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성씨별관향

파평윤문과 청송심문의 500년 앙금.

야촌(1) 2006. 10. 25. 17:10

■ 파평윤문과, 청송심문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일등 공신’은 아내 윤씨였다.

거삿날 말이 새나갔다며 말리는 측근들에 맞서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입혀주며 단호하게 밖으로 내몬 이가 윤씨였기 때문이다. 훗날 세조비가 된 정희왕후다.

 

정희왕후는 예종이 열네 살에 즉위하자 조선조 처음으로 수렴청정을 시작한 여장부였다. 파평 윤씨는 성종비 정현왕후와 중종비 장경·문정왕후까지 4명의 왕비를 배출했다.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시조는 고려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윤신달(尹莘達)이다.

   고려 예종 때 여진 정벌에 나서 9성을 개척한 5세손 윤관『尹瓘, 1040년(정종 6)~1111년(예종 6)』 덕에 집안이 크게

   일어났다.

 

   조선조 들어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윤필상(尹弼商)을 비롯해 정승·판서를 숱하게 배출했다.

   의사 윤봉길(尹奉吉)과 시인 윤동주(尹東柱)도 이 집안 사람이다.

▶파평윤씨 못찌않게게 왕비를 많이 배출한 가문이 청송심씨(靑松沈氏)다.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와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 경종비 단의왕후(端懿王后)다.

 

  시조 심홍부(沈洪孚)의 4대손 심덕부는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냈고 아들이자 세종의 장인인 심온, 손자 심회(沈

   澮, 1418년 ~ 1493년) 까지 3대가 영의정을 지냈다.

  문과 급제자만 200여 명이 나왔고 대제학도 두 명을 배출했다.



▶청송 심씨 집안에선 요즘 말로 페미니스트라 할 인물도 나왔다.

   19세기 초반 야사 ‘대동패림’을 쓴 심노숭이다.

   1792년 동갑내기 아내 이씨를 잃은 그는 애도 시와 문장 50편을 남겼다.

 

   ‘아내를 여의고 다섯 해를 지나면서 그 사이 단 한 순간의 기쁨도 없었네.’

   “아내 잃고 너무 슬퍼하는 자는 세상의 비웃음을 산다”는 당시 풍조에선 사건이었다. ‘상록수’ 작가 심훈도 이 집안 출

   신이다.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두 집안 사이에 400년 넘게 끌어오던 묘지 싸움이 해결됐다는 소식이다.

   효종 때 영의정까지 지낸 심지원(沈之源, 1593∼1662)이 1614년 부친 묘를 윤관 묘 근처에 쓰자, 파평 윤씨가 “산소

   뒷부분을 누른다”며 이장을 요구했다.

 

   150년 뒤 영조까지 나서 “묘역을 있는 그대로 모시라”고 지시했으나 다툼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 파평 윤씨 쪽에서 묘지를 옮겨갈 땅을 청송 심씨 쪽에 내주면서 심씨 쪽이 심지원 묘 등 19기를 옮기는 합의에

   이른 것이다.

 

   “서로의 선대 분묘까지 공경하며 관리하도록 협력한다”

   는 합의문까지 주고받았다. 400년 묵은 다툼도 후손들이 한 발씩 물러서니 풀렸다.

   타협과 양보의 힘이 허물지 못할 장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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