이 현재로선 없는 겁니까.
“10·4 정상회담 중에 김 국방위원장이 흔쾌히 받아들인 것 중 하나가 백두산 관광이고, 다른 하나가 남북 공동응원단이 철도를 이용해 베이징올림픽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김양건 부장에게 직접 이 부분을 합의문에 반드시 반영시키라고 지시까지 할 정도로 관심을 가졌어요. 철도는 처음 시작이 가장 중요한데 베이징올림픽이 아주 적절한 기회였거든요.
한 번 가면 두 번 세 번 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처음 시작이 어려운 거죠. 이건 양쪽 군부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명분이고. 내 임기 동안 건교부에 철도에 대한 현지실사를 서두르자고 해서 두 차례 현지실사도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도 철도 문제를 빨리 추진하는 게 실리적이고 실용적인 겁니다.”
“남북철도 열려 대륙까지 달려야 한다”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은 성공회대 교수로 복귀해 서예를 배우며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서예 작품의 주제도 통일로 정할 만큼 남북문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여전했다. l 정지윤기자
● 청와대, 국가정보원과 함께 10·4 정상회담 개최를 주관하셨는데, 당시 상황을 설명하신다면.
“정상회담이 참여정부 말기에 이루어져 시기가 늦어졌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공감을 합니다. 하지만 참여정부가 정상회담을 못한 채 넘어가면 연속성에 문제가 생겨요. 정상회담은 시기가 문제가 아니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봐요.
그래서 참여정부 임기가 끝나기 전에 반드시 정상회담이 열려야한다는 뜻을 북쪽에 여러 차례, 회담이 있을 때마다 의사를 전달했어요. 이게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북측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관계가 호전됐다는 것을 정상회담 개최의 배경으로 설명했어요.
북핵 문제가 일정 정도 해결 단계에 들어섰고, 6자간 관계 개선도 상당 수준 발전했고. 특히 남북관계가 지난 10년간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북쪽이 2006년 10월 핵실험을 했는데도 2007년 남북관계가 순항할 수 있었던 건 남북관계의 상황에 대해 북쪽이 이 같은 의미를 부여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정상회담 시기가 당초 8월 말이었는데 10월로 미뤄졌습니다. 북한의 수해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까.
“전혀 없어요. 지금이 어떤 세상입니까. 우리는 정상회담 준비하면서 알릴 것은 투명하게 알린다는 점을 원칙으로 했어요. 북쪽에서 수해 때문에 최소한 한 달을 연기했으면 좋겠다, 날짜는 우리보고 정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정부 일정이 있고 대통령 일정이 있으니까 원래 날짜 이외에 다시 잡는 게 어려웠어요. 추석도 끼고 대선도 가까이 있고. 또 각 정당이 후보 경선을 하고 있는 과정이었고. 이런 것을 모두 고려한 뒤 최선을 다해 고른 게 10월2~4일이 된 거예요. 북쪽에 그 날짜를 제안했고 북도 흔쾌히 받아들인 거죠.”
● 그때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습니까.
“제일 어려웠던 건 정상회담의 운영 원칙이었습니다. 북측은 정상회담이 남북관계의 큰 원칙을 합의하는 과정이 돼야 한다고 했어요. 우리는 그런 원칙을 넘어서서 실질적인 사안, 특히 경제협력이나 지역경제공동체까지 갈 수 있도록 구체적인 사안을 논의해야겠다는 입장이었고. 그래서 준비단계에서 논란이 있었고 합의를 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현지에서 열린 오후 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구체적인 사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결실을 낼 수 있었죠. 또 다른 문제는 북측이 6·15 공동선언으로 남북관계의 큰 방향 설정이 됐으니까 2차로 선언문을 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던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정상선언이라는 말 대신에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라는 복잡한 이름이 된 거죠. 사실 정상회담마다 선언문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그러나 남북 간의 두 번째 모임에서 첫 번째 보다 진일보한, 남북관계 방향에 관한 선언적 내용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문서가 원칙적인 선언과 실질적인 교류협력의 내용이 함께 포함된 문서가 된 겁니다.”
●‘아리랑’을 관람하는 문제도 논란거리였습니다.
“북쪽이 유연하게 나왔어요. 고치고 싶은 게 있으면 얘기하라고. 그래서 중간에 적을 무찌르는 장면 자체가 태권도 시범으로 바뀐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바꾸라고 얘기하진 않았어요. 북쪽이 보인 성의입니다. 또 카드섹션에서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기차가 달리는 장면을 보여준 것은 북이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정상회담 일정이 하루 더 늘어날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회담을 하루 더 연기하자고 했어요. 오전 회담을 마치고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나는 이게 단순한 외교적 표현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노 대통령과 조금 더 속 깊은 대화를 하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 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저는 옆에 앉아서 내심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어요. 하지만 그것을 얘기할 단계는 아니었어요. 노 대통령이 순발력 있게 그 문제는 우리 팀과 협의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넘어갔습니다.
