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역대 주요 인물(慶州李氏歷代主要人物)
1.高麗時代, 朝鮮時代 및 獨立運動家, 有名人士, 主要人物
(고려시대, 조선시대 및 독립운동가, 유명인사, 주요인물)
●이거명(李居明)
소판(蘇判)이라는관직은 신라시대 골품제도(骨品制度)의 성진골품(聖眞骨品)만이 친거되었으니, 통일신라시
대(統一新羅時代)의 왕인 무열왕(武烈王)부터 혜공왕(惠恭王)때 까지는 진골계(眞骨系)에서 분적(分籍)하여
명분 호족 (豪族)의 긍지로서 번성하여 갔음을 보이고 있다.
●이총섬(李寵暹)
998년(목종 1년) 오인유(吳仁裕), 남궁원청(南宮元淸), 이윤관(李允寬)등과, 진(秦)나라에 청원하여 고려에도
오묘(五廟)와 사직(社稷)을 건립하였고, 국자감(國子監) 시험제도설립(試驗制度設立)을 청원하여 과거제도(
科擧制度)를 확립으로써 면학의 열성을 고취시켰다.
●이현복(李玄福)
국자감(國子監)에서 부(賦), 시(詩), 경의(經儀) 등을 시강(試講)하였고 문하성 (文下省)의 중서사인(中書 舍
人)을 거쳐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좌복사(左僕射)를 역임하였다.
●이주좌(李周佐)
미상~1040(정종 6년), 고려의 대신. 동경 유수(東京留守) 이성공(李成功)에 의해 발탁 되어 국학(國學)에서 수
학(修學), 목종때, 문과(文科)에 급제, 상주목(尙州牧)의 기실참군사(記室參軍事)를 거쳐 감찰어사(監察御史)
에 올랐다.
1016년(현종 7) 감찰사헌(監察司憲). 시어사(侍御史). 기거사인(起居舍人).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를
거쳐, 1030년(현종 21)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 1033년(덕종 2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이듬해 국
자좨주 좌간의대부가 되고, 형부상서 판어사대사에 이르러 죽었다.
그후 사공상서 우복사(司空尙書右僕射)에 추증(追贈)되고. 세거지를 경주에서 아산(牙山)으로 이주한 후, 후
손들이 경주이씨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을 아산(牙山)으로, 세계(世系)하였다.
●이녹천(李錄千)
1135년(인종 13년)에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서경(西京)에 남아 있는 조광(趙匡) 등의 무리을 토벌하였다.
●이 핵(李 翮)
자(字)는 만리(萬里), 호(號)는 열헌(悅軒), 초휘(初諱)는 타(駝)로서 부인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인정(仁挺),
진(瑱), 세기(世基)등 아들 삼형제에게 서책(書冊)을 직접 교육하여 모두 수석장원(首席壯元)이 되니 이웃 사
람은 팔자 좋은 열헌(悅軒)이라 부러워하니,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의 묵헌(默軒) 민지선생(閔漬先生)은「꽃
송이 같은 세아들 다섯자가 모두 장원에 급제하였더니 세상사람들은 이태백을 닮은 재주라고 칭찬하였으며, 열
헌(悅軒)공은 평소에 적선(積善)을 하여 온세상에 알려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혼자서 매년 경사(慶事)를 보는
구나」라고 칭송하였다. 벼슬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되었다.
●이 진(李瑱)
1244(고종 31년)~1321(충숙왕 8년), 고려의 문신. 초명은 방연(方衍),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菴), 시호
는 문정(文定),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손, 제현(齊賢)의 아버지. 문과(文科)에 급제, 광주사록(廣
州司錄)이 되고, 뒤에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기용되었다.
충렬왕이 시부(詩賦)로써 문신들을 시험하여 9명을 뽑을 때, 둘째로 뽑혔으며, 기거중서사인(起居中書舍人), 안
동부사(安東府使)를 지내고, 군부총랑(軍簿 摠郞)에 전임 1297년(충렬왕 23)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가 되었
다.
그뒤 대사성. 밀직승지, 1303년(충렬왕 29년)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내고, 1307년(충렬왕 33년) 판위위시사
권수밀직부사가되어 적폐(積弊)의 일소를 상소한 것이 채택됨으로써 정당문학(政堂文學)에 특진되었고, 이듬해
충선왕이 즉위하자 사림학사·시우산기상시, 이어 좌승지. 비서윤. 지병조사 학사가 되었으며, 뒤에 상의회의도감
사(商議會議都監事)를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이 되어 임해군(臨海軍)에 봉해졌으며, 1315년(충숙
왕 2년) 과거(科擧)를 맡아 보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하고 시문(詩文)에 뛰어났
다.
●이인정(李仁挺)
1241년(고종 29)~미상.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호(號)는 성암(誠庵) 열헌공(悅軒公) 핵(翮)
의 장남으로 문과에 수석장원(首席壯元)하여 광주판관(廣州判官)을 거쳐 우정언(右正言)에 이르렀다. 충숙왕
때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오른 진(瑱)의 형이고,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큰아버지이다. 공의 아들은 부(榑)와 규
(樛)로 각각 사인· 헌납에 이르렀다.
●이세기(李世基)
호(號)는 송암(松巖), 시호(諡號)는 문희(文僖), 1279년(충렬왕 5년) 성균시(成均試)에서 수석장원하고, 1280
년(충렬 6년) 친시(親試)에서 둘째형인 동암(東庵)과 함께 수석장원하니, 충렬왕(忠烈王)은 크게 칭찬하여 황폐
(黃폐)를 하사 하였으며 정승(政丞)이었던 민지선생(閔漬先生)과 찬성사(贊成事) 조간(趙簡)선생은 시문(詩文)
을 보내어 경하(慶賀)하였다. 벼슬은 비서성 비서교서(秘書省秘書校書)를 거쳐서 검교정승(檢校政丞) 등을 역
임하였다.
●이제현(李齊賢)
1287년(충렬왕 13년)~1367년(공민왕 16년), 고려의 문신. 학자. 시인.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
는 익재(益齋), 실재(實齋), 역옹(轢翁),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검교정승(檢校政丞) 진(瑱)의 아들. 백이정
(白이正)의 문인.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
(權務奉先庫判官),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 등을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등용, 제안부직강
(齊安府直講)을 지낸후, 이듬해 사헌규정(司憲糾正), 1310년(충선왕 2) 선부산랑(選部散郞), 다음해 전교시승
(典校侍丞) 삼사판관(三司判官) 등을 역임, 1312년 서해도 안렴사(西海道安廉使)로 나갔다가 성균악정(成均
樂正), 풍저창사(豊儲倉使)를 지냈다.
이듬해 내부부령(內府副令) 풍저감두곡(豊儲監斗斛)을 역임, 1314년(충숙왕 1년) 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
(程朱學)을 공부, 이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萬券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
나라 학자 요수염(姚燧閻), 조맹부(趙孟膚)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이듬해 선부의랑(選部議郞) 성균제주(成均祭酒)가 되고, 1316년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승진, 다음해 선부
전서(選部典書)로 원나라에 가서 상왕(上王)의 생일을 축하했다. 1319년 충선왕을 수행하여 중국 강남지방을
유람,이듬해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고, 이해 원나라에 갔다가 충선왕이
빠이앤투그스(Bayan-Tögüs/伯顔禿古思)의 모함을 받고 유배되자 부당함을 그곳 원나라에 밝혀 1323년 풀려
나오게 했다.
다음해 광정대부 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使)에 승진, 1325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되고, 정당문학
(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지고, 1336년 삼중대광 영예문관사에 올랐다.
1339년 심왕(瀋王) 고(暠)가 모역(謀逆)하다 실패하자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 원사(元使) 두린(頭麟)등이 왕
을 잡아가자, 이때 연경에 가서 사실을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 시골에 은거했다.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원나라 사신이 왕을 포박해 가므로 글을 올려 사면을 요청했고, 이듬해 판삼사사(判三
司事)에 복직,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348년(충목왕 4년) 충목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으로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의 승습을 요청했고,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우정승 권단정동성사로 발탁, 도첨의정승
(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다음해 우정승에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이어 사직하고 저술과 학문연구에 전심하다, 1362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에 호종
(扈從), 이해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만년에 은퇴한후 왕명으로 실록(實錄)을 편찬했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외교문서에 뛰어났고, 정주학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원나라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고려에 도
입하여 널리유행시켰다.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에 17수의 고려의 민간 가요를 한시(漢詩) 칠언
절구로 번역하여 이것이 오늘날 고려가요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공민왕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고, 경주(慶州)의 구강서원(龜岡書院),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다.
