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 2

연암 박지원선생 묘(燕巖 朴趾源先生墓),

■연암 박지원 묘(燕巖 朴趾源 墓), 1737년「영조 13) 3월 5일(음력 2월 5일)∼1805년(순조 5). 12월 10일(음력 10월 20일)」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또는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필균(弼均)이고, 아버지는 사유(師愈)이며, 어머니는 함평 이씨(咸平李氏) 창원(昌遠)의 딸이다. 황해북도 개성시 은덕동의 황토고개 남쪽 기슭에 있는 그의 무덤이다. 일제의 탄압말살정책으로 그의 무덤도 행처를 모르다가 1959년에 묘지명이 발견되어 처음으로 알려졌으며 2011년도에 북측에서 다시 조성되었다.

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생졸년] 1737년(영조 13)~1805년(순조 5)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로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호는 연암(燕巖), 시호는 문도(文度)다.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 계열로, 상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하였다.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 서울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아버지 박사유(朴師愈)와 어머니 함평이씨(咸平李氏), 이창원(李昌遠)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22세 때 부터 원각사(圓覺寺 : 현 파고다 공원) 근처에 살 때 박제가,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등과 이웃하여 깊은 교우를 맺고, 홍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