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대한문 2

덕수궁 대한문(德壽宮大漢門)

↑1919년 3월 3일 고종의 장의 영여(靈輿)가 대한문을 나서고 있다. ↑덕수궁 대한문(德壽宮大漢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덕수궁(德壽宮)의 정문으로.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남문인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동문이었던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고쳤다. 1904년의 덕수궁에 큰 화재로 1907년에 그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대한문의 편액(扁額) 글씨는 1874년 (고종 11) 25세의 나이에 역과(譯科) 증광시(增廣試) 8위로 합격, 벼슬은 부경(副卿-從二品)을 지낸 소농(筱農) 이종태(李鍾泰)가 썼다.

경운궁(덕수궁)의 역사

■ 경운궁(덕수궁)의 역사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덕수궁은 조선 태조의 계비 강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으로, 능은 태종 때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 성종의 형 월산대군(1454∼1488)의 저택이 들어섰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난 갔다가 1593년 10월 왕과 조정이 서울로 돌아와서 거처할 왕궁이 없자 왕실의 개인 저택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이곳을 임시 궁궐로 삼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규모가 좁아서 인근에 있던 계림군(桂林君, ?∼1545)과 심의겸(沈義謙, 1535∼1587)의 저택을 합하여 궁내로 편입시키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부른 것이 후일 덕수궁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