●이수림(李壽林) / 향년 37세
1332(충숙 2∼1369년(공민왕 18), 고려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로, 조부는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 우정
승 영가부원군(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右政丞永嘉府院君) 제현(齊賢)이고, 아버지는 전법총랑(典法摠
郞) 달존(達尊)이며, 어머니는 백이정(白頤正)의 딸로서 고려 후기에 손꼽히던 명문세족 출신이다.
1354년(공민왕 3) 군부판서(軍簿判書)가 되고 이어 이부판서(吏部判書)를 역임하였으며, 1356년 참지정사(參
知政事) 이천선(李千善)과 함께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3년 원나라에서 덕흥군(德興
君)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어 밀직상의(密直商議) 홍순(洪淳)과 함께 원나
라에 가서 백관 및 기로(耆老)들이 공민왕을 옹호하는 글을 어사대에 바쳤다.
1369년 북원(北元)의 조서를 받들고 고려에온 서원군(瑞原君) 노은(盧訔)을 붙잡아 그가 고려에 온 이유를 국문
할 때, 노은이 추밀원사 이수림, 전 감찰대부 왕중귀(王重貴) 등과 함께 염탐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 자복을
함으로써 그의 일파로 몰려 죽음을 당하였다.
●이양식(李陽植)
고려(高麗)때 문하성(門下省)의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좌복야(左僕射)를 엮임하였고, 경주에서 우계(羽
溪)로 이주한 후 경주이씨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을 우계(羽溪)로 하여 세계(世系)하였다.
●이 전(李 筌)
자(字)는 국서(國瑞), 고려 소판공(蘇判公 李居明)의 15세손이며 선경(善景)의 넷째 아들로, 고려 때, 한성부우
윤(漢城府右尹)을 거쳐 덕은군(德恩君)에 봉하자 후손들이 덕은(德恩)을 본관으로 삼아 경주이씨에서 분적(分
籍)한 덕은이씨(德恩李氏)의 시조(始祖)이다.
●이자영(李自英)
고려 소판공(蘇判公)의 16세인데,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공을 세워 진위군(振威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하여 본관을 진위(振威)로 하여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되었다.
●이숙진(李淑眞)
1270년(원종 11년)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낭장(郎將) 윤길보(尹吉甫)와 몽고군 토벌에 공을 세웠고, 진도(珍
島)에서방보(方甫)와 계년(桂年)등을 토벌하여 평정 하였다.
●이임간(李林幹)
고려 때, 상서병부판서(尙書兵部判書)를 지냈다. 소판(蘇判)공의 16세손(世孫)으로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
장수(長水)의 옛명칭)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장수(長水)를 본관으로 하여 경주이씨(經州李氏)에서 분적(分籍)
하여 세계(世系)를이어오고 있다.
●이 천(李蒨)
1274년(원종 15년)~1349년(충정왕 1년), 고려의 문신. 1299년(충렬왕 25년) 국자시(國子試)에 수석합격, 충숙
왕 때 우사보(右思補)가 되고, 1343년(충혜왕 복위 4) 첨의평리상의(僉議評理商議)에 승진, 이듬해 동지공거
(同知貢擧)를 겸했다.
이해 충목왕이 즉위하자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고, 이
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1345년(충목왕 1년)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지낸뒤, 월성군(月城君)에 봉해
졌다.
●이승고(李升高)
시호(諡號)는 공의(恭懿), 고려 때, 이조참판(吏曹參板)을 지냈다.
●이득윤(李得胤)
1553년(명종 8년)~1630년(인조 8년), 조선의 학자. 자는 극흠(克欽), 호는 서계(西溪), 제현(齊賢)의 후손. 1588
년(선조 21) 진사(進士)가 되고,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수학(修學), 역학(易學)에 뛰어나 당시의 대가 박지화(朴
枝華)를 찾아가 역학을 토론, 크게 이름을 떨쳤다.
1597년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에 전심, 1597년 왕자사부
(王子師傅)가 되고 이어 형조좌랑(形曹佐郞), 의성현령(義城縣令)을 지냈다.
광해군 때는 혼란한 정계를 피해 고향에 머물러 김장생(金長生)과 서한(書翰)을 교유하여 태극도(太極圖)와 역
학을 토론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선공감정(繕工監正)이 되고, 이듬해 괴산군수(槐山郡守)가
되어 이괄(李适)의 난으로 소란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관기를 바로잡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음악에도 뜻을두어 1620년(광해군 12)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를 편술(編述), 금도(琴道)를 후세에
계승시켰다. 청주(淸州)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 되다.
●이수일(李守一)
1554년(명종 9년)~1632년(인조 10년), 조선의 무신.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시호는 충무(忠
武), 1583년(선조 16년) 무과(武科)에 급제, 훈련원(訓鍊院)의 벼슬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장기현감(長鬐縣監/長鬐는 경북 포항의 옛지명)으로 의병을 일으켜 분전했으나,
예천(醴泉) 용궁(龍宮)에서 패전, 이해 밀양부사(密陽府使)에서 경상좌도수군절도사에 승진, 왜적을
격퇴한 공을 세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회령부사(會寧府使). 나주목사(羅州牧使)를 거쳐 1596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성주목사(星州牧使)로서 명
령을 어겨, 결장종군(決杖從軍)되었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세번 역임하면서 변방을 침범하는야인(野人)
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안현
(鞍峴)에서 이괄군을 대파, 서울을 수복케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
로 봉해진 뒤,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사후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이항복(李恒福)
1556년(명종 11년)~1618년(광해군 10년). 조선의 문신, 자(字)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
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시호는 문충(文忠), 고려의 상서공(尙書公) 과(薖)의 9세손, 참찬
(參贊) 몽량(夢亮)의 아들. 1580년(선조 13년) 알선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권지부정자(權知副
正字)를 거쳐 이듬해 검열(檢閱)이 되고, 1583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저작(著作). 박사(博士)를
거처 전적(典籍), 정언(正言). 수찬(修撰). 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했다.
1589년(선조 22) 예조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렸다. 응교(應敎). 사인(舍人).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1590년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고, 정여립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이 되었다.
이듬해 좌승지로 재직중 정철(鄭澈)의 죄를 처리하는데 태만했다는 죄로 파직되었으나, 다시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王妃)를 개성(開城)으로 호위(扈衛), 이어 두 왕자를 평
양으로 호위하고 선조를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했다.
그 동안 이조참판(吏曹參板)으로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진 후, 형조판서로 도총관(都摠管)을 겸직했고, 다시 대
사헌을 거쳐, 병조판서가 되자 이덕형(李德馨)과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고 주장하는 한편, 안으로는 전국에
근왕(勤王)의 군사를 모집했다. 이어서 병조판서로 직제학(直提學)을 겸하고 또한 지경연춘추관사 동지성균관
사(知經筵春秋館事 同知成均館事) 좌빈객(左賓客)등을 겸직했다.
이해 명나라의 지원군을 선도(先導)하여 맞아들였으며, 이듬해 원접사(遠接使)가 되고, 1594년 병조판서로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 다음해 이조판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우참찬(右
參贊)등을 역임하였고, 1597년 병조판서에 재임중 신병으로 사임, 임진왜란 이래 다섯번이나 병조판서로서 병
권(兵權)을 잡고 크게 활약했다.
