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世 이집두(李集斗)
[계대] 익재공파(益齋公派)→29世 화곡공(華谷公) 경억(慶億)의 현손(5대손).
[문과] 영조(英祖) 51년(1775) 을미(乙未) 정시(庭試) 병과(丙科) 5위
[생졸년] 1744년 3월24일생(영조20) ~ 1820년 12월30일졸(순조20)
[성 씨] 경주이씨(慶州李氏) 익재공후 화곡공파(華谷公派)
[자] 중휘(仲輝),
[호] 파서(琶西), 구학(瑾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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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字)는 중휘(仲輝), 호(號)는 파서(琶西), 또는 구학(瑾鶴)이다.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의 현손(5대손)으로 감역(監役-從二品), 이진원(李進源)의 아들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1774년(영조 50)에 진사(進士)가 되고 이듬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하여, 검열(檢閱-正九品), 주서(注書-正七品)를 지내고, 1784년(정조 8) 이조좌랑(吏曹佐郞-正六品)으로 한식제(寒食祭)를 잘 치른 공으로 문성진첨절제사(文城鎭僉節制使-從三品)에 올랐다.
이어 장령(掌令-正四品), 형조참의(刑曹參議-正三品), 이조참의(吏曹參議-正三品), 대사성(大司成-正三品), 승지(承旨-正三品), 안동부사(安東府使-正三品)등을 거쳐, 대사헌(大司憲-從二品)이 되었다. 1798년(정조 22)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從二品)가 되어 변방의 야인을 잘 다스렸고, 1800년(정조 24)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 나라에 다녀왔다.
순조 즉위 후 1804년(순조 4) 8월 7일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正二品)에 제수되었고 그 후에도 1809년(순조 9), 1811년(순조 11), 세차례에 걸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하였다. 이어 공조(工曹), 예조판서(禮曹判書-正二品)가 되고, 1810년(순조 10)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갔다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從一品)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글씨에 뛰어 났으며 정조(正祖 : 제22대왕)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의 자서(自序)를 해서(楷書)와 전서(篆書)로 첩(帖)을 써 바치기도 하였다.
병인 1806(순조 6)년 9월에 경주 시조탄강지(始祖 誕降地) 아래에 세운 표함 유허비(遺墟碑)의 글씨가 바로 정헌대부 형조판서겸 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正憲大夫刑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파서 이집두(李集斗)공의 글씨다.
묘지는 충북 증평군 증평읍 미암리 산109-17의 선영 아래에 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慶州李氏 ◇梧村公派現代譜(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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