만약 북측 제안을 받아들여 얘기를 더 많이 했으면 우리 쪽으로부터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겠지만 남북 간에는 상당한 수준의 진전된 얘기를 나눌 수 있지 않았겠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김 위원장이 왜 그런 제안을 했다고 보십니까.
“우선 그 전날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회담을 하면서 북쪽이 노 대통령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이해하게 됐을 겁니다. 우리는 정상회담을 한번 했기 때문에 김정일 위원장이 회담을 운영하는 방식이나 여러 면에 대해 사전 공부를 충분히 해갔어요.
그런데 북쪽은 노 대통령이 처음이지 않습니까. 김영남 위원장과 노 대통령의 회담이나 김정일 위원장과 오전 회담이 북쪽엔 하나의 탐색전이었을 텐데 우리 대통령이 격의 없이 자신 있게 중요한 얘기를 쉽게 설명하고 제안했던 게 주효했던 것 같아요. 노 대통령에게 신뢰를 갖기 시작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말솜씨가 정상회담에서도 발휘됐습니까.
“그럼요, 100% 발휘됐죠. 노 대통령도 회담 자체의 중요성과 분단 이후 두번째 열리는 정상회담이라는 부담을 안고 갔어요. 처음엔 긴장도 많이 하셨던 것 같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얼마나 세심하냐면, (벽에 걸려있는 정상회담 기념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진이 두번째 찍은 거예요.
처음 찍을 때는 김 위원장이 가운데 앉고 노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양 옆으로 앉았어요. 그런데 찍고 나서는 ‘나 때문에 부부를 갈라놓아서야 되겠느냐’고 다시 찍자고 하더군요. 그런 것만 봐도 김 위원장이 상당히 세심하고 능란한 겁니다.”
● 정상회담이 성사됐을 때 노 전대통령 자신의 개인적 감회도 컸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게 두 정상이 개성공단을 함께 방문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언론에 새어나간 것도 아니고, 그냥 언론이 추측해서 써 버렸어요. 그 바람에 그건 논의도 못하고 물 건너가고 말았죠. 북측에 가는 방법도 우리는 처음부터 육로로 간다는 생각이었어요. 북측이 받아들여준 건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수해 탓에 개성부터 평양까지 고속도로가 훼손됐는데 고칠 수 있는 만큼 성의 있게 고쳐놓아서 갈 수 있었어요. 앞으로 빨리 이뤄졌으면 하는 게 남북간 고속도로를 개통해 아시안 하이웨이를 여는 겁니다.
남북철도가 열려서 개성과 문산을 왔다 갔다 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륙철도까지 연결돼서 우리 경제에 큰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고속도로·철도 투자는 장기적으로 우리 경제를 위한 투자라는 관점에서 과감히 투자를 해야 합니다.”
● 김정일 위원장은 특히 어떤 사안에 관심을 보였습니까.
“우선 한반도의 종전과 평화체제에 관심이 컸습니다. 두번째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에 공감을 표현했어요. 정말 이것이 실현가능한 것인지, 남쪽 국민들의 공감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인지 묻더군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에 대해 긴 시간 얘기를 나눴습니다. 하지만 북방한계선(NLL)을 논의한 건 아니고요.
남측의 군부건 북측의 군부건 누가 NLL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상대방에게 포기하라고 하면 강요가 되는 것이고 회담의 결실을 얻어내기는 힘든 겁니다. 서해특별지대라는 게 일종의 묘책인데, 이 문제는 진지하게 남북 간에 더 논의를 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으면 좋겠어요.”
● 북한에 화가 날 때는 없었습니까.
“물론 있었습니다. 회의를 하면서 화를 낸 적도 있었고 언성 높이고 소리 지른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어려웠던 건 역시 우리 정치권의 이해와 해석입니다. 예를 들면 쌀 보내면서 국군포로 문제 해결 못하느냐고 하는데 이건 굉장히 정치적인 문제예요.
왜 국군포로라는 말을 못 쓰고 ‘전쟁전후에 생사를 인수 없게 된 사람’이라는 용어를 쓰느냐고 하는데 그게 남북관계입니다. 남북관계 특수성의 현주소예요. 이런 문제를 다룰 때 전문적인 노력을 꽤 했고 이종석 장관 시절에 이 문제가 풀리기 시작해 남북 간에 이해의 간극을 좁혔다고 생각합니다.”
