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전투 2

계백장군(堦伯將軍)

계백장군[堦伯將軍, ?∼660(의자왕 20)] ●황산벌의 한 계백(堦伯)이라고도 표기한다. 관등은 달솔(達率)이다. 660년 김유신(金庾信)과 소정방(蘇定方)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지금의 大田 동쪽 馬道嶺)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천인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黃山:지금의 連山)벌에 나가 5만여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그는 전장에 나아가기에 앞서 “한 나라의 힘으로 나·당의 큰 군대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고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였다. 또한, 병사들에게도 “옛날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5천명으로 오왕(吳王) 부차(夫差..

백제 계백장군 묘(百濟階伯將軍墓)

백제 계백장군 지묘(百濟階伯將軍之墓) ● 계백장군 묘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있다. 백제 의자왕 20년(660)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에 침입하였을때, 5천명의 결시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최후를 맞아 묻힌 곳이다. 출전하기에 앞서 처자를 적국의 노비를 만들지 않으려고 자기 손으로 죽여서 비장한 결의를 보인 계백은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군사 5만명과 대결하여 4차례에 걸쳐 물리쳤다. 그러나 어린 화랑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의 총공격을 받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계백장군의 의로운 죽음을 본 백제 유민들은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은밀하게 가매장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묘소 인근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묘제를 지내오던 관행이 이어져 왔다. 전에는 계백장군 묘라는 것이 밝혀지지는 않고 주민들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