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묘갈.묘표[女]

증 정부인 경주이씨 묘갈명(박문수 어머니)

야촌(1) 2007. 6. 8. 21:57

[찬 인] : 이광덕(李匡德)
[서 자] : 이광사(李匡師)
[규 모] : 전체 높이 303㎝, 비신 높이 185㎝, 비신 폭 61.5㎝, 비신 두께 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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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 정부인 경주이씨 묘갈명(암행어사 박문수 어머니)

공조참판 이세필[李世弼, 1642년(인조 20)∼1718년(숙종 44)]의 장녀로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이태좌[李台佐, 1660년(현종 1)∼1739년(영조 15)]의 누이동생 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수 홍문관 대제학(守 弘文館 大提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이광덕(李匡德)이 찬하고, 완산후인(完山後人) 이광사(李匡師)는 글씨를 쓰다.

이해 갑인(甲寅) 1734년(영조 10)에 나라에서 청나라 연경(燕京)에 일이 있어서, 그 사신으로 갈 사람을 얻기 어려웠다. 영성군 박문수(靈城君 朴文秀)가 가야했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문수는 죽을병이 들었으니 가서는 안 된다」하였다.

문수가 병을 억지로 하여 일어나서 자신이 주상(主上)을 뵈옵고 가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신(臣)의 어미가 손수 조복(朝服)을 가지고 신에게 입혀주며 신이 가기를 권하니, 신의 어미 뜻이 이와 같으니 신이 어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효도가 되 옵니다」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안색을 고치시고 칭찬하시기를「경의 어머니(母)는 어질 구나」하시었다. 문수가 이미 가서도 임금께서 여러번 하교 하시어 영성군의 어머니가 무병한가, 안한가를 물으시고, 또 궁중(宮中)사람을 보내시어 영성군 어머니(母)에게 쌀을하사(下賜)하시고 간섭 하시는 것 같이 하시었다.

을묘(乙卯) 1735년(영조 11) 8월에 지경연사(知經筵事), 조현명(趙顯命)이 임금께 아뢰어 말하기를「영성군 박문수의 어머니가 죽었습니다」라고 아뢰니,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내가 진실로 그 어미의 어짊을 알았는데, 지금 그 서거(逝去)함을 들으니 내 마음이 상하고 슬프구나」하시고 유사(有司)에게 영을 내리어 부조를 하사 하시었다. 이에 국내 사람들이 다 영성군이 현모(賢母)가 있음을 알게되었다.

영성군 어머니의 어짊은, 특히 그 아들에게 충성을 다하고, 지극히 능함을 가르쳐서 스스로 명철하신 임금께서 알아주심을 받았고 우리 성주(聖主)께서는 사람을 알 어시는 밝으심이 다만 조정에 있는 신하를 분변하실 뿐만 아니라, 또 능히 규중(閨中)의 부인에 까지 잘 미치시니 아! 아름답도다.

부인의 성(性)은 이씨(李氏)니 명유(名儒) 구천공(龜川公)의 따님으로, 증 찬성(贈 贊成) 박공(朴公)에게로 시집오니, 바로 구당 문효공(久堂 文孝公)의 손자이다. 이러므로 부인이 나서는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듣고 자라서는 효도하고 근신하는 훈계를 본받아 며느리가 되어서는 공경하고 어미가 되어서는 엄숙하며, 몸가짐은 검소하고 살림살이는 부지런하여 무릇 이른 바, 여자의 행실과 안살림의 법도가 다 질서가 정연하였다.

그러나 천품이 크고, 두터우며 상쾌하고 활달하고, 식견이 심원하며 도량이 위대하여 옛적의 대인과 명사와 같다고 하였다. 평생에 돈목함을 숭상하고 베풀어주기를 좋아하여 먹을 것을 당하여, 사람의 굶주림을 들으면, 소저를 놓고 주며 막 베를 짜다가 사람의 위급함을 들으면 베틀에서 찢어서 주곤 하였다. 빈궁할때 부터 이미 그렇게 잘하였다.

영성군이 귀하게 되면서는 한해 봉급의 수입을 사방에서 먹을것을 물으러 오는 이에게 다 서서 흩어주고 남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입고 먹는 음식은 성근 베옷과 나물과 장만을 먹는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었다.

