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혁명당 3

최초의 망명정부 – 대한광복군정부

최초의 망명정부 –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은 무엇보다도 민족의식의 고양과 민족역량의 향상을 통하여 그 조직화된 역량을 거족적인 독립운동에 쏟아 넣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민족군대로서의 광복군을 본토 밖에서 양성하여 일제와의 전쟁을 치루는 한편, 본토에서는 그 전쟁을 뒷받침할 수 있기를 바랐다. 따라서 이상설은 우선 본토내외의 의병들을 규합해 나감과 동시에 한인학교에서는 인재들을 양성했다. 그리고 권업회(勸業會)의 조직을 통해서는 여러 지역에다가 비밀리에 광복군을 예비편성하고, 또한 광복군의 진지가 될 만한 비밀스러운 장소들을 물색하기도 했다. 이상설은 친분이 두터워진 곤닷지 총독과 교섭을 벌여서 그처럼 물색해 낸 장소들을 무상으로 빌어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훈련교관과..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신한혁명당

■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신한혁명당 1. 제1차 세계대전 전후 국내외 독립운동의 양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전쟁에 휩싸이게 된 러시아와 그 영향권에 있는 중국은 유화적인 대한인(對韓人) 정책을 철회하고 당시까지 합법적 한국독립운동단체조차도 해산시키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이전까지 러시아령·서북간도 등 각지의 독립운동기지에서 독자적으로 한인자치 및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인 권업회(勸業會),·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북간도의간민회(墾民會) 등이 이 시기를 전후해 해산 당했다. 또한 서간도의 부민단(扶民團)과 신흥학교(新興學校)도 백두산서편으로 이동해 백서농장(白西農場)으로 위장한 채 유지될 정도로 운영이 어려워졌다. 1910년을 전후해 애국지사들이 이들 지역에 망명해서 심혈..

조국 광복의 지도자 보재 이상설선생 사적비

■조국 광복의 지도자 보재 이상설선생 사적비 조국을 찾아 민족의 정기를 세우려던 수많은 애국지사들 중에서도 광복의 최고 지도자는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선생이시다. 이상설 선생은 제국주의 열강이 한반도를 에워쌌던 무렵인 1870년(고종 7년) 12월 7일 이곳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선비 이행우(李行雨)와 벽진 이씨(碧珍李氏)의 장남으로 탄생하시었다. 선생의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본관은 경주이씨(慶州李氏)이고, 고려 말의 명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22대 손이 되시며, 어려서 이조참의(吏曺參議)를 지내시던 이용우(李龍雨)에게 출계(出系=양자)하여 학문에 전심하시었다. 선생은 25세가 되던 해인 1894년 갑오문과(甲午文科)에 급제하시고, 이미 율곡(栗谷) 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