● 재직 시절 이런 저런 발언으로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의 공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속상한 게 많았어요. 발언이 사실대로 전달되고 비판을 받으면 문제가 아닌데, 내가 얘기한 진의와는 전혀 다르게 왜곡되니까 그게 가슴 아픈 일이었던 거죠. 예를 들어 북의 빈곤 문제를 말했던건, 이게 여러 해 누적된 문제이기 때문에 남북 간에 근본적인 논의와 해결 방안이 강구돼야 한다는 얘기였어요.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고 할 때 북의 식량부족 문제를 어떻게 우리가 도울 수 있을까, 결국 우리 짐 아니냐 그런 뜻으로 얘기했는데 ‘그게 왜 우리 짐이냐 저쪽 지도자의 책임이지’ 이런 비판이 나온 겁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북과 얼마만큼 진지하게 대화로 이런 문제를 풀어내느냐가 더 중요하지 단어 하나로 시비 걸 일이 아닙니다.”
●요즘 광화문과 시청에서 시민들의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혹시 가보셨습니까.
“지난 7일 2시간 정도 가서 봤습니다. 참석자들의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렇게 많은 시민들이 이렇게 참여한다는 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거 6월항쟁 때나 이 정도 규모로 나왔을까요.
노 대통령 탄핵 때보다 더 많은 것 같아요. 분위기가 경쾌해요. 새로운 시위문화예요. 요즘 애들이 억지로 나가라고 한다고 나가겠습니까. 대학생들이 그래요? 어림없어요. 새로운 형태의 문화시위라는 점에서 정부는 심각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겠지만 참여자들은 여유 있게 진행하는 것 같았고. 전경들이 너무 많이 나와 있는 것 같더군요. 줄여도 상관없는데.”
● 시민들이 이명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남북관계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어요. 통일부 폐지한다는 얘기부터 잘못 가기 시작한 것이고, 남북관계의 전제로 핵문제 해결을 내걸었다는 것이 잘못입니다.
남북관계를 잘 풀어가면서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위기와 기반을 만드는 것이지, 핵이 해결돼야 남북관계가 해결된다고 하는 건 잘못 보는 거예요. 현 정부 고위층 내에 남북관계 전문가가 없어요. 남북관계라는 게 애정과 역사적 사명감이 없으면 안 되는 겁니다.”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로 돌아오셨는데,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이번 학기엔 강의와 논문지도가 좀 있습니다. (같은 학교 교수인) 신영복 선생 지도 아래 붓글씨도 배워요. 오는 16일에 같이 붓글씨 쓰는 교수들과 대학로에서 작품전을 해요. 두 점을 출품했는데 그 중 하나가 ‘통일(通一)’이라는 글씨입니다. 남북통일은 단순한 통합이 아니라 하나로 소통하는 일이라는 뜻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장관 퇴임 이후 노 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2월25일 봉하마을로 내려가실 때 같이 갔고 4월25일 백종천 실장, 김만복 전 국정원장하고 셋이 내려가서 오찬도 하고 긴 얘기를 나눴어요. 정상회담 팀이 같이 간 거죠.”
●장관 재임 시 이루지 못한 일 가운데서 아쉬운 일을 하나 꼽으신다면.
“이산가족 상봉 문제입니다. 총리회담 때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는 게 중요하니까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북쪽을 여러 차례 설득했어요. 당시 적십자회담을 할 때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서울에 와 있어서 별도로 얘기를 했어요.
늘릴 수 있는 한 늘리자고. 그래서 쿼터를 500명으로 늘린 거예요. 과거엔 최대 200명이었는데 그것도 다 못했을 겁니다. 북측으로선 성의를 다 한 거예요. 이게 시행이 안 되는 것이야말로 안타깝습니다.”
이재정은 누구인가?
72년 사제서품…90년대부터 통일문제 관심
盧정부 마지막 통일부 장관으로 방북 수행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이재정 성공회대 교수(64)는 성공회 신부다. 1972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캐나다와 미국에서 신학 석·박사 학위를 받아 성공회신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94년 성공회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후 총장으로 재임했다.
99년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 총무위원장을 맡으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아 16대 국회에서 비례대표로 의원을 지냈다. 90년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통일과 선교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통일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2004년 10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임명되며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에 관여했다. 2006년 12월부터 통일부 장관을 맡아 2차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고 노 대통령의 방북을 수행했다. 장관에서 물러난 후 강단으로 돌아와 성공회대에서 신학을 강의하고 있다.
<경향신문 >정치 >이중근 특집기획부장·최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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