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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중언]이상설 유허비ㅣ江原日報

야촌(1) 2008. 3. 25. 21:50

[언중언]이상설 유허비      

 (2008-3-25 기사)  

 

이상설(1870∼1917년)은 대한광복군정부에서 활동한 러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다. 일찍이 신학문에 뜻을 두고 영어 러시아어 등을 공부하면서도 1894년 식년문과에 급제, 여러 요직을 거쳤다.  

 

젠다오(間島) 룽징(龍井)에 서전서숙을 설립, 교포자녀의 교육과 항일민족정신 고취에 진력했다.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그의 유허비가 세워졌다. 발해성터 바로 옆이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 러시아의 협조로 비를 건립, 선생의 넋을 위로했다.  

 

☞“이상설 선생은 1870년 충북 진천에서 탄생해 1917년 연해주에서 서거한 한국 독립운동의 지도자다. 1907년 7월에는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을 대동하고 사행하여 한국 독립을 주장하다.  

 

이어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조국독립운동에 헌신중 순국하다.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곳 수이푼 강물에 뿌리다.” 유허비에 새겨놓은 글이다.그의 행적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선생은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참석하려 했으나 일제에 의해 거부당했다. 헤이그 특사의 정사(正使)는 당시 37세의 이상설이었다.   48세의 이준은 부사, 20세의 이위종은 통역관 겸 대변인이었다. 일제에 이상설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최재형 등과 권업회를 조직, 회장으로 일했고 ‘권업신문’을 창간, 주간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향년 47세. 헤이그 특사에 대한 일제의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지 10년 만의 일이다.  

 

☞그는 죽으면서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인들 어찌 감히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글을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진천에 그의 생가가 복원되고 얼마 전 기념사업회도 발족됐다. 유허비에 무궁화가 놓여있다. 국권 회복과 조국 독립에 투신한 독립지사의 혼이 담긴 소중한 역사의 현장이다. 외롭게 서 있는 유허비를 찾아 경의를 표했다.  

 

江原日報  장기영논설위원·

 kyjang@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