이듬해 우의정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선조 32) 좌의정, 다음해 우의정에 전
임되어 도원수(都元帥)로 도체찰사(都體察使)등을 겸직, 이어 영의정에 승진하여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
府院君)에 진봉(進封), 이해 성혼(成渾)을 구하려다가 정철의 일당이라는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1604년(선조 37년)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봉해지고 1608년(광해군 즉위) 좌의정에 재임, 도체찰사를 겸한
후, 1611년(광해군 3년) 우의정을 지냈으나 1613년 역괴(逆魁)를 천거했다는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사직소
(辭職疎)를 올리고 은거(隱居), 1617년 폐모(廢母)의 논의가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 관작이 삭탈(削奪)
되고, 이듬해 북청(北靑)에 유배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임진왜란중 난의 뒷 수습을 하는 데, 힘쓴 명신으로서 당쟁(黨爭)속에서도 붕당(朋黨)에 가담하지 않고, 그 조
정(調停)에 힘썼다. 죽은 해에 복관(復官)되고 청백리(淸白里)에 녹선(錄選)되었다. 포천(抱川)의 화산서원
(花山書院),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이광윤(李光胤)
1564년(명종 19년)~1637년(인조 15), 고려 제현(齊賢)의 후손으로, 조선의 문신.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
(讓西), 진사 잠(潛)의 아들로 서계(西溪), 득윤(得胤)의 아우이다. 1585년(선조 18년) 진사(進士)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초서(草書)로써 이름을 떨쳤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정원(李挺元)
1567년(명종 22년)~1623년(인조 1년), 조선의 문신. 자는 중인(仲仁) 호는 후포(後浦). 이숙한(李淑漢)의 증손
으로, 할아버지는 이세분(李世芬)이고, 아버지는 이충량(李忠良)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進士)가 되고,
1610년(광해군 2년) 참봉(參奉)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사서(司書) 정언(正言). 장령
(掌令). 사간(司諫)을 거쳐 1614년 군기시정(軍器侍正) 필선(弼善)이 되었다. 1616년(광해군 8)에 검상(檢
詳), 1619년 응교(應敎), 전한(典翰), 이듬해 대사간을 역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충주에 살 때, 진사로서 정인홍(鄭仁弘)을 부추기고 유영경(柳永慶)을 모함하는 상소를 올린바 있고, 이후로 대
북파에 호응하여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일하였다. 궁중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고 벼슬을 천거하거나, 함부
로 문관의 인사 정책을 어지럽혔다 하여,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지 한달 만에 정인홍. 민심(閔
深). 유세증(兪世曾). 서국정(徐國楨). 한정국(韓正國) 등과 같은날 주살 되었다.
●이 홀(李 忔)/27世/국당공후 문정공파
1568년(선조 1년)~1630년(인조 24년), 조선의 문신. 자는 상중(尙中), 호는 설정(雪汀). 오계(梧溪), 시호는 충
장(忠章), 이은신(李殷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흥(李興)이고, 부사과(副司果) 천일(天一)이고,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홍염(洪濂)의 딸이다.
1591년(선조 2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학유(學諭)가 되고 임진왜란 때는 가주서(假注
書)로 왕비(王妃)를 해주(海州)에 호종(扈從), 1594년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다.
1597년(선조 30)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지평(指平). 문학(文學). 백천군수(白川郡守)를 거
쳐 공조. 예조. 형조의 정랑(正郞)을 지냈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년)후 지제교(知製敎)가 되고, 1627년(인
조 5년) 정묘호란(丁卯胡亂)때 강화(江華)로 왕을 호종했다.
1629년(인조 9) 사은사(謝恩使)로 동지사(冬至使) 윤안국(尹安國)과 함께 선편(船便)으로 명나라에 가다가 홀
로 살아하표(賀表)와 변무주문(辯誣奏文)을 명나라에 바치고 옥하관(玉河館)에서 병사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저서로 《오계문집(梧溪文集)》. 《설정문집 3권(雪汀文集)》. 《관주일록(觀周日錄)》.
《조천일기(朝天日記)》가 있다.
●이시발(李時發)
1569년(선조 2~1626(인조 4), 조선의 문신. 자는 양구(養久), 호는 벽오(碧梧), 진사(進士) 대건(大建)의 아들이
다, 이덕윤(李德胤)의 문인이고,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무원에 등용되
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용의 종사관으로 활약 전적. 정언(定言) 등
을 지냈다.
1594년(선조 27) 병조좌랑으로 재직중, 명나라 유격장 진운홍(陳雲鴻)을 따라 적의 군영을 방문하여 정탐의 임
무를 수행했고, 이듬에 병조좌랑에 승진 순무어사(巡撫御史)를 겸했다. 1596년(선조 29) 이몽학의 난 때, 토벌
에 전공을 세우고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승진 1597년 정유재란때는 분조(分朝)의 호조참의가 되어 명나라 원
병에 대한 군량미 보급을 맡았다.
1602년(선조 35) 경상도관찰사 1604년 형조참판 1614년(광해군 6)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했다가 양사의
탄핵을 받아 사직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한성부판윤에 등용 되어, 형조판서에 이르고 이
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체찰부사(體 察副使)로서 난의 수습에 공을 세운 뒤, 삼남도검찰사(三南道檢察使)
를 지내고 남한산성의 역사를 감독하다 58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주변록(籌邊錄)》과 《벽오유고(碧梧遺藁)》가 있다.
●이탁남(李擢男)
1572년(선조 5년)~1645년(인조 23년), 조선의문신. 자는 근숙(根叔), 시호는 의정(毅靖), 좌참찬(左參) 몽량(夢
亮)의 손자(孫子)이다. 160년(선조 33년) 음보(蔭補)로 청단도찰방(靑丹道察訪)이 되고, 전설사별제(典設司
別提) 사복시주부(司僕侍主簿)를 역임했다.
덕산현감(德山懸監)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627년(인조 5년) 횡성현감(橫城 縣監)으로 있을때 이인거(李
仁居)가 난을 일으키자 원주목사(原州 牧使) 홍보(洪寶)와 함께 싸워 이인거을 체포,서울로 압송했다. 그 공으
로 소무공신(昭武功臣) 2등이 되어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졌다. 호조판서에 추증(追贈) 되다.
●이경하(李擎廈)
1573년(선조 6년)~1641년(인조 19년), 조선의 학자. 자는 근임(謹任), 참봉(參奉) 봉남(鳳男)의 아들. 이항복
(李恒福)의 문인군자감판관(軍資監判館)을 거쳐 1605년(선조 38년) 우봉현령(牛峯縣令)에 이르렀으나 광
해군 즉위 후, 정치rk 문란함을 보고 은퇴했다.
●이 익(李 瀷)
1579년(선조 12년)~1641(인조 2년), 조선의 문신. 자는 형여(炯如), 호는 간옹(艮翁), 옥포(玉浦), 판관(判官)
유일(惟一)의 아들. 1612년(광해군 4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615년 전적(典籍)에 올라 사서(司書). 정언(正言) 등을 엮임, 1618년(광해군 10년) 폐모
론(廢母論)을 반대하다가 제주(濟州)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년)후 사예(司
藝)로 기용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전한(典翰)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시성(李時省)
1598년(선조 31년)~1668년(현종 9년), 조선의 문신 자는 자삼(子三), 호는 기봉(驥峰), 항복(恒福)의 종손(從
孫). 어려서 항복에게 글을 배운뒤 음보(蔭補)로 참봉이 되고, 1650년(효종 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
(丙科)로 급제, 화양부사(淮陽府使)를 거쳐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1667년 가승지(假承旨)에 발탁되었다가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이기남(李箕男)
1598년(선조 31년)~1680(숙종 6년), 조선의 문신. 자는 정숙(靜叔), 영의정 항복(恒福)의 아들. 1630년(인조 8
년) 진사(進士)가 되고, 어머니의 절행(節行)으로 정경세(鄭經世)에게 천거되어 벼슬에 나갔다. 북방야인(野人)
이 침범하자 자진 출전하여 공을 세웠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扈從), 난이 평
정된 후, 풍천부사(豊川府使)를 지냈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러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이충급(李忠伋)
?~1627년(인조 5년)
조선의 무장(武將). 자는 중사(仲思), 용천(龍川: 평부안북도 소재) 출신. 무과(武科)에 급제,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에 활약한 공으로 주부(主簿)가 되고, 1624년(인조 2년) 용골성(龍骨城)을 축조할 때 도청(都廳)으로
공을 세워 청수만호(靑水萬戶)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의주성(義州城)의 동문장(東門將)으로 전사한 부윤(府尹) 이완항(李完巷)을 대
신하여 군대를 지휘하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철편(鐵鞭)을 가지고 적진에 돌입, 많은 적을 살해하고 전사했다.
1647년(인조 25) 나라에서 정문을 세워 충의를 표창하였으며, 장례원판결사에 추증되었다. 의주의 구암사(龜巖
祠)에 제향 되었다.