항상 개연〈慨然 : 슬퍼 탄식하는 모양〉히 모든 자제들을 위하여 이르기를「은혜와 원망을 분명히 하는것은 장부의 일이 아니다. 은혜는 진실로 마땅히 잊어서는 안되고 원망은 다 기억하지 말고 더욱 좋아하며 오래 의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구천공 집의 계집종이 심부름을 시키니 노여운 말을 하는 자가 있었다. 모든 자제들이 성을 내니, 부인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외롭게 살았으니 비복(婢僕 : 종)들이 어찌 알겠느냐 오만하게 구는 것이 마 땅 하니라」고 하였다.

영남(嶺南)에 있을 적에 구천공 댁의, 옛 종을 고루주어 부리도록 하였다. 전에 오만하던 자가 또한 끼어 있었다. 혹자가 주지 않으려하니 부인이 또 경계하여 말하기를「내가 오직 부모께서 일찍이 부리던 바를 잊지 않는다」하였다. 일찍이 교자를 타고 나가다가 길에서 배반한 종을 만났는데 힘으로 잡을 수가 없었다.

부인이 교자 안에서 전달하는 자를 시켜 불러 말하기를「종 아모는 이리 오너라」하니 배반한 종이 깜짝 놀래어 문득 절을 하고 말하기를「굴레를 잡겠습니다」하고 드디어 굴레를 잡고 또 말하기를「전에 굴레를 잡은 자라고」하였다. 옆에서 살펴보니 배반한 종이 끝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드디어 더불어 돌아가서 그 죄를 다스렸다.

무신(戊申) 1728년(영조 4)의 변란에 영성군이 도순무사(都巡撫使)를 좇아 출정(出征)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다, 부인을 위하여 걱정하니, 부인이 이미 적이 반드시 패할 것을 점쳐서 안다고 하며 웃으며 염려를 하지 않았는데, 적은 과연 패하였다. 

영성군이 바로 영남 관찰사(嶺南 觀察使)에 제배(除拜 : 任命)되어 부인을 맞이하여 돌아오니 사람들이 다 부인을 위하여 하례하니 부인은 또 과히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 견식(見識)과 도량이 크게 뛰어나 여느 아낙네 같이 않음이 다, 

이와 같았다. 부인(夫人)이 비로소 홀로 되었을 적에 나이 겨우 30여세 이었다. 찬성공의 부모 및 백씨의 아들이 앞뒤로 죽고 끝에 부사공이 젊으나 병이 많고 모든 자녀가 다 아득히 어렸다. 이때를 당하여 박씨가(朴氏家)는 거의 멸문지경 이었다.

부인의 맏동서 권씨(權氏)와 손아래 동서 이씨(李氏)와 더불어 굶주리고, 객지에 말며 천신만고로 서로 집안 살림살이를 매우 힘썼다. 부인은 길쌈을 잘하고 이씨는 바느질을 부지런히 하여, 그 남는 이익은 다 권씨에게 돌리고 아침제사 지내고 자기의 방에 베틀을 잡고 저녁밥 먹고 아래동서의 손상자에 바느질거리를 끝내곤 하니 금고(金庫)는 주인의 이름이 없고 아이들은 정한 어미가 없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십수년에 가도(家道)가 이루어졌다.

그 후에 찬성공의 종제, 아모 및 그 어머니와 아내가 동시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 이때 부인은 이미 늙으셨다. 그래도 병중에는 약물을 손수 지어다 주고 죽어서는 수의를 몸소 갖추어 옷을 준비하였다. 이미 세 초상을 치르고 장사는 지냈으나 「묘는 있어도 주장하는 이가 없으니 누가 수호 하리요」하고 스스로 백꾸러미 돈으로써 밭을 사고 묘곁에 사람을 사서 하여금 먹이고 수호하도록 하였다.

또 그 외로운 아이를 거두어 스스로 양육하면서 말하기를,「외로운 아이가 만일 장성한다면 어떻게 가도(家道)를 이루리요」하고 해마다 종제(從弟)의 전장(田庄)에서 들어오는 것을 모이어, 별도로 저축하여 그 장성하기를 기다리고 그 제사의 비용 같은것은 다 부인 스스로 준비하였다.

아! 아낙네로서 가도를 이루기도 진실로 어려운데 세, 아낙네들이 같이 한마음이 되기는 더욱 쉽지 않으며 자기의 외로운 아이를 성장시키기도 진실로 어려운데 남의 외로운 아이를 성장시키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 볼적에 남자가 되었더라면 어지러운 때를 만났더라도 반드시 능히 공화〈(共和) : 서주(西周)때 여왕(女王)이 출분(出奔)한 뒤에 14년간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협의해서 행한 정치〉의 죽을힘을 다 할 텐데 하물며 피아(彼我 : 남과 자기)가 사사로움을 꺼려 나라를 그릇치고 일을 낭패되게 함에랴.

