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길 2

이경휘(李慶徽)에게 보낸편지 - 송준길(宋浚吉) 書

■ 이 군미[李 君美-경휘(慶徽)] 에게 보냄 경진년(1640, 인조18) 글 : 송준길(宋浚吉) 지난가을에 멀리 찾아 준 것이 실로 천만뜻밖이어서, 난리를 겪은 뒤로 그립던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위로되었네. 그러나 겨우 반나절 동안 정담을 나누었을 뿐이어서, 쌓인 회포를 풀 수 없었던 것이 한스럽네. 요사이 세모(歲暮)의 추운 날씨에 해교(海嶠)에서 지내시는 제반 정황(情況)이 편안하신가? 그립고 염려되는 마음 갑절이나 더하다네. 나는 마음과 골수(骨髓)에 병이 들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조용히 조화(造化)의 구물(舊物)로 돌아가고자 할 뿐, 이 밖에는 다른 생각은 없다네. 근자에 듣건대 서쪽 소식이 매우 좋지 않다 하니, 앞으로 어느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네. 그러므로 기미를 보고는 먼저 떠나서 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묘지명(墓誌銘)

■동춘당 송공 묘지명(同春堂宋公墓誌銘) 숭정[崇禎 :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임자년(1672, 현종13) 12월 2일 자(字)가 명보(明甫)인 동춘 선생(同春先生) 송공(宋公) 휘(諱) 준길(浚吉)이 회덕현(懷德縣)의 시골집에서 졸하였다. 공의 치명(治命 유언(遺言)과 같은 뜻)이, “명장(銘狀)이나 뇌문(誄文) 등을 구하지 말고 다만 작은 표석(表石)에 성명(姓名)이나 새겨 두라.”하였으므로 그 손자 병문(炳文)ㆍ병하(炳夏)ㆍ병원(炳遠)ㆍ병익(炳翼) 등이 감히 어기지 못하여 비록 문인(門人)이나 지구(知舊)들이 말하여도 모두 듣지 않았다. 시열(時烈)이 이르기를, “공의 도덕(道德)과 사실(事實)은 이미 사람의 귀와 눈에 익어 있으니 앞으로 오래될수록 더욱 나타날 것이고 또 사관(史官)이 적어 두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