●이경선(李慶善) /향년 36歲
1600(선조 33)~1636(인조 14), 조선의 절신으로, 초명(初名)는 경징(慶徵), 자(字)는 군선(君善), 호(號)는 남포
(藍浦), 충익공 벽오 이시발(忠翼公碧梧李時發)의 아들로 경자(庚子) 1600년(선조 33) 5월 초(初) 2일 태어났
다,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고, 1633년(인조 11) 11월 17일 계유 식년방(癸酉 式
年謗) 33인중 10등(을과 7등)으로 문과급제(文科及弟)하여, 교서(校書), 교리(校理), 예조좌랑(禮曹佐郞), 성
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 한 후, 1636년(인조 14) 1월에 남포현감(藍浦縣監)겸, 홍주진관 병마절제사(洪
州鎭管兵馬節制使)로 전임된 후,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임금이 남한산성(南山城)에 몽진해 있
을시,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이끄는 왕의 근왕병 참모관(參謀官)으로 광주 검천전투(廣州 險川戰鬪)에
출전, 청나라 태종의 매부인 양굴리(揚古利) 장수의 20만 대군과 격렬히 싸우다 향년 36세로 장렬히 전사(戰
死)했다.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5월에 통정대부 예조참의(通政大夫禮曺參議)에 증직(贈職)되고, 1730년(인조
6) 9월에 왕명으로 충신정려(忠臣旌閭)가 내려졌다.
●이 완(李浣)
1602년(선조 35년)~1674년(현종 15년), 조선의 문신. 자는 징지(澄之),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정익(貞
翼), 판서 수일(守一)의 아들. 1624년(인조 2년) 무과에 급제, 1627년 영유현령(永柔縣令)을 거쳐 1629년 상
원군수(祥原郡), 이듬해 숙천부사(肅川府使)를 지내고 1631년 하의별장(別將)으로 출전, 정방산성(正方山
城) 싸움에서 전공을 세우고 1638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43년 경기도 수군절도사로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겸하고, 효종이 송시열(宋時烈)등과 북벌(北伐)을 계
획하자, 1652년(효종 3년) 어영대장(御營大將)에 발탁, 1653년 훈련대장(訓鍊大將)이 되어 신무기의 제조,
성곽의 개수 신축 등으로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1655년(효종 6)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공조판서를 지내고 다음해 훈련대장에 재임 되었으나,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의 별세로 북벌계획이 중지되었으며, 1664년 공조판서 1668년 훈련대장에 각각 재임, 다음해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은퇴했다가 1671년 수어사(守禦使)에 등용되고, 1673년 포도대장(捕盜大將)
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에 올랐다. 그의 작품으로 시조 2수가 전한다.
●이시술(李時術)
1606년(선조 39년)~1671년(현종 12년), 조선의 문신. 자는 사강(士强), 좌의정 항복(恒福)의 손자, 부사(府使)
정남(井男)의 아들. 1630년(인조 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등을
지내고 1652년(효종 3년) 정랑(正郞)으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을 거쳐 헌
납(獻納). 수찬(修撰). 보덕(輔德). 사간(司諫) 등을 역임했다.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의 장례때 국장도감도청(國裝都監都廳)이 되었으며 이해 부교리(副校理) 선천부사(宣
川府使) 교리를 지내고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의주부윤(義州府尹)
으로 있을 때, 관하 백성이 청나라에 불법월경한 사건으로청나라로부터 책임추궁을 당했다.
1655년(현종 6년) 형조참의(刑曺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사간, 이듬해 이조참의, 1669년 병조참판(兵曺
參判), 다음해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유태(李惟泰)
1607년(선조 40년)~1684년(숙종 10년),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慮), 시호는 문경(文
敬), 선공감봉사(繕工監奉事) 대방(大邦)의 손자. 아버지는 유학 이서(李曙)이다.
장형광(張顯光)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의 문인. 유일(遺逸)로서 천거를 받아 인조때 세자사부(世子師傅)
를 지내고, 1660년(현종 1년) 호군(護軍)으로 공조참의(工曹參議)를 거쳐 이듬해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
었다.
1663년(현종 4) 균전사(均田使) 동부승지(同副承旨), 1669년 찬선(贊善), 이듬해 다시 이조참의를 지내고 효종
즉위후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과 함께 북벌계획(北伐計劃)에 참여했다. 3사(三司)가 김상헌(金尙
憲)을 탄핵하자 장문(長文)의 상소로써 김상헌의 충의 도덕(忠義道德)을 높이 찬양하여 그 처벌을 극력 반대했
다.
1675년(숙종 1년) 복상문제(服喪問題)로 2차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대사헌으로 윤휴(尹휴)등 남인(南人)의 배
척을 받아 영변(寧邊)에 유배, 5년 뒤에 방환되었다.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처음에는 송시열과 의견을 같이했
으나, 뒤에는 학문상 의견의 대립으로 절교했다. 이조판서에 추증(追贈), 금산서원(錦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
다.
●이 억(李檍) /향년 21歲
1615년(광해군 7년)~1636년(인조 14년). 조선의 무관 자는 여량(汝樑), 현감(懸監) 석립(碩立)의 아들. 힘이 장
사로 승마와 활쏘기에 능했고 병법에 밝았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휘하에 들어가 광조(廣州)의 쌍령(雙嶺)에서 적을 맞아 분전 끝에 전사했다.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
되었다..
●이경휘(李慶徽)
1617(광해군 9년)~1669년(현종 10년), 조선의 문신 자는 군미(君美), 호는 묵호(默好). 춘전거사(春田居士), 시
호는 익헌(翼憲) 형조판서 시발(時發)의 아들. 1633년(인조 11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44년(인조 2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뒤 이듬해 검열(檢閱)을 거쳐 1647년(인
조 25) 지평(持平)에 올랐다.
1653년(효종 4년) 행 홍문관수찬(行弘文館修撰)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을 역임하고, 춘
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에 참여, 헌납(獻納)이 되었다. 1665년 이조참판(吏
曹參判)으로 대사성을 겸임, 1669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경억(李慶億)
1620(광해군 12년)~1673년(현종 14년), 조선의 문신. 자는 석이(錫爾), 호는 화곡(華谷), 시호는 문익(文翼), 시
발(時發)의 아들. 1644년(인조 2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1653년(효종 4년) 순안어사(巡按御史)가 되
어 영남지방을 순찰했다.
이듬해 정언( 正言) 수찬(修撰)을 거쳐 1659년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1664년(현종 5년) 부제학(副提學), 이듬
해 다시 대사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도승지(都承旨)를 역임, 1668년 대사헌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이조. 호조, 형조, 예조의 판서를 지냈다. 1672년(현종 13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인환(李寅煥)
1633년(인조 11년)~1699년(숙종 25년), 조선의 문신. 자는 문백(文伯), 호는 생곡(生谷), 판서 시발(時發)의 손
자로, 생부(生父)는 경휘(慶徽), 백부(伯父) 경연(慶衍)에게 출계(出係). 1660년(현종 1년) 진사(進士)가 되고,
1665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에 보직되고, 대교(待敎). 정언(正言). 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지평(持平).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1675년(숙종 1) 부교리(副校理)로서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었다. 1680
년(숙종 6) 사간(司諫). 집의(執義), 다음해 응교(應敎), 승지(承旨) 등을 거쳐 1684년 대사간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이이(李珥)의 신원(伸寃)을 극력 상소하여 관작을 복구하도록 했고, 대사성(大司成), 경상도관찰사, 개
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1697년(숙종 23)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뒤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인하(李仁夏)
조선의 무신. 자는 하숙(夏叔), 우의정 완(浣)의 조카. 효종 초에 현감(縣監).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 등을 거쳐,
1654년(효종 5년) 어영대장(御營大將),1656년 충청도 수군절도사, 1660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이
듬해 과오를 범해 파직되었다.
그 후 복직되어 경기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679년(숙종 5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있을 때, 덕원
(德 源)으로부터 거제도(巨濟島)에 이배(移配)되는 송시열(宋時烈)을 중로(中路)에서 후히 대접하였다가 탄핵
을 받아 삭출(削黜) 당했다.
1680년(숙종 6)에 송시열이 풀려나자 다시 등용되어 1682년 병조참판(兵曹參判), 이듬해 총융사(摠戎使), 이어
한성부좌윤(漢性府左尹)이 되었으나,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다
가 1694년(숙종 20년) 갑술옥사(甲戌獄事)에 석방되어 복직했다.
