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령 이형 묘갈명 병서(掌令 李迥 墓碣銘 幷序) 송시열 찬(宋時烈 撰) 숭정(崇禎) 계사년(癸巳年, 1653년 효종 4년)에 헌납(獻納) 이형(李迥) 자(字) 여근(汝近) 공이 언사(言事) 때문에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내쳐졌는데, 경성은 서울에서 1천 7백 리나 떨어진 곳이다. 대신(大臣) 잠곡(潛谷) 김육(金堉)공과 판서(判書) 창주(滄州) 김익희(金益熙)공이 서로 연달아 말하여 효종 대왕(孝宗大王)이 그가 독자(獨子)로서 늙은 아버지와 떨어져 있어 늙은 아버지가 아들 생각에 병이 난 것을 불쌍히 여겨 특별히 체직(遞職)을 허락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성덕(聖德)을 흠앙(欽仰)하고 또 “어진 두 분의 김공(金公)이 아니었다면 누가 임금의 이런 효리(孝理)를 도와 이루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