사람이 사생(死生)의 부탁을 받으면 반드시 능히 정영(程榮)이 고아를 수호한 것처럼 해야 하거늘 하물며, 죽은 사람을 속여팔고 남을 져버리고 스스로 이익만을 위하겠는가? 세도(世道)가 쇠하고 신의가 점점 없어졌으니 그 의리를 더욱 표하여 세상에 나타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일찍이 생각건대 옛 부터 재덕 있고 현철한 부인으로는 맹모(孟母)와 공부문백(公父文 伯)의 어머니 같은 이는, 전기(傳記)에 실려있는 바로 진실로 다 어질다 하겠다. 그러나 그때에 인군이 능히 알아주고 표창이 있음을 듣지 못하고 그 혹 한때의 인군의 은례(恩禮)를 받은 이는 장제현(張齊賢)과 채양모(蔡襄母)와 같은 유는 있기는 하나, 또 그 행실이 가히 기록 할만한 것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다.

부인 같은 분은 이미, 그 덕이 있고서 또 능히 성상께서 알아주심을 받았으니 이는 맹모(孟母)와 문백모(文伯母)도 능히 얻지 못한 것이고 채양(蔡襄)과 모든 집도 능히 있지 아니한 바이다. 내가 이러므로 부인의 행장(行狀)을 논술하매 첫머리로 부인의 성조(聖朝)의 포양(褒揚)하신 사실을 싣고 부인의 어짊이 유독, 스스로 어진 것이 아니라 대개 성상께서 어질게 여기심으로 후에 더욱 어질게 된 것이다.

부인은 을사(乙巳) 1665년(현종 6)에 나서 누린 수가 71세 시었다. 장지는 공주(公州) 옛 유성현(儒城縣) 기은곡(耆隱谷) 정향(丁向) 언덕 찬성공 묘 아래에 있다. 구천공(龜川公) 세필(世弼)은 벼슬이 참판(參判)인데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조부 시술(時術)은 벼슬이 참판(參判)이며 증조 정남(井男)은 벼슬이 예빈시정(禮賓寺正)이며 고조는 백사 문충공(白沙 文忠公) 항복(恒福)이다.

비(妃 : 어머니)는 반남 박씨(潘南朴氏)니 참판(參判) 세모(世模)의 따님이다. 찬성공(贊成公)의 휘는 항한(恒漢)이니 영성군 공훈의 추은(推恩)으로 순충적덕 보조공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영은군(純忠積德 補祚功臣 崇禎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世子貳師 五衛都摠府 都摠管 靈恩君)에 추증(推贈)되었고 부인은 작위(爵位)에 따라 정경부인(貞敬夫人)이다. 

고(考) 선(銑)은 벼슬이 군수(郡守)이다. 문효공(文孝公) 장원(長遠)은 벼슬이 판서(判書)이다.
부인이 2남 1녀를 두었고, 영성군의 형(兄) 민수(民秀)는 음직(蔭職)으로 부사(府使)를 하였고 백씨 정자공(正字公)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아들은 인영(仁榮)·구영(久榮)·시영(始榮)이니 구영은 영성군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따님은 사인(士人) 이광운(李匡運)이니 계자로 도사(都事) 민효(閔孝)가 있다. 명(銘)하노니 이르기를

옛적에 사가(史家) 사마천(司馬遷)이 일찍이 유후(留侯)를 의심하여,
장대하고 훌륭하지 못하고 부인의 상이라 하였는데,
지금 부인의 의젓하고 부드러움이여, 도리어 장자(長者)의 품행이 있도다.

늘름히 효도와 공경으로서 자신을 갖음이여, 구천공의 따님이며,문효공의 며느님이로다.
충신(忠信)에 뜻하여 마음이 넓고 도량이 큼이여, 오로(鰲老 : 白沙)의 손자이며, 영성군의 어머니답도다.