●이인소(李寅燒)
1637년(인조 15년)~1698년(숙종 24년), 조선의 문신. 자는 자명(子明), 호는 노포(老圃), 좌의정 경억(慶億)의
아들. 1663년(현종 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補)로 여러 외관직(外官職)을 지내고, 1693년(숙종 19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문학(文學)을 거쳐 홍문과(弘文館)에 등용되고, 이조좌랑
(吏曹佐郞)을 거쳐 1696년(숙종 22) 수찬(修撰)이 되어, 관기의 문란, 백성들의 생활고, 전화(錢貨)의 폐해등
상소했다. 이어 겸필선(兼弼善)을 거쳐 이듬해 교리(校理)를 지냈다.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다.
●이세필(李世弼)
1642년(인조 20년)~1718년(숙종 44년), 조선의 문신 학자. 자는 군보(君輔), 호는 구천(龜川). 시호는 문경(文
敬), 항복(恒福)의 증손, 이조참판(吏曹參判) 시술(時術)의 아들. 송시열(宋時烈) 박세채(朴世采)의 문인(門
人). 1674년(숙종 즉위) 제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남인(南人)의 탄핵을 받아 송시열이 삭직(削職)당하자,
그 신원(伸寃)을 상소하여 영광(靈光)에 유배 되었다가 1678년(숙종 4년) 풀려나왔다. 학행(學行)으로 천거
되어 1680년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이듬해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1684년 형조좌랑(形曹佐郞)이 되었으며, 용안현감 (龍安縣監), 삭녕군수(朔寧郡守)를 역임,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집권하여 이이(李珥) 성혼(成渾)을 문묘(文廟)로부터 출향(黜
享)하려 하자, 벼슬을 버리고 진위(振威)에 돌아가서 학문에 전심했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西人)이 등용될 때, 다시 김제군수(金堤郡守)가 되고 이어
사복시정(司僕시正). 장악원정(掌樂院正).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참판을 역
임, 1717년 이이명(李頤命)의 전횡(專橫)을 상소하고 사직했다. 학문에 전심하여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
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고, 김제(金提)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祭享)되다.
●이세구(李世龜)
1646년(인조 24년)~1700(숙종 26년), 조선의 문신. 자는 수옹(壽翁), 호는 양와(瀁窩), 항복(恒福)의 증손, 목사
(牧使)시현(時顯)의 아들. 1672년(현종 1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685년(숙종 11년) 음보(蔭補)로 경양도
찰방(璟陽道察訪)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1695년(숙종 21) 다시 추천을 받아 예산현감(禮山縣監)이되고, 1697
년 장령(掌令)을 거쳐서연관(書筵官)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 홍주목사(洪州牧使)를 역임한 뒤 병으로 사직
했다. 아들 광좌(光佐)의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追憎), 홍주(洪州)의 혜학서원(惠學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이송제(李松齊)
1648년(인조 26년)~1733년(영조 9년), 조선의 문신. 자는 수부(秀夫), 호는 죽암(竹菴), 호군(護軍) 의규(義奎)
의 아들, 함평(咸平)출신으로 1679년(숙종 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82년 전적(典籍),
이어 동복(同福) 자인(慈仁) 남포(藍浦)의 현감(縣監)을 역임한뒤 삼례도(參禮道). 연서도(延曙道)의 찰방(察
訪)을 지냈으며, 1728년(영조 4년)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태좌(李台佐)
1660년(현종 1년)~1739년(영조15년), 조선의 문신. 자는 국언(國彦), 호는 아곡(鵝谷), 시호는 충정(忠定), 항복
(恒福)의 현손, 참판(參判) 세필(世弼)의 아들, 1684년(숙종 10년) 진사(進士)가 되고, 1699년(숙종 25년)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 지평(持平)을거쳐, 1701년 사서(司書)로서 희빈(禧嬪) 장씨
(張氏)의 사사(賜死)에 적극반대하여 파직된 최석정(崔錫鼎), 이명세(李命世)를 신구(伸救)하다가 선산(善山)
을 거쳐 이듬해 암행어사(暗行御史)가되고, 1708년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고, 이어 강원도관찰사, 이조참의
(吏曹參議), 1710년 대사간 승지(承旨). 대사성(大司成), 1715년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등을 역임했다.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숙종 말년에 소론(少論)의 세력이 약해지자 노론(老論) 일색인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
직되고, 1718년(숙종 44)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721년(경종 1년) 강화부유수에 재임, 동지의금부사(同知義
禁府事)로서 노론이 세제(世弟 : 英祖)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행하게 하자 이를 반대하여, 취소하게 했고,
이어 형조판서로서 신임사화(莘壬士禍)때, 노론을 모두 숙청하고 예조와 호조의 판서를역임했다.
1724년 영조의 즉위로 소론이 밀려날 때, 삭직(削職)당했으나,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호조판서에 기
용되고, 이후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순응하여 병조. 이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이듬해 우의정, 1729년(영조 5)
좌의정이 되었다. 다음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전직, 1736년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석인(李錫仁)
1668년(현종 9년)~1729년(영조 5년), 조선의 문신. 자는 계수(季受), 덕형(德馨)의 5대손. 권유(權愈)의 문인,
1690년(숙종 16년) 진사(進士)가 되고, 1707년 경녕전참봉(敬寧殿參奉)을 거쳐 여러벼슬을 역임, 공조좌랑
(工曹佐郞)때, 노론(老論) 측 언관(言官)들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721년(경종 1년) 소론(少論)의 집권으로 내섬시주부(內贍시主簿)에 등용되고 창평(昌平), 익산(益山), 김포
(金浦)의 현령(縣令)을 역임후,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를 지내고 전주판관(全州判官)이 되었다. 1728년(영
조 4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반군을 물리쳐 고을을 수어한 공으로 품계(品階)가 올랐으나 노론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광좌(李光佐)
1674년(현종 15년)~1740년(영조 16년), 조선의 문신, 자는 상보(尙輔), 호는 운곡(雲谷). 항복(恒福)의 후손으
로, 조부(祖父)는 목사 시현(時顯)이고, 아버지는 장령 세구(世龜)이며, 어머니는 박장원(朴長遠)의 딸이다.
1694년(숙종 2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697년 부수찬이 되었다.
이후 수찬. 교리. 헌납. 이조좌랑. 전라도관찰사. 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712년(숙종 38) 부제학. 평안도관찰사
를 지냈고, 1715년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숙종이 소론을 배척해 윤선거(尹宣擧)
의 문집을 훼판(毁板)하는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내리자 이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가 세자(뒤의 경종)의
대리청정이 시작된인 1718년에는 다시 예조참판에 등용되었다.
경종이 즉위한 뒤에는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는 노론에 맞서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했
다. 1721년(경종 1) 호조참판· 사직(司直)을 지냈다. 그해 김일경(金一鏡)의 상소로 노론4대신(老論四大臣)
이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다음해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노론계열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는 신임
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났다.
이로써 소론정권이 성립하고 이광좌는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뒤 평안도관찰사. 좌부빈객(左副賓客). 병조판서를
거쳐, 1723년(경종 3) 우의정에 올랐다. 영조가 즉위한 뒤인 1725년(영조 1)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신임사화의 잘
못을 논하는 노론계열의 잇달은 상소로 파직되었다.
1728년(영조 4) 영조가 당쟁의 조정을 꾀하여 소론을 재등용한 정미환국 때,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며, 실록청 총
재관으로 〈경종실록〉.〈숙종실록〉보유편을 편찬했다.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신임사화를 재론해, 노론 4대
신을 다시 반역죄인으로 규정하게 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평정된 뒤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
臣) 1등에 봉해지고,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영중추부사로 복직했다.
1730년(영조 6) 탕평책을 추진한 영조의 뜻에 호응, 노론의 민진원(閔鎭遠)과 제휴하여 노론·소론의 연립정권
을 세우고 격심한 당쟁의 폐해를 막고자 노력했다. 17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173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
다.
1740년 영의정으로 재직하던 중, 박동준(朴東俊) 등이 중심이 되어 삼사의 합계(合啓)로 호역(護逆)한 죄를 들
어 탄핵을 해오자 울분 끝에 단식하다가 죽었다. 1755년(영조 31) 나주벽서사건으로 소론의 준소계열이 무너질
때, 관직이 추탈되었다가. 순종 때, 복권되었다. 글씨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종성(李宗城)
1692년(숙종 18년)~1759년(영조 35년), 조선의 문신.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 영의정 항복(恒福)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좌의정 태좌(台佐)이다. 1711년(숙종 37) 진사가 되었고, 1727년(영조 3) 증광문과에 급
제했다. 예관설서. 홍문관정자 등을 거쳐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진압된 후, 영남어사로 파견되었다.
