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전사자 3

병자호란에 순절한 충신과 백성들

기호일보(34) 병자호란에 순절한 충신과 백성들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남한산성 주변 여러 곳에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대표로 기억되는 사례가 쌍령(雙嶺)리 전투 순국자들의 사당인 정충묘(精忠廟), 남한산성 북문 밖 법화골에는 300명 병사들의 희생 이야기와 청나라 장수 양고리(楊古利)를 전사시킨 유적, 성남에는 충청병사 정세규(鄭世規)가 청군과 전투를 벌여 피가 냇물을 이룬 검천(險川)에 전해 진다. 당시 각지에서 구원병이 출동했으나 작전에 성공하지는 못해 원주영장 권정길(權正吉)이 맨 먼저 적은 군사를 거느리고 검단(黔丹)에 들어가 점거했고, 적은 군사로 많은 수의 적을 당해 낼 수 없어 끝내 패해 물러나기는 했으나 많은 군사를 가지고도 앉아서 ..

병자년 순절인에게 치제하라.

■ 고종 13년 병자(1876, 광서 2) 3월 25일(정사) 순묘조 병자년 순절한 신하들의 원우 등에 영묘가 병자년에 보답한 예에 따라 치제할 것인지를 묻는 예조의 계. ○ 예조가 아뢰기를, “전교하시기를, ‘오늘 북원 망배례 때에 풍천(風泉)의 감회와 강한(江漢)의 감상으로 나의 개탄스러운 마음이 평년보다 배나 되었다. 아아, 병자년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때 충신과 열사로 항의하여 척화(斥和)한 자들도 있었고 살신성인하는 자도 있었으며, 뜻을 잃고 자정(自靖)하는 자들도 있어 우뚝이 높이 솟아 영원히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다. 인륜이 이로 말미암아 부식되었고 국맥이 이에 힘입어 유지될 수 있었으니, 이는 모두 신하들의 공이다. 그 해의 갑자(甲子)가 다시 돌아왔으니, 열성조가 세..

이경선 충산정려문(李慶善忠臣旌閭門)

■ 충신 이경선(李慶善/二十九世) [생졸년] 1600년(선조 33) 5월 2일 ~1636년(인조 14) 12월 27일[병자호란 때, 검천(儉川) 전투에서 전사(戰死)] [문과] 인조(仁祖) 11년(163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7위(10/33)/34歲 [진사시] 인조(仁祖) 2년(1624)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36위(36/100)/24歲 ------------------------------------------------------------------------------------------------------------------------------------ 1600(선조 33)-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