육친(六親)이 우러러 보는 바이며 성주(聖主)께서 포장(褒奬)하신 바이니,
내가 명에 지었으니 가정을 둔 남정네여 이마에 땀이 나리로다.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122년 기사(己巳 : 1749)년 8월 일에 세움.
국역(國譯) : 송창준(宋昌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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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貞敬夫人慶州李氏墓碣

歲甲寅。國有事于燕而難其使。靈城君朴文秀當行。或曰文秀有死疾不可行。文秀強疾起。自見上請行。且曰。臣母手持朝衣衣臣勸臣行。臣母意如此。臣以安母心爲孝。於是上動色稱曰。卿母賢矣。文秀旣行。上屢下敎問靈城君母無病否。又遣掖庭人。賜靈城君母米如干。及乙卯八月。知經筵事趙顯命白上曰。靈城君朴文秀母亡矣。上曰。予固知其母賢。今聞其逝。予心傷惻。亟令有司賜賻。於是國中之人民。皆知靈城君有賢母。靈城母之賢。不特敎其子盡忠。至能自受明主之知。而我聖上知人之明。不但能辨在廷之臣。又能及於在閨之婦人。嗚呼休哉。夫人姓李氏。名儒龜川公之女。歸贈贊成朴公。卽久堂文孝公之孫。以故夫人生而聞詩禮之敎。長而襲孝謹之訓。爲婦敬爲母肅。治身儉治家勤。凡於所謂女儀閨範。皆井井如也。然乃其天資宏厚爽豁。識遠而量偉。類古之大人鉅公云。平生尙敦睦好施予。當食而聞人之飢。輟箸而與之。方織而聞人之急。裂機而贈之。盖自竆時已能然也。及靈城貴。一歲俸祿之入。四方饋問之來。皆立散無餘。然其所自服御飮食。不過大布之衣。朝夕吃菜啖醬而已。常慨然爲諸子誦曰。恩㤪分明。非丈夫事。恩誠不當忘。㤪則都不記。愈好久依。龜川公家婢使有慢言者。諸子怒。夫人戒之曰。汝輩孤惸。婢僕何知。慢正宜耳。及在嶺南。遍賜龜川公故婢使。前慢者亦在焉。或欲不與。夫人又戒之曰。吾惟不忘父母所甞使耳。甞轎而出。路遇叛奴。而力不可捕。夫人卽於轎內。使傳呼曰。奴某來。叛奴驚愕輒拜。曰執鞚。遂執鞚。又曰前。執鞚者傍察。叛奴卒不敢動。遂與歸治其罪。戊申之變。靈城從都廵撫使出征。人皆爲夫人憂。而夫人已策賊必敗。笑不以慮。賊果破。靈城卽拜南嶺觀察使。迎夫人歸。人皆爲夫人賀。而夫人又未見有過喜之色。其識度偉絶。不類婦人皆如此。夫人始寡。年纔三十餘。贊成公父母曁伯子先後圽。而季府使公少多疾。諸子女皆藐然幼也。當是時。朴氏幾滅矣。夫人與似權氏嬸李氏飢飢僑寓。百苦千毒。而互持家政甚力。夫人善紡績。李氏勤針線。而其剩利則悉歸於權氏。朝祭而取諸仲房之機杼。夕飧而出於季箱之刀尺。帑無主名。兒無定母。如是者餘十數年而家道成矣。其後贊成公從弟某及母妻同時病歿。時夫人已老矣。猶病而手調藥物。歿而躳辦衣襚。旣擧三喪葬。則曰塚而無主。孰爲守之。自以百緡錢買田。與塚徬人。使食而護焉。又取其孤。自抱養之。則曰孤若長。何以爲家。逐歲聚從弟庄稅之入者。別儲以待其長。而若其祭祀之費。皆夫人自具焉。嗚呼。以婦人而成家固難。而以三婦人同一心尤不易。自立其孤固難。而立人之孤尤不易。推是心也。使其爲男子。遭時板蕩之際。則必能爲共和之戮力。况其肯彼我忘私而誤國敗事乎。受人死生之托。則必能爲程嬰之樹孤。况其肯欺賣泉壤而負人自利乎。世道衰。信義漸喪。此其義尤不可不表而見諸世也。余甞按自古淑女哲媛。如孟母,公父文伯之母傳記所載者。誠皆賢矣。然未甞其時人君有能知而表章之。其或有受一時人君之恩禮。如張齊賢蔡襄母之類。又未聞其行宲有可紀。若夫人旣有其德。而又能受聖上之知。是孟母文伯母之所不能得。而蔡襄諸家之所不能有也。余是故論著夫人之行。而首載聖明褒恤之擧。以見夫人之賢不獨自賢。盖聖上賢之而後益賢也。夫人生乙巳。享年七十一。葬在公州古儒城縣耆隱谷丁向原贊成公墓下。龜川公諱世弼官參判。贈領議政文敬公。祖諱時術官參判。曾祖諱井男官禮賓寺正。高祖白沙文忠公諱恒福。妣潘南朴氏。參判世模之女。贊成公諱恒漢。以靈城勳。推恩贈純忠積德補祚功臣崇政大夫議政府都捴管靈恩君。夫人從爵貞敬夫人。考諱銑官郡守。文孝公諱長遠官判書。夫人擧二男一女。靈城之兄民秀蔭府使。繼伯正字公後。子仁榮,久榮,始榮。久榮出系靈城後。女士人李匡運。有繼子都事閔孝。銘曰。