그뒤 부수찬. 부교리 등을 거쳐 1729년 함경도어사, 1730년 북로감진어사(北路監賑御使), 1731년 관서어사로
파견되었다. 이후 부사과. 경기도관찰사. 도승지. 호조참판. 공조판서 등을 거쳐, 1744년(영조 20) 예조판서로
과폐(科幣) 변통을 주장했고,〈속오례의〉를 찬수했다. 1748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 삼사가 신임사화와 관련
지어 이광좌(李光佐)의 관작을 추탈하려 하자, 이광좌를 신구하려다 파직당했다.
이듬해 이조판서에 임명된 후, 개성유수. 좌의정을 거쳐 1752년(영조 28) 영의정이 되었다. 재직중 장헌세자(莊
獻世子)를 잘보살폈으며, 성리학에 밝아 경연이나 소대(召對)에 많이 참여했으며 문장과 글씨에 매우 뛰어났다.
저서로〈오천집〉이 있다. 장조(莊祖)의 묘정에 배향되고. 시호는 효강(孝剛)이었다가 문충(文忠)으로 바뀌었
다.
●이태화(李泰和)
1694년(숙종 20년)~1759년(영조 35년), 조선의 문신. 자는 동장(東章), 호는 단암(丹菴), 시호는 영민(榮敏), 생
원(生員) 몽려(夢呂)의 아들. 1711년(숙종 37년) 18세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적(典籍)
으로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직했고 1725년(영조 1) 옥구현감(沃구懸監)에 재직중 이구(李逑)의 처
를 노예로 하고 횡포한 짓을 저질러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1727년 풀려나 고향에서 학문에 전심했다. 1758년(영조 34) 다시 기용되어 장령(掌令)이 되고, 승지(承旨), 호
조판서 등을 역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종백(李宗白)
1699년(숙종 29년)~1759년(영조 35년), 조선의 문신. 자는 태소(太素), 호는 목천(牧川), 시호는 정민(貞敏), 관
찰사 형좌(衡佐)의 아들. 1721년(경종 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72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 부수찬(副修撰), 헌납(獻納), 집의(執義)를 역임, 1738년 광주부윤(廣州府尹)을 거쳐 이듬
해 대사헌이 되고, 1741년 이조참의(吏曹參議), 병조참지(兵曹參知), 1749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이조참판(吏曹參判), 함경도관찰사, 호조참판을 거쳐 1754년 형조판서로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1758년(영조 34) 호조판서를 지냈다.
●이대유(李大㕀)
1709년(숙종 35년)~1784(정조 2년), 조선의 학자. 자는 경인(景引), 호는 활계(活溪), 남원(南原) 출신으로, 재
사당(再思堂) 원(黿)의 증손이고. 군수(郡守) 수(洙)의 손자이다. 1679년(숙종 5년) 31세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성혼(成渾)의 천거로 사옹원참봉(司饔院參奉)이 되었다.
어머니의 병으로 관직을 물러난 후 참봉(參奉), 별좌(別坐), 찰방(察訪), 주부(主簿), 형조좌랑(形曹佐郞)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서 조광조(趙光祖)의 학통(學統)을 이었다. 남원(南原)
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그의 유고 활계집(活溪集)은 현손 장욱(長郁)이 1657년(효종 8)
에 2권 1책 목활자본으로 편집 간행하였고, 그뒤 후손 집형(集馨)이 1822년(순조 22) 중간하였다.
●이경일(李敬一)
1734년(영조 10년)~1820년(순조 20년)
조선의 문신. 자는 원회(元會), 호는 청헌(聽軒), 시호는 효정(孝定), 항복(恒福)의 6대손, 도사(都事) 종열(宗悅)
의 아들. 항복의 종손(宗孫)이어서 음보(蔭補)로 온릉참봉(溫陵參奉), 덕산현감(德山縣監) 등을 지내고 1775년
(영조 51)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예조좌랑(禮曹佐郞), 정언(正言)을거쳐, 호조참판
(戶曹參判)에 이르러 오은군(鰲恩君)에 봉해졌다. 그 후 공조, 형조의 판서, 대사헌, 우의정을 거쳐 1804년(순조
4년) 좌의정에 승진, 1808년(순조 8) 봉조하(鳳朝賀)가 되었다.
●이집두(李集斗)
1744년(영조 20년)~1820(순조 20년), 조선의 문신. 자는 중휘(仲輝), 호는 파서(琶西), 구학(구鶴), 좌의정 경억
(慶億)의 5대손으로 감역(監役) 진원(進源아들. 1774년(영조 50년) 진사(進士)가 되고, 이듬해 정시문과(廷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 주서(注書)를 지내고, 1784년(정조 8)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한식
제(寒食祭)를 잘 치르게 한공으로 문성진 첨절제사(文城鎭僉節制使)에 승진했다.
그후 형조참의(形曹參議), 이조참의, 대사성(大司成), 승지(承旨), 안동부사(安東府使)등을 거쳐 대사헌이 되
었다. 1798년(정조 22) 함경도관찰사가 되고, 1800년(정조 24)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예조
판서에 올랐다.
1810년(순조 10)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갔다가 판돈령부사(判敦零府事)에 이르러 기로소(耆老
所)에 들어갔다, 글씨에 뛰어나 앞서 정조가 지은 만천명 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의 자서(自序)를 해서
(楷書)와 전서(篆書)로 첩(帖)을 써서 바쳤다.
●이격(李格)
1748년(영조 24년)~1803년(순조 3년), 조선의 무신. 자는 천로(天老), 호는 만오(晩梧), 동지중추부사 보만(溥
萬)의 아들.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769년(영조 45) 무과(武科)에 급제, 1773년(영조 49) 부안현감(扶安縣
監)이 되고, 정조 즉위 후, 권신(權臣) 홍국영(洪國榮)의 세도로 남양(南陽)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병마절도
사, 수군절도사를 거쳐 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摠管)을 지냈다.
●이 벽(李檗)
1754년(영조 30년)~1786년(정조 10년), 조선의 천주교도. 원명은 덕조(德祚), 국당공 후(後) 남인계 지퇴당 이
정형의 후손으로 보만(보萬)의 아들이다. 1777년(정조 1)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등의 서학(西學) 토
론회에 참석한뒤 천주교에 관심을 기울여 친척 이승훈(李承薰)에게 부탁, 중국에서 서적을 구득하고 남인(南
人)들 사이의 동지를 규합하여 천주교의 선고에 투신,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아 지도자가 되었다.
1785년(정조 9) 신도 김범우(金範禹)의 체포로 서학운동이 표면화 되자 아버지가 그의 선교운동을 말리다가 목
메어 자살한 사실에 충격을 받고 배교자(背敎者) 이기경(李基慶)의 권유로 천주교와 절연, 동지들과 교제를 끊
었고, 이듬해 페스트로 죽었다.
●이석규(李錫奎)
1763년(영조 39년)~1842년(헌종 8년), 조선의 문신. 초명은 영석(永錫), 자는 치성(穉成), 호는 동강(東江), 시
호는 효정(孝貞). 항복(恒福)의 7대손, 경관(敬寬)의 아들. 1783년(정조 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참봉
(參奉), 군수(郡守) 등을 지내고 1807년 (순조 7)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
宦職)을 거쳐, 1818년(순조 18) 대사성이 되었다.
1820년 대사간, 이듬해 공청도관찰사(公淸道 觀察使)를 지내고 1825년(순조 25) 형조, 이조, 공조의 판서를
역임, 이듬해 예조판서,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1827년 좌부빈객(左副賓客), 예조판서, 이듬해 한성부판
윤(漢城府判尹)을 거쳐 우참찬에 재임, 1830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1832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
가 되었다.
●이예환(李禮煥)
1772년(영조 48년)~1837년(헌종 3년), 조선의 학자. 자는 치화(致和), 호는 난국재(蘭菊齎), 고려의 문하시중
(門下侍中) 제현(齊賢)의 후손. 송치규(宋穉奎)의 문인. 학행(學行)으로 관찰사의 천거까지 받았으나 벼슬은
못했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이계조(李啓朝)
1793년(정조 17)~1856년(철종 7), 조선의 문신. 자(字)는 덕수(德搜), 호(號)는 동천(桐泉), 시호(諡號)는 문정
(文貞), 백사(白沙) 항복(恒福)의 7대손으로, 석규(錫奎)의 아들이다. 1831년(순조 3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及第) 하고, 헌종조에 이조참의(吏曹參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고, 1849년(철종 즉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1852년(철종 3) 공조판서(工曺判書)를
거쳐 1854(철종 5)년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글씨에 뛰어났었다.
●이유원(李裕元)
1814년(순조 14년)~1888년(고종 25년), 조선말의 문신, 자(字)는 경춘(景春), 호(號)는 귤산(橘山), 묵농(墨農),
시호(諡號)는 충문(忠文), 이조판서(吏曹判書) 계조(啓朝)의 아들로, 1841년(헌종 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45년(헌종 11)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의주부윤(義
州府尹), 함경도관찰사(咸鏡道 觀察使)를 역임하고 좌의정에 이르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권하자 1865년(고종 2)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좌천(左遷) 되었다가, 중추부영
사(中樞府領事)로 전임되어 대전회통(大典會通)을 편찬 총재관(摠裁官)이 되고, 1873년(고종 10) 흥선대원
군이 실각(失脚)하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1875년(고종 12)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인천(仁川)의 개항을 주장하였으나 수구파(守舊派)
의 공격을 받고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물러앉아 1880년(고종 17)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
었다. 1882년(고종 19)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 일본의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
와 제물포조(濟物浦條約)에 조인하였다. 저서에《귤산문고》. 《가오고략(嘉梧藁略)》. 《임하필기(林下
筆記)》 등이 있다.
●이현직(李顯稷)
조선의 무신. 자는 백형(伯衡), 총관(摠管) 격(格)의 아들. 1846년(현종 12)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1848년 전라
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854년(철종 5)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1857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
었다. 1865년(고종 2) 총융사(摠戎使)에 오르고 1868년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 이어 어영대장(御營大將)
이 되었다.
● 이유승(李裕承)
1835년(헌종 1년)~1906년, 조선의 문신. 자는 경선(景先), 사시는 효정(孝貞), 영의정 항복(恒福)의 9대손, 계선
(啓善)의 아들, 부통령(副統領) 시영(始榮)의 아버지이다. 1864년(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예문관검열· 승정원주서를 거쳐 1866년(고종 3)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다음해에는 조만화(趙晩和)를 대신해 접위관(接慰官)이 되어 일본의 사신을 접대했고, 곧이어 1868년에는 평
안남도 암행어사가 되어 민정을 규찰하였다. 1869년 상호도감(上號都監)에서 도제조 이하를 시상할 때, 우통
례(右通禮)로 참가해 가자(加資)되었으며, 이듬해 승지를 지냈다.
그 뒤 1878년(고종 15) 성균관대사성·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881년(고종 18) 좌부승지로서 좌승지 박정양
(朴定陽)등과 함께 고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려던 이재선(李載先)을 제주도로 유배보내는데 반대하고 극
형을 주장하는 계(啓)를 올렸다.
1883년(고종 20) 이조참판, 1887년 시강원 겸 보덕을 지내고 1888년(고종 25)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889
년에는 영조대왕옥책문(英祖大王玉冊文) 작성시 서사관(書寫官)으로 참여하였다. 이듬해 대왕대비가 사망
하자 국장도감제조(國 葬都監提調)· 예조판서에 임명되어 국장을 수행하다가 전례(典禮)의 절차에 대한 착
오로 파직되었으나 곧 왕명에 의해 연임되었다.
다시 대호군으로서 중국의 사신을 호송하는 반송사(伴送使)를 맡았고, 이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91년
한성부판윤에 재임명되고, 다음 해에는 선조대왕옥책문(宣祖大王玉冊文)의 서사관이 되었다. 1883년 공조
판서를 거쳐 1884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 해 국정을 개혁하기 위해 교정청을 설치했을 때 대호군으로 어윤중(魚允中) 등과 함께 교정청당상에 임명
되고, 곧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으로 칙임관(勅任
官) 4등에 서임되었고, 1898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어 칙임관 2등이 주어졌다.
이듬해 장례원경(掌禮院卿)에 보직되어 왕실의 의례(儀禮)와 관련해 여러 차례 상주하였다. 다시 궁내부특
진관이 되었으며, 1900년(대한광무 4년)에는 창덕궁선원전 제1실상량문(昌德宮璿源殿第一室上樑文)의
서사관으로도 활약하였다.
1904년 태의원경(太醫院卿)을 지내고,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보호국으로 전락하자 조약 반대의 소
를 올려 매국노 박제순(朴齊純)이 의정서리(議政署理)가 되는 것은 불가(不可)하며, 조약을 배척해야만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희수(李喜秀)
1836년(헌종 2년)~1909년(융희 3년), 조선의 서화가. 자는 지삼(芝三), 호는 소남(小南), 경지당(景止堂), 상원
(祥原) 출신. 7세 때부터 조광진(曺光振)에게 글씨를 배워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행서(行書)의 각
체(體)에 능했으며, 그림에도 뛰어나 난(蘭)과 죽(竹)을 잘 그렸다. 필적으로는 모간(模刊)한 것이 전한다.
●이주영(李胄榮)
1837년(헌종 3년)~1913년, 조선의 문신. 자는 순경(舜敬), 군수(郡守) 유헌(裕憲)의 아들. 1874년(고종 11) 증
광문과(增光文科)에 장원, 부교리(副校理), 부수찬(副修撰), 응교(應敎)등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검상(檢詳),
필선(弼善), 교수(敎授), 병조정랑(兵曹正郞), 우승지(右承旨) 등을 역임, 1895년(고종 32) 귀족사장(貴族司
長)이 되고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科), 태의원경(太醫院卿), 장례원경(掌禮院卿)을 지낸 후 기로소(耆老
所)에 들어갔다. 1910년(융희 4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정부에 의해 남작(男爵)이되었다.
●이하영(李夏榮)
1858년(철종 9년)~1919년, 조선의 대신. 자는 치행(致行), 호는 금산(禁山) 외무아문주사(外務衙門主事), 사헌
부감찰(司憲府監察)등을 역임하고, 미국 주재공사관서기관(書記官)이 되었다가 귀국 후웅천(熊川)과 흥덕(興
德)의 현감(縣監), 외무아문 참의(外務衙門參議), 승정원우부승선(承政院右副承宣), 회계원장(會計院長)을
역임했다,
1898년(건양 1년) 주일전권공사(駐日全權公使), 이듬해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을 지냈다. 1899년(광무 3
년) 다시 주일 특명전권공사, 1903년 특진관(特進官), 찬정(贊政), 이듬해외부 대신(外部大臣)을 지내고,
1905년(광무 9년) 법부대신(法部大臣)이 되었다.
1907년(융희 1년) 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이 되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일본정부에 의해 자작
(子爵)이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이시영(李始榮)
1868(고종 5년)~1953년, 독립운동가, 정치가. 자는 성흡(聖翕), 호는 성재(省齋), 시림산인(始林山人), 이조판
서 유승(裕承)의 아들,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사위. 1885년(고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이듬해 가주
서(假注書)가 되고, 형조좌랑(形曹佐郞)을 거쳐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로서 서연관(書筵
官)이 되고 189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94년 부승지(副承旨)가 되었다.
이어 우승지(右承旨)에 올라 내의원(內醫院), 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를 겸했고, 다시 참의내무부사
(參議內務府事), 궁내부 수석참의(宮內府首席參議)를 역임, 1896년 장인인 김홍집이 살해되자 사직했다.
1905년(광무 9년) 외부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으로 등용, 이듬해 평안남도관찰사로나갔다가 1908년 한성재
판소장, 법부 민사국장(法部民事局長), 고등법원 판사를지내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 독립군의 양성에 힘썼다.
1919년 4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역임하고, 1929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
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 1933년 임시정부 직제개정 때에 국무의원 겸 법무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귀국,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으로 민주진영을 영도,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
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고 1951년 부통령을 사퇴했다. 한편 대종
교도(大倧敎徒)로서 1950년 원로원(元老院) 원장을 지냈으며 글씨를 잘 썼다. 국민장(國民裝)으로 정릉(貞
陵) 남쪽에 안장(安葬),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이상설(李相卨)
1871년(고종 8년)~1917. 독립운동가.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補齋), 행우(行雨)의 아들, 용우(龍雨)에게 입
양(入養). 일찍부터 신학문에 뜻을 두어 영어, 노어(露語), 법률(法律) 등을 공부하고, 1894년(고종 31) 식년문과
(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1904년(광무 8년) 법부협판(法部協辦)이
되고 이듬해 의정부참찬(參贊)에 올랐다.