昔史遷甞疑留侯兮。弗魁梧而乃婦人狀。今夫人之婉婉兮。反多長者之行。凜孝敬以自持兮。龜川之女文孝之婦。志忠信而恢廓兮。鰲老之孫靈城之母。六親攸仰。聖上攸奬。我著于銘。髯婦泚顙。<끝>

[참조내용]

◇유후(留侯) : 한(漢)나라 장량(張良)의 봉작(封爵). 고조(高祖)가 천하(天下)를 정하고 장량으로 하여금 스스로 제(齊)날 3만호를 택하라 하니 양이 말하기를 신이 처음 하비(下批)에서 일어나서 주상(主上)과 유(留 : 지명)에서 만났으니 원컨대 유에 봉하여 주시면 만족합니다」라 하였다. 곧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태사공(太史公)이 자방(子房 : 장량)이 장대하고 훤출함을 의심했다고 하였다.

◇장자(長者) : 윗사람. 덕이 높은 사람.

◇정영(程榮) :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조삭(趙朔)이 도안가(屠岸賈)에 죽음을 당할때, 정영이 공손저구(公孫杵臼)와 모의하고, 조삭의 고아를 수호하기 위하여 공손저구는 타인의 아이를 조씨의 아이라 하고 같이 산에 숨었다.

정영이 이것을 도안가에 고하여 저구와 아이를 죽었다. 스스로 조씨의 진짜 아이를 안고 산에 숨었다가 후에 조씨의 대를 이어주었다. 정영은 성사후에 자살로써 저구에게 보답했다는 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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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749년 李匡師書幷箋, 李匡德撰으로 朴文秀가 건립한 母親 경주이씨의 묘갈 拓本帖 [정경부인경주이씨묘갈명(貞敬夫人慶州李氏墓碣銘)] 單帖으로 말미에 崇禎紀元後122年己巳(1749)8月日立의 입비기가 있다. 
<크기> 21.8×35.5cm

 

<참고>
ⓐ 貞敬夫人慶州李氏, 1666~1736
부인은 을사(乙巳 : 1665)년에 나서 누린 수가 71세 시었다. 장지는 공주(公州) 옛 유성현(儒城縣) 기은곡(耆隱谷) 정향(丁向) 언덕 찬성공 묘 아래에 있다. 구천공(龜川公) 세필(世弼)은 벼슬이 참판(參判)인데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조부 시술(時術)은 벼슬이 참판(參判)이며 증조 정남(井男)은 벼슬이 예빈시정(禮賓寺正)이며 고조는 백사 문충공(白沙 文忠公) 항복(恒福)이다.

 


ⓑ 박문수(朴文秀, 1691년 ~ 1756년)의 가족 관계
증조부 : 박장원(朴長遠)
종조부 : 장남 : 박빈(朴鑌)
종숙 : 박성한(朴聖漢)
재종형제 : 박광수(朴光秀)
재종형제 : 박용수(朴龍秀)
재종형제 : 박최수(朴最秀)
종숙 : 박수한(朴壽漢)
종조부 : 박심(朴鐔)
종숙 : 박양한(朴亮漢)
종조부 : 박진(朴鎭)
할아버지 : 박선(朴銑)
백부 : 박태한(朴泰漢)
백모 : 권두상(權斗相)의 딸
사촌 : 박시영(朴始榮)
조카 : 박대규(朴大圭)
조카 : 박치규(朴穉圭)
아버지 : 박항한(朴恒漢)
어머니 : 이세필(李世弼)의 딸
부인 : 김도협(金道浹)의 딸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박문수는 큰아버지 박태한(朴泰漢)의 손자들 가운데서 1명을 양자로 입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