같은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지자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실패했다.
1906년 이동녕(李東寧)등과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 노우키에프스크(煙秋)에 이주하여 원동임야회사(遠東
林野會社)를 세우고 다시 만주간도 용정(間島龍井)에 가서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하여 교포 자제의 교
육과 독립정신 고취에 전력했다.
1907년 화란(和蘭)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열리자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이준(李
儁), 이위종(李瑋鐘)과 함께 헤이그에가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려 했으나 일본의 음모로 참석을 거부당했
다.
이 일로 인하여 본국의 궐석재판(闕席裁判)을 열어 사형을 선고하자 귀국을 단념, 영국, 미국을 거쳐 다시 블라디
보스톡으로갔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유인석(柳麟錫) 등과 성명회(聲鳴會)를 조직, 합방의 부당성을 통박
하는 성명서를 각국에 발송,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일본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관헌에 잡혀 투옥되었다.
이듬해 석방되자 이동녕(李東寧)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권업보(勸業報)」를 발행하여 교포의 계
몽과 산업발전에 공헌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이 석(李 錫)
1882년(고종 19년)~1909년(융희 3년), 조선의 의병장. 자는 사옥(士玉), 경북 청송(靑松) 출신. 1896년(건양 1
년) 15세에 의병으로 일본군과 싸워 패하고 동지들과 산속에 숨었다가, 1905년(광무 9년) 영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킨 정용기(鄭鏞基)의 부하로 편입되어 여러 차례 전공(戰功)을 세워초장(哨長)에서 좌영장(左領將)이 되었
다.
정용기가 전사한 후 중군(中軍)이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여러 싸움에서 많은 적을 생포했으나 1907년 7월 적에
게 대패하여 군사들을 해산하고 하산(下山)했다. 주막에서 체포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탈출을
실패하여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이수경(李壽卿)
1882년(고종 19년)~1955, 현금(玄琴)의 명인(名人). 호는 송사(松史), 장악원악사(掌樂院樂師) 원근(源根)의
아들. 서울 출신. 11세에 장악원악공(樂工)이 되고, 1902년 전악(典樂), 1914년 아악수장(雅樂手長), 1933년
아악사(雅樂師)를 역임하고, 1940년 사퇴했다.
거문고 연주가 전공이나 악기(樂器) 제작에도 능하여 많은 명기(名器)를 남겼다. 아악부(雅樂部) 악사로 있을
때, 거문고, 정재(呈才), 악장(樂章) 등을 가르쳤다. 단소(短蕭)와 시조창(時調唱)에도 일가를 이루었으며, 거
문고에서는 '영산회상(靈山會相)' 의탄주(彈奏)가 뛰어났다.
●이시영(李始榮)
1882년(고종 19년)~1929년, 독립운동가, 자는 중현(仲賢), 호는 우재(又齋), 관준(寬俊)의 2남. 대구(大邱)출
신. 1914년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상해(上海) 등지로 내왕, 항일 무력봉기를 꾀했다. 뒤에 국내에 잠입하여
활약중 애국단(愛國團) 사건으로 대구에서 피체, 복역(服役)하다가 출감, 안희제(安熙濟), 최준(崔俊), 박상진
(朴尙鎭), 서상일(徐相日) 등과 광복단(光復團)을 조직, 무기를 구입하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1919년 3·1운동 전에 지방유림(儒林)들을 상경케 하여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밀송 했다. 3·1운동 후 만주에 망
명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병사했다. 시·서·화(詩書畵)에 능했고, 유시(遺詩)가 있다.
●이상정(李相定)
1897년(광무 1년)~1947년, 독립운동가. 일명 연호(然皓), 호는 산은(汕隱), 시우(時雨)의 아들, 상화(相和) 상백
(相伯)의형, 일본 고꾸라꾸잉대학(國學院大學)을 졸업, 오산(五山)· 경신(儆新)· 계성(啓星)·신명(信明) 등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3년에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한때 풍옥상(馮玉祥)의 막하에서 활약하
다가 상해(上海)· 남경(南京) 등지에서 항일투쟁에 종사했고, 1932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했다.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자 국민정부의 초청으로 중경 육군 참모학교의 소장교관(少將敎官)을 지
내고, 1939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議政院議院)에 선임, 한편 유동열(柳東說) 등과 신한민주혁명당(新韓民
主革命黨)을 조직하여 중앙위원 겸 군사부장에 취임했다.
1941년 중국 육군 유격대 훈련학교의 교수를 거쳐 이듬해화중군사령부(華中軍司令部)의 고급막료로 남경전
(南京戰) 한구전(漢口戰)에 직접참가했다. 해방후 상해(上海)에 머물러 교포의 보호에 진력하다가 1947년 귀
국, 뇌일혈로 죽었다. 시(詩)·서(書)·화(畵)에 능했고 특히 전각(篆刻)에 뛰어났다.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고,궁
중비사(宮中秘史)· 야사(野史)에 조예가 깊었다.
●이규홍(李圭弘)
1881년(고종 18년)~1929년, 자(字)는 원오(元五), 호(號)는 오하(梧下)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기영(琪榮)
의 장남으로 20세에 중추원 의관에 이른 수재(秀才)였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의병을 모아 의병장이 되
어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마치고 임병찬(林柄瓚)에게 알리니 답서에 군정수칙(軍政守則)과 경계교시(警戒敎
示)를 내려주어 1907년(丁未年)에 이석용(李錫庸)· 문태수(文泰洙) 등과 합세하여 용맹을 떨쳤으며 1918
(戊午年)에 중국 상해 (上海)에 도착하여 임시정부요원(臨時政部要員)인 이동녕(李東寧)· 안창호(安昌浩)
및 김규식(金圭植)· 김좌진(金佐鎭) 등을 만나 군자금 등의 자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귀국하여 송창재(宋昌在) 집에서 숨어 살다가 1924년 체포되어 수감되니 정미의거(丁未義擧)는 18년이
지나 시효가 지났으나 혹독한 고문으로 사경(死境)에 이르러 출감하였으나 1929년 6월 6일 조국의 독립을 보
지 못한 채 일생을 마쳤다.
●이회영(李會榮)
1867년(고종 4년)~1932년, 호(號)는 우당(友堂), 1908년 장훈학교(長薰學校)를 설립하였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전심을 기울였다. 1910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했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으로 일생을 보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단장(大韓民國建國功榮勳章單章)이 수여되었다.
● 이상화(李相和)
1901년(광무 5년)~1943년, 시인. 호는 상화(尙火), 시우(時雨)의 아들. 경북 대구(大邱) 출신으로서 중동학교
(中東學校)를 거쳐, 도오꾜오 외국어학교(東京外國語學校) 불어과(佛語科)를 졸업, 귀국하여 대구 교남학
교(嶠南學校) 교사로 있었다.
1917년 고향 대구에서 백기만(白基萬)· 현진건(玄鎭健)· 이상백(李相佰) 등과 습작집(習作集) 「거화(炬
火)」를 간행, 1922년에는 「백조(白潮)」 동인으로 창간호에 시(詩) <나의 침실(寢室)로>를 발표, 이어서
<가을의 풍경>. <말세(末世)의 희탄(稀歎)>. <그날이 그립다>등 탐미적(耽美的)인 서정시를 썼다.
1926년 「개벽(開闢)」지에 <빼앗긴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新傾向派)의 대열에 가
담, <역천(逆天)>. <태양의 노래>등 일련의 반항시(反抗詩)를 발표하다가 1935년부터 약 2년 동안 중국을
방랑했다.
백기만 편(編)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수록된 19편의 시(詩) 외에 여러편의 번역시(藩逆詩)를 남
겼다. 1948년 3월 동향(同鄕) 출신의 서인 김소운(金素雲)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達城公園)에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이재훈
'■ 경주이씨 > 경주이씨 명인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영(李榮) (0) | 2008.03.18 |
---|---|
이집두(李集斗) (0) | 2008.02.20 |
이벽(李檗) - 34世 국당공파(菊堂公派) (0) | 2007.12.25 |
체원(體元) 스님에 대한 고찰(考察) (0) | 2007.11.29 |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2] (